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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황급히 달려들어 지혜를 제지했다. 독한 술 냄새가 그녀의 숨결에 섞여 훅하고 밀려온다. 각각 한 손씩 그녀의 손목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몸부림치던 지혜는 어느 순간 몸에 힘을 빼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희번덕거린다.
"한석....?"
"그래, 나야.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라니..."
선미는 바닥에 엎드려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칼과 상의는 피투성이였다. 아마도 수영이를 보호하려는 듯 아이를 끌어안고 엎드려 있었다. 수영이는 빽빽거리며 울고 있어서 정신이 있는 줄은 알겠는데 선미의 상태는 알 수 없다. 숨은 쉬는 것 같지만, 그녀가 흘린 피가 보통이 아니었다.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사람이 쓰러진 거 안 보여?"
"....누가...?"
"니가 저지른 짓을 봐!"
지혜의 눈이 아래로 향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선미를 향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듯한 멍한 눈으로 다시 날 올려다본다. 그러면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것봐... 넌 나한테 올 줄 알았어... 우리... 할래?"
"하긴 뭘 해. 너 제정신이야? 이런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 너만 원한다면..."
"미쳤구나. 미쳤어."
기가 막혔다. 이런 순간에도 내 몸을 탐하려는 지혜의 손길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내 몸을 더듬던 그녀는 나의 이런 반응에 깜짝 놀란 듯 보였다.
"그거 이리 내."
지혜의 손목을 비틀어 국자를 빼앗았다. 쇠로 된 국자였지만, 잔뜩 휘어져 있었고 끝 부분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붉은색이 내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역한 피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지혜를 살짝 밀어 의자에 앉혔다. 몸을 굽혀 선미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빠 왔어?"
아라가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이런 참혹한 모습을 아라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라에게 외쳤다.
"아라야. 얼른 들어가. 들어가서 문 닫고 있어. 아니다. 아냐. 잠깐만."
선미를 뒤집어 바로 눕혔다. 정확히 어디서 피가 흐르는지 알지 못해 지혈하기는 어려웠다. 선미의 밑에 깔려 있다시피 한 수영이를 끄집어낸다. 펑펑 울고 있지만, 녀석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선미의 밑에 있었던 터라 그녀에게서 흐른 피가 수영에게도 많이 묻어 있었다. 수영이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녀석은 발광하며 날 밀어냈다.
"인마... 가만히 좀... 얼른 아라한테 가. 얼른."
그렇지만 수영이는 좀처럼 선미를 붙들고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난감했다. 선미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든가 해야 하는데 수영이 녀석이 좀처럼 협조하지 않는다. 결국 아라도 거실로 나오고 말았다. 아라는 피투성이가 된 선미를 보더니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아라의 눈이 크게 떠졌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아라는 신음을 흘리듯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유라야...."
저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을 외쳤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유라야... 유라야..."
아라까지 펑펑 울기 시작한다. 저 서럽기 짝이 없는 울음을 보고 있노라니 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아라는 그날의 사고 후, 동생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잊었다고 해야 하나, 잃었다고 해야 하나... 병원에서 근 한 달 넘게 누워있다 집으로 왔을 때,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 아라는 말했다.
[쟤는 누구야?]
아라가 가리킨 건 선영이 안고 있는 유라였다. 아라는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녀석은 정말 유라를 잊었다. 까맣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피투성이의 엄마 품에서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동생이 죽어가는 광경을 본 여섯 살짜리 꼬마의 자기방어기제는 그런 식으로 작동한 모양이었다. 나에겐 원래 동생이 없었다... 없었다... 그렇게 믿는 걸로 말이다.
우리 엄마는 나와 아라가 병원에 있는 동안 혼자서 유라의 상을 치렀다. 자식은 땅에 묻는 게 아니라며 화장을 한 후, 백당폭포 위에서 유라의 유골을 모두 흘려보냈다. 그리고 유라의 장난감, 젖병, 옷 등도 한데 모아 뒷마당에서 모두 태웠다고 했다. 내가 엄마에게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대들었더니 엄마는 쓸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연히 집 어딘가에서 유라가 쓰던 물건이 하나 굴러 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거의 사흘간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걸 부둥켜안고 내내 울고 있는 내 등짝을 때리고 강제로 빼앗아 갔다. 빨랫감 중에서 우연히 굴러 나온 아기용 턱받이를 보고 반나절 가량 울다가 엄마한테 뺏긴 적 있다. 그걸 아궁이에 냅다 던져 넣는 엄마의 얼굴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을 아라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산에 와서 아라가 수영이에게 유독 친근감을 보이는 이유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또래보다도 훨씬 늦되고 하는 일마다 서툰 수영이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라가 "언니"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영이가 남자애라는 사실이 밝혀졌어도 아라는 수영이를 계속 "여자애"로 대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아라가 수영에게서 유라의 모습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아라는 그동안 잊고 있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어떤 점이 잊혔던 유라를 떠올리게 한 건지 알 수 없다. 피투성이인 점이? 아니면 선미에게 깔려있는 점이? 어찌 되었건 아라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 동생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아라가 울자 신기하게도 수영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아라를 보고 있었고 그 틈에 얼른 들어다가 선미에서 떼어낼 수 있었다.
