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12화 (31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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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희경이 살짝 눈치를 주긴 했지만, 지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시방석 같은 근무시간이었다. 퇴근시간이 되었는데도 지혜는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야근"을 할 셈인가. 희경도 지혜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둘은 지혜에게 먼저 퇴근하겠노라고 말하곤 사무실을 나왔다. 지혜는 팀장으로서의 표정 말고는 다른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봐도 따로 문자를 보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한숨을 살짝 내쉬곤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희경이 태워주겠노라 제안했지만, 방향이 달라 사양했다. 우리 연구소가 있는 곳은 좀 외진 곳이라 택시가 잘 다니지 않았다. 근처 사거리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택시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아저씨는 몹시 진한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사파이어 호텔로 가주세요."

"하단에 있는 거 말이죠?"

"하단이요?"

부산의 지명에 대해 아직도 익숙지 않다. 아저씨에게 되묻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근처에 하단역이 있고 그 옆에 사파이어 호텔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 예에. 여기서 먼 가요?"

"아입니다. 금방 갑니데이."

아저씨는 자신의 말을 관철시키는 성격이 있었다. 금방 간다고 했으니 정말 금방 갔다. 그와 동시에 나도 이 세상을 금방 떠날 뻔했다. 왕년의 선영이 운전을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질주에 숨을 쉬지 못할 뻔했다.

"...우...운전 잘 하시는군요, 기사님."

하단역 근처에 와서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 기사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조수석 우측 상단의 보조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에 흥건하게 땀이 고인다. 날도 추운데 말이다.

"허허, 이 정도야 뭐. 부산 바닥에서는 보통이죠."

"....보통입니까?"

"손님은 운전 안 하세요?"

"운전이요? 그야 당연히 하기는..."

내가 운전을. 내가 운전. 내가 운전을...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색으로 가득 찼다. 붉은색. 붉은 핏빛. 붉디붉은 죽음의 색이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그러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입을 틀어막고 웁웁거리니까 택시기사가 크게 당황하며 티슈를 내어준다.

"어이쿠. 이를 어째. 멀미 하십니까?"

"웁... 그..그건 아니고...."

실제로 구토가 나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려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 날의 잔상이 아직도 날 힘들게 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택시기사는 자기가 운전을 급하게 해서 그런 줄 알고 연신 미안해했다. 그의 오해였지만, 굳이 해명하려고 하진 않았다. 덕분에 남은 거리는 비교적 안전운행으로 갈 수 있었다.

"여깁니다. 다 왔습니다."

"여기라고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명색이 호텔이 있는 거리치고는 꽤 복잡한 곳이었다. 술집과 음식점, 반찬가게와 옷가게 등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곳이었다.

"호텔은 어디..."

"저기 저, 골목 보이죠? 저 앞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바로 보일 겁니다. 거 앞까지는 차가 한 번 들어가면 빠지기가 어려워서 가기 좀 그래요. 여기서 내리시는 게 편할 겁니다."

난폭하게 운전한다는 거 말고는 꽤 친절한 기사님이었기에 더 이상 군말 없이 요금을 지불한 다음 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가르쳐 준대로 따라 올라가니 골목 뒤로 커다란 호텔 건물이 보였다. 말이 호텔이지 어지간한 모텔 정도의 규모였다. 입구에 도어맨이 서 있다는 점이 모텔과 다른 점이랄까. 딱히 어디서 보자고 한 건 아니기에 로비에서 일단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받자마자 물었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냐?"

"어디냐니. 그런 자기는 어딘데?"

지혜 목소리였다. 당연히 유진이일 줄 알고 어디냐고 물었던 난 조금 난처해졌다. 그래서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지혜가 따져묻듯이 거듭 묻는다.

"먼저 퇴근한다고 하더니 집에 안 갔더라? 지금 어디 간 거야? 누구 만나?"

"어, 누구 좀... 만나."

"누구? 여자야?"

처음에는 유진이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오늘 유진이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노라고.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마치 범인을 취조하듯이 몰아세우는 지혜의 말투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도 모르게 화를 벌컥 나고 말았다.

"니가 내 마누라냐? 내가 누굴 만나든 집에 안 들어가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회사에서나 상관이지 밖에서도 그런 식으로 굴지 마."

