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3 / 0471 ----------------------------------------------
Route 5
난 운전 중이었다.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작동하게 해두었는데도 유리창에 물기가 가득했다. 별수 없이 속도를 줄인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한적한 국도인지라 평소 같으면 쌩쌩 달리겠지만, 이런 날씨에서는 시속 60만 달려도 차가 휘청휘청한다. 속도를 더 줄였다. 내가 운전에 몰두하는 동안 옆자리의 선영은 품에 안은 쇼핑백을 들여다보며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블라우스가 낫지 않았어? 어머님 요새 외출하실 때 그런 거 곧잘 입으시거든."
아까 옷 살 때 두 개 중에서 어떤 걸 살까 계속 망설이더니 아직도 그러는 모양이다.
"어떤 영감한테 잘 보일라고 그런 요란한 색을 입는다 그래.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그만이지. 다 늙어서 무슨."
"자기도 참. 어머님이 왜, 마을회관 아저씨들이랑 사이좋은 게 싫어?"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지."
선영은 쿡쿡 웃었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며 고민하기에 오른손을 뻗어 쇼핑백을 들어 아래로 내려놓았다.
"엄마 선물은 이미 샀잖아. 이제 그만 고민해."
"그래도 간만에 시내까지 가서 골랐는데 기왕이면 이쁜 걸로 해드리고 싶어서 그렇지."
"사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해야지. 엄마는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냐."
"그러려나?"
며칠 후가 엄마 생일이다. 선물을 사기 위해 하루 시간을 내어 광주 시내까지 외출했다. 간만의 외출이라 선영은 살짝 들떠있었다. 항상 수더분한 차림만 하고 있던 선영이 모처럼 곱게 화장도 하고 예쁜 원피스도 입었다. 시내 백화점에서 엄마 옷을 사면서 선영에게도 한 벌 권했다. 매장 디스플레이에 걸려있던 붉은색 원피스가 무척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선영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탈의실에서 바로 갈아입고 왔다. 애들 옷을 사러가려 할 때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왔는데 갈수록 빗발이 굵어졌다. 선영과 아라는 좀 더 있다가자고 졸랐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농수로의 수문을 열어놓고 온 터라 얼른 가서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칫! 아빠 미워!"
이제 할머니 옷이랑 엄마 옷을 다 샀으니 자기 옷을 살 차례라고 들떠있던 아라였다. 옷을 다 사고 나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던 아라. 그런데 그게 불발로 끝나자 녀석은 뒷좌석에서 끊임없이 불평을 해댔다.
"치잇. 아빤 맨날 거짓말만 하구..."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아가씨."
"힝."
그렇게 칭얼대다 잠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좀 조용했다. 운전하면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뚝 끊기자 꽤 조용해졌다. 한참을 달리던 난 선영에게 물어보았다.
"둘 다 자?"
선영이 고개를 돌려 확인한다.
"응. 그런가 봐. 아, 아니네."
아니라는 소리에 잠깐 뒤를 돌아본다. 뒷좌석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쳤다.
유라였다.
좌측 좌석에 아라가 입을 벌리고 침 흘리며 자고 있고 우측 좌석에 카시트가 놓여있다. 내 둘째 딸, 유라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깨어있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났는데도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나의 천사.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에 까만 눈을 가지고 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은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다. 아직도 젖냄새가 물씬 나는... 나의 천사다.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라가 깼네."
"쟤는 깨도 조용해서 일어났는지를 모르겠어."
유라는 어찌나 순한지 온종일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지내는 날이 많았다. 뭐 하나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온종일 악다구니를 써대는 제 언니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선영은 혀를 내두르곤 했다. 운전 중이니 전방 주시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 리어 미러 밑에 달아놓은 룸미러를 통해 뒤를 보며 유라와 눈을 마주쳤다.
"유라야, 일어났어? 잘 잤니?"
유라가 입을 크게 벌리고 대답 대신 하품을 찍 한다. 그래놓고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가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내 마음이 다 푸근해진다. 내심 아들이길 바라던 엄마는 둘째마저 딸이라고 서운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선영이는 셋째로 아들을 낳겠노라 다짐하며 엄마를 달랬었다. 그랬던 엄마도 유라의 저 천사 같은 미소에는 맥을 못 추고 헤벌레할 정도였다.
"유라야, 배고프지 않니?"