"아라에게 가 있어! 아라를 보살피렴."
내가 떠밀자 수영이는 엉거주춤 아라에게 다가갔다. 수영이는 아라를 달래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다음 난 선미를 살폈다.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 간격이 불규칙했다. 미안하지만 뺨을 조금 두드려보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떨린다. 이내 눈을 떴다. 완전히 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뜨긴 떴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이 이내 곧 날 향한다. 그리고 날 알아보았다.
"한석 님...?"
"그래요. 선미 씨.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으음..."
선미가 손을 올려 자기 머리를 짚는 걸 보고 피가 나는 부위가 어디인지 알았다. 머리 뒤쪽인데 그녀의 머리칼이 워낙 풍성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피가 나는 부위를 꾹 눌러본다. 붉은 피가 번져 손수건이 순식간에 물들어 버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냈다. 선미를 부축하여 겨우 일으켰다.
".....내가 아닌 거야?...."
등 뒤에서 지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아닌 거야..."
사람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놓고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지혜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그녀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너 진짜 정신 안 차리니? 네가 선미 씨에게 한 짓을 보라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내가 아니라 이거지...."
"아니긴 뭐가 아냐! 빨리 119나 불러!"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땀과 피로 얼룩져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댄 선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수영이도... 너도... 내가 아니라... 선미를...."
그러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면서 말했다. 어째 불안했다. 지혜의 웃음이 점점 더 커진다. 그녀는 점점 미소를 크게 짓더니 날 쳐다본다.
"그래... 너, 한석이... 너... 선미랑 하고 싶구나? 그치?"
"뭐어?"
이런 지경인데도 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 지혜. 솔직히 아까부터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기쁜지 활짝 웃으며 외쳤다.
"그럼 셋이 하자! 셋이 해도 된다고 했잖아! 응? 셋이 하자. 우리 그때 효진이랑 한 것처럼 말야. 응?"
내 팔을 잡고 어찌나 세게 흔드는 지, 겨우 부축하고 있던 선미를 놓칠 뻔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내게 겨우 기대어 있던 선미가 쓰러질 뻔했다. 일단 지혜의 손을 뿌리쳤다.
"정신 좀 차려. 일단 선미 씨 치료가 먼저야. 치료하고 돌아오면 넌 선미 씨에게 무릎 꿇고 사과할 준비나 해. 경찰을 안 부른 게 다행인 줄 알아."
"경찰?"
경찰이라는 소리를 들은 지혜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는 내게서 뒷걸음치더니 싱크대까지 물러났다. 뒤로 걷던 그녀는 싱크대에 부딪혔다. 더 이상 뒤로 갈 곳이 없자 그녀는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화낼 기력도 사라진다. 자꾸 흘러내리려는 선미를 애써 부축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선미 씨. 정신 차려요. 선미 씨. 걸을 수 있죠?"
선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부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문을 닫고 있으라고 했건만... 수영이가 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열린 문틈으로 훌쩍거리며 여전히 유라를 찾는 아라의 모습이 보였다. 수영이는 주변을 살피다가 날 보더니 흠칫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모... 다쳤어요...?"
지금 상황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수영이가 내게 다 질문을 하고... 기특하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계제는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네 엄마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려나. 그냥 어른들끼리 조금 다투었다고 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처참했다. 고민하던 난 애써 좋은 표정을 지으며 수영에게 대답했다.
"조금 다쳤어. 너희는 얼른 자렴. 늦었..."
그때였다. 수영이의 눈이 커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저 녀석이 날 왜 부르는 걸까. 의문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부르르 떨렸다. 왼쪽 허리 뒤쪽이 불에 덴 듯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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