"말하면 되잖아. 누굴 만나길래 금요일인데도 나랑 같이 안 있고 나갔냐고 묻는 건데도 왜 화를 내? 내가 못 물어볼 거 물었어?"

"그러니까 내가 누굴 만나든 니가 뭔 상관이냐고. 내가 품의서류 결재 받듯이 내 행선지나 만나는 사람을 너에게 보고라도 하라는 거야,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사람 말을 곡해하고 그래."

"곡해는 니가 하고 있지. 됐어. 전화 끊어."

휴대폰 폴더를 거칠게 닫아버렸다. 뒷목이 몹시 당기고 이마가 화끈거릴 정도로 골치가 아파왔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기 전 번호를 먼저 본다. 지혜의 번호다. 휴대폰 뒷부분을 배터리를 분리시켜 버렸다. 그리고 휴대폰과 배터리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로비를 서성거렸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앉아있는 직원이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다.

내가 왜 화를 내었을까.

지혜의 말투는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변했을까.

나와 지혜는 분명 시작이 좋았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내가 정말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혜와 차분히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몸을 섞을 때는 그렇게도 뜨겁고 격렬했는데 한 번 틀어지면 이렇게도 차가워질 수 있는 게 남녀사이라는 걸 실감한다. 물론 선영과 결혼해서 살면서도 다투거나 싸운 적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같은 침대로 들어가 서로를 품으며 잠드는 "부부"사이였고, 지혜와 난 그렇지 않다. 둘이서 만나고 있단 걸 남에게 알리기조차 못 하고 있는 사이이니 무얼 더 말하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삐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다리던 얼굴을 발견했다. 유진이였다.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호텔에 들어서던 녀석은 로비 가운데 서 있는 날 발견했다.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다가온 녀석은 꽤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왜 이런 데 서 있어요? 지하에 바가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바? 술 먹자고?"

"그냥 이야기나 하자는 거예요. 암튼 기다리세요. 곧 갈게요."

유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휭하니 가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가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다. 원래 저런 녀석이다 보니 이젠 태클을 걸 기력도 없다. 그나마 연구소에서보단 말을 많이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니 꽤 큰 규모의 바가 있었다. 바텐더에게 마티니를 한 잔 부탁하고 바에 앉았다. 조명은 낮고 어두웠다. 가벼운 피아노의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었다. 홀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와 스탠딩 마이크가 있었지만, 연주자나 가수는 없었다. 바에서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나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바텐더가 건네준 잔을 기울여 홀짝이고 있노라니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마시던 걸로."

검은색 베스트를 걸친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곤 뭔가 색깔이 요란한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헐렁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유진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녀석의 손에는 작은 배낭이 하나 들려있었는데 그걸 바 위에 올려놓는다. 녀석은 내 앞에 놓인 잔을 힐끔 보곤 말했다.

"마티니? 취향 한 번 고급스럽네요."

"신사의 음료잖아."

"신사는 무슨. 아저씨면서."

최한석 씨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유진이의 호칭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바텐더가 유진이의 앞에 여러 가지 색이 섞인 긴 잔을 내려놓았다. 유진은 바텐더에게 노래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가서 오디오를 조작했다. 음악이 바뀌었다. 조금 경쾌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무거운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인지 비올라인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현악기의 선율이 즐거우면서도 구슬픈 음악이었다. 유진은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노래, 제목 알아요?"

"노래 이야기나 하자고 날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

"제목 아냐고 물었어요."

이런 고집스러운 녀석 같으니...

"몰라."

그러자 유진이는 내뱉듯이 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무슨 걸음?"

"돌이킬 수 없는... 돌아가서는 안 되는 걸음."

이게 무슨 선문답 교리시간도 아니고 슬슬 화까지 나고 있었다. 반쯤 남은 마티니를 홀짝 마셔버리고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옆자리의 유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않을래? 난 널 오랜만에 보자마자 뺨부터 맞았어. 그리고 네가 몰아붙이는 통에 한 달 넘게 개처럼 일만 했다고. 너와 내가 그렇게까지 친밀한 사이가 못 된다고는 해도 한번쯤은 서로의 안부라거나 주변 사람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잖아. 넌 애가 왜 이렇게 매몰차니?"

유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마치 인형 같은 그 얼굴은 마찬가지로 인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얀 얼굴 아래쪽에 자리한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날 부른다.