유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차를 도로 한편에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사이드를 올린다. 몸을 뒤로 돌려 카시트에 앉은 유라를 꺼내왔다.
"우쭈쭈쭈, 잘 잤어?"
코를 유라 이마에 대고 몇 번 비비자 녀석은 까르르 웃으며 내 얼굴을 더듬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다. 선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원피스의 한쪽 어깨에서 팔을 빼내며 내게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응. 자자, 조심조심."
선영이 유라를 안아든다.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가득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자기 입 앞에 오자 유라는 정신없이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걸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선영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젖가슴을 바라본다.
"신기해."
"뭐가?"
"전에는 내가 그렇게 쪽쪽 빨아대던 걸 애들이 먹고 있는 걸 보니... 뭔가 뺏기는 기분이야."
선영이 날 보며 웃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도 밤에 드시고 계시잖아요. 안 그래요, 서방님?"
"그야 그렇지만... 이 녀석, 이제 돌도 지났는데 젖 슬슬 떼야하지 않을까?"
"워낙 잘 먹어서 그런지 젖이 아직도 많이 불어. 이유식도 시작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떼게 될 거야. 지금은 그냥 습관처럼 먹는 거지."
"습관처럼? 그럼 나도 습관처럼 지금 나머지 한쪽 좀 먹어볼까?"
달려드는 품을 취했더니 선영이 까르르 웃으면서 날 밀어냈다. 우리가 노닥거리는 소리에 자고 있던 아라가 깼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배배 꼬는 녀석을 보며 한마디 했다.
"뭐야, 너도 엄마 젖 먹으려고 깬 거야?"
그러자 잠이 덜 깬 아라는 짜증을 부렸다.
"이씽, 안 먹어. 난 애기 아냐."
"애기는 아니지만, 짜증을 잘 부리는 심술쟁이지. 유라를 봐라. 애가 짜증 한 번 안 내잖아."
그러자 아라는 유라 쪽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이씽, 나도 저 나이 때는 얌전했어."
"웃기네. 너 완전 짜증쟁이였거든? 어느 정도였느냐면 말야. 한 번은...."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벼락이 친 거라고 생각했다. 천둥이 울린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폭약을 터트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차가 덜컥, 아래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내 몸이 한 바퀴 돌았다. 두 바퀴 돌았다. 세 바퀴 돌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돌고 또 돌았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내 몸이 돈 게 아니었다. 내가 탄 차가, 우리 가족을 태운 차가 절벽을 타고 굴러 내린 거였다. 내 시야가 그대로 암전되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평생 이어질 것 같은 요동이 겨우 멈추었다. 온몸에 쏟아지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간신히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본다.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찌그러지고 있었다. 오른쪽 좌석이 땅에 닿아있다. 유리창을 두드리던 비가 어느새 내 뺨을 두드리고 있다. 유리창은 죄다 깨져나갔고, 아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붉은색.
붉은색이 거기에 있었다.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이제는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끌어안은 채, 우그라든 차체의 틈바구니에 선영이가 끼어 있었다. 그녀의 우측 몸 절반이 찌그러진 차체의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녀의 머리, 몸, 얼굴 어디고 할 것 없이 전부 붉은색의 피로 번져간다. 선명하고 밝은 붉은색의 원피스가 더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붉게, 더 붉게. 그렇게 온 세상이 붉게 변한다.
"선영아!! 선영아!! 선영아!!"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몸 역시 부서진 차체 사이에 끼어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선영은 왼손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들어 품에 안은 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라는... 자나보다... 자는 건가봐...."
한쪽 밖에 보이지 않는 선영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함박웃음을 짓던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믿을 수 없었다. 유라를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긴... 자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선영아! 너는?"
"나는... 나는...."
"엄마아! 엄마아!!!"
아라의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변하여 엄마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라의 엄마는 아라에게 갈 수 없다. 저기 지금 묻혀져 가고 있기에.
"기다려! 사람을 부를게!"
그나마 자유로운 손을 빼내어 주머니를 뒤졌다. 차가 전복하는 통에 주머니 속의 물건은 죄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겨우 핸드폰을 찾아 119를 불렀다. 위치를 묻는 구급대원에게 국도 번호와 주변 지형을 일러준다.
"여보. 좀만 참아. 사람이 곧 올 거야. 사람이..."
그러나 선영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는 눈물을,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았고 다시는 뜨지 않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