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14화 (31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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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누군가 가볍게 내 이마를 짚어 도로 눕게 한다.

"안정을 취해요.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빈혈이 더 심할 수 있어요."

유진의 목소리다. 이마에 얹어진 수건이 시원하다. 눈을 감은 채, 유진에게 말했다.

"여긴, 어디지?"

"제 방이에요. 술집에서 갑자기 쓰러졌기에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이리로 옮겼어요. 발작성 실신이니 좀 더 쉬어야 해요."

"니가 무슨 의사라도 돼?"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생리체학의 일부인 프로테오믹스에 관한 박사 학위가 있죠. 인간의 몸도 결국은 시스템의 일부니까."

프로테오믹스라니. 차라리 커피믹스에 대한 학위가 있다고 해주려무나. 하는 농담이 떠올랐지만... 그런 농담을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선영이 꿈을 꿨어. 사고 당시에... 그래, 네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선영은 울면서도 웃었어. 그걸... 알고 싶었니?"

"네."

유진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여름이었고, 비가 많이 오고 있었어. 아라의 동생인 유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 차를 세웠지. 도로변에 세웠는데... 거기가 하필 도로 유실이 시작되는 곳이었어. 급격하게 내린 비에 지반이 무너졌고... 우리 차는 수십 미터 아래로 처박혔지. 유라는 즉사했고... 선영도 구조대가 오기 전에 죽었어. 내가... 내가 거기에 차를 세워서 그래."

"그만 말해도 돼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전부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라고..."

이마에 얹어진 수건이 치워졌다. 따뜻한 손이 내 시야를 가린다. 유진이 손으로 내 눈을 가린 것이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건 사고였어요. 어쩔 수 없는 거였다고요."

"그렇지만 내가 집에 가자고 서두르지만, 않았어도... 멍청하게 거기에 차를 세우지만 않았어도 선영과 유라는 죽지 않았어."

사고 이후 얼마나 내 자신을 자책했나 몰랐다. 도로공사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빌어먹을 변호사는 수임료만 받아 처먹고 그 이후 소식이 없다. 갑작스럽게 많이 내린 비와 도로의 유실이, 상식적으로는 연관된 일 같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했다. 말이 되냐고 도로공사 사업소를 찾아가 깽판도 쳐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이후, 나는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핸들을 잡으면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전방을 바라볼 수 없었다.

선영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는데, 유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사람은... 언제 어디서고 죽을 수 있으니까. 그걸 고르는 건 사람의 몫이 아니에요. 설령 그걸 미리 알았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유진의 말투가 묘했다. 몸을 일으켜 녀석을 쳐다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유진이와 눈을 마주친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녀석은 방금 "미리"란 단어를 사용했다.

"미리 알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유진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거북할 지경이었다. 한참 그렇게 날 보던 유진이 한층 더 이상한 소리를 꺼낸다.

"혹시 그런 거 믿으세요?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 혼자 말을 이어간다.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구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거의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죠. 그 사람이 선영이 언니에게 물었어요. 만약 네가 최한석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그건 길어야 몇 년 정도일 거라고. 만약 한석과 같이 있지 않는다면 문제없지만, 한석과 같이 있을수록 넌 더 빨리 죽게 될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녀를 죽이기라도 한단 말이야?"

"아니요. 아저씨 잘못이란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된다고 했어요. 사실 말한 사람도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대요. 그냥 그 사람은 볼 뿐이에요. 보는 게 다라고요."

"안 좋은 일을 미리 보면 피할 수 있잖아!"

그러자 유진은 코웃음 쳤다.

"피하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피해버렸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이 본 건 미래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는 한 유진은 그 누구보다 명석하고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 "미래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만화 같은 소리를 철석같이 믿으며 그 자체를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다.