"아저씨."

"왜?"

"언니의 마지막은, 언니의 마지막은 편안했나요? 울지 않았나요? 웃었나요? 그걸 내게 먼저 말해줘요. 그렇다면 나도 모든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요."

언니의 마지막? 유진이가 말하는 언니라면... 선영뿐이다. 선영의 마지막? 선영의 마지막이 어쨌더라? 기억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두통이 일어난다. 아까도 보았던 붉은색 광경이 내 머릿속을 잠식한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왼쪽 어깨가 욱신거린다. 눈을 뜰 수 없다. 눈을 감을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색, 붉은색,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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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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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를 향해 겹쳐있던 시침과 분침. 분침이 조금 움직인다. 이제 시침과 분침은 약간의 각도를 이루며 벌어진다. 소파에 앉아 그걸 보고 있던 선미는 고개를 돌려 부엌 쪽을 보았다. 두 병의 보드카가 이미 빈 병이 되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세 번째 병을 쥔 지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기울였지만, 잔은 채워지지 않았다. 병이 이미 비어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빈 병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며 외쳤다.

"선미 씨... 슐.... 슐이 없는데?"

"더는 없습니다."

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 곁으로 갔다. 빈 병을 모아 베란다로 갖다 놓았다. 그러는 동안 지혜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냉장고로 다가갔다. 냉장고를 연 그녀의 흐릿한 눈이 또 다른 술을 찾는다. 그렇지만 이미 선미가 모두 감춘 후라 발견되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은 지혜가 선미를 쏘아본다.

"슐... 슐이 없다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없습니다."

소리 지르던 지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진다. 간절한, 몹시도 애절한 목소리로 선미에게 사정한다.

"딱... 딱 한 잔만 더 할게... 쎈 거 아니라도... 맥주라도 좀 줘...."

그러나 선미는 고개를 저었다.

"한석 씨는 늦으실 모양입니다.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들어가 주무시죠."

"아냐, 한석이는... 한석이는 올 거야. 내가... 내가... 기다려야 해...."

식탁으로 다시 걸어가던 지혜의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황급히 손을 뻗어 테이블을 짚으려 했지만, 그곳은 허공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혜는 부엌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혜 님!"

선미가 황급히 쭈그려 앉아 지혜를 부축했다. 아니, 부축하려 했다. 바닥에 쓰러진 지혜는 선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혜의 거친 숨소리, 술 냄새가 가득 섞인 숨결이 선미의 귀를 간지럽힌다.

"날... 날 혼자두지 말아줘..."

"지혜 님..."

선미는 낮게 신음했다. 지혜의 손이 점점 선미의 옷 안으로 들어온다. 저항하지 않는 선미의 옷이 조금씩 그녀의 옷에서 떨어져 나간다. 지혜는 선미의 목덜미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날... 날 혼자두지 말아줘..."

선미의 상의가 거의 다 벗겨졌다. 겉옷과 같은 색깔의 브래지어가 흐트러지며 선미의 봉긋한 유방이 드러난다.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이즈지만 그래도 훌륭한 윤곽을 자랑하는 가슴이다. 지혜의 손이 그 가슴을 우악스럽게 쥔다. 그때였다.

"이...이모?"

토끼 그림이 그려진 잠옷을 입은 수영이가 부엌 한쪽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미는 황급히 자신의 옷을 수습했다. 지혜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엄마와 눈이 마주친 수영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

지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손을 뻗어 싱크대에 놓인 국자를 집어 들더니 수영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불안한 걸음걸이였지만, 그녀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치, 수영아?"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

선미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채 못하고, 옷도 미처 다 입지 못한 상태에서 기어가다시피 하여 엉엉 우는 수영이에게 도달한다. 그녀는 수영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지혜를 올려다보았다.

"지혜 님. 이제 그만하세요. 지혜 님! 당신 아들이라고요!"

지혜의 눈이 수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녀의 시선이 선미의 얼굴을 향한다. 지혜는 살짝 웃었다.

"알아요. 나도 알아. 수영이는 내 아들이지. 그래. 내 아들이지. 그렇지만..."

국자를 든 그녀의 손이 높게 올라갔다.

"그런 동시에 누구 아들인지 몰라. 나도 모른다고!"

국자가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수영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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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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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분량이 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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