"미래를 본다는 게 정해진 사실이라면, 미래를 보고 피해버리면 그 미래는 생기기 않아요. 그렇다면 애초에 미래를 본다는 게 거짓이 되잖아요. 모순이 발생하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유진의 이야기는 한층 더 날 힘들게 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암튼 그래요. 그 사람이 선영이 언니한테 물어본 건 그거였어요. 자신이 본 미래에서... 네가 한석과 있다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좋냐고 했더니 선영이 언니는 그 사람한테 물어봤대요. 그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는 있냐고. 그 아이를 얼마나 기를 수 있냐고 말이죠."

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았다. 등줄기가 서늘하다. 무언가 작고 차가운 것이 내 등을 훑고 내려가는 것 같다.

"그랬더니 미래를 보는 사람이 그 아이가 학교 가는 것까지는 볼 수 없다고 했대요. 그러자 선영이 언니는 웃으면서 대답했대요. 그 아이가 계속 날 기억해준다면... 그렇다면 자기는 영원히 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괜찮다고... 몇 년밖에 같이 못 살아도 문제없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대답했어요."

가슴이 답답했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그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끝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랬단 말인가. 그래서 그렇게...

"그 이야기가... 사실이야? 미래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선영이가 자신이 죽을 걸 알고도 나랑 결혼했다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래도 언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말도 안 돼! 어떤 미친 무당이 그런 소리를 한 거야? 무슨 뭐 궁합 안 좋아서 같이 살면 급살 맞아 뒈진다는 소리를 들어봤어도 이런 황당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간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날 바라보는 유진의 표정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진이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는 선영이 언니보다 먼저 죽었어요. 자신이 죽을 거라고 예상한 날, 예상한 곳에서 불의의 사고로. 그리고 선영인 언니도 실제로 죽었고요. 이 모든 이야기를 미리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나뿐이니까,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아저씨는 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언니의 죽음에서 미처 벗어나고 있지도 못하고요. 이야기를 마저 들을 준비가 되면, 그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해주겠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유진에게 등을 돌리고 나가려는데 녀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처음 만난 날, 왜 때렸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문가에 서서 유진을 돌아본다.

"그래."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아라를 봤어요. 아라에게 엄마 이름을 물어봤더니 김지혜 씨 이름을 대더군요. 언니는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언니의 유일한 소원이었는데... 너무 빨리 잊은 게 아닐까 싶어서요. 가정교육이 얼마나 엉망이면... 그게 화가 나서 아저씨를 때렸어요."

"네가 아라를 어떻게 알지?"

"그 아이의 얼굴에 아저씨 얼굴과 선영이 언니의 얼굴이 반반씩 들어있으니까 한 눈에 알아봤죠. 사진으로 많이 보기도 했고...."

"사진? 선영이가 네게 사진을 보내주었어?"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라는 엄마 이름만 잊은 게 아니야. 그러니 너무 뭐라 그러지 말아줘."

문을 닫고 나왔다. 길고 어두운 호텔 복도의 바닥에는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걸 따라 걷는다. 호텔을 나와서도 계속 걸었다. 밤이 되어도 인간이 만들어낸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거리를 따라 걷는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 하늘을 보면 새까만 어둠이 가득한 하늘이 있건만 우리는 오직 땅 위의 불빛만을 보며 살아간다.

집까지 걸어가는 건 꽤 걸렸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땀이 송골송골 배어나온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자정이 넘었다. 그제야 핸드폰 생각이 났다. 다시 연결할까 하다가 어차피 지혜가 우리 집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또 치근덕거릴려나 생각하니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그녀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술도 마시지 말고, 몸도 섞지 말고... 말 그대로 마주 앉아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집에 들어선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어어허엉... 엄마...엄마아...."

수영이가 울고 있었다. 그런 수영이를 선미가 꼭 감싸고 있다. 선미의 머리와 어깨는 피투성이였다. 선미의 옆에는 패악스러운 몸짓으로 연신 손을 휘둘러 내려치는 지혜가 있었다.

"비켜! 비키라고! 그 씨 모를 자식을 죽여야 해! 없애버려야 한다고!!"

지혜의 외침에 내 정신이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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