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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부축하고 있던 선미를 놓쳤다. 내게 기대어 있던 선미는 스르륵 쓰러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미안함을 표현할 틈이 없었다. 지금 내 허리 뒤에 꽂힌 "이물감"을 확인하는 게 더 급했다.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손을 뒤로 돌려 허리춤을 더듬는다. 이윽고 무언가 만져졌다.
"이...이건..."
딱딱한 무언가. 뾰족한 무언가.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몸에 꽂혀있었다. 몸을 돌린다. 거기에 핏발 선 눈이 있었다. 지혜의 눈이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더러운 자식. 너도 똑같구나."
"똑같다니..."
"내 몸이 목적이었어? 그렇지?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같이 있어 주지도 않으면서! 니 좆이 꼴릴 때만 필요한 그런 여자가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숨 쉬기기 힘들었다. 허리에서 피어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가면서 신경을 하나하나 마비시키는 것 같다. 혀가 꼬인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내가 그냥 당할 것 같아? 넌 날 버릴 수 없어! 네가 날 버리려면 니 목숨부터 버려야 할 거야! 이 좆같은 놈아!"
"내가 널 버리려는 게 아....냐....너가... 너 스스로를...."
무너진다. 무너진다. 내 몸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진다. 무릎이 강제로 접히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만다. 내 옆에 쓰러진 선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빨리 병원에 데려다 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데려다 주는 김에 나도 병원에 가야 하는데.... 뭐가 먼저인지, 뭐가 나중인지 알 수 없다. 귓가에 벌 한 마리가 내려 앉아 붕붕거리고 있는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데 섞여 내 고막을 두드리는 것 같다. 눈을 뜨고 있기도 버겁다. 그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내 욕심이다. 그럴 수 없다. 어떻게든 손을 뒤로 돌려 칼을 찾는다. 한참을 더듬거려 손잡이를 찾는다.
"한석 님..."
바닥에 쓰러진 선미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고 날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도 적지 않았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입을 벌리며 고통이 더 심해져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안심... 안심해요. 지금 바로 구급차를 부를 테니..."
주방을 뒤지고 있는 지혜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내 몸에 꽂아두었으니 다른 칼을 찾는 것일까.
"일단... 아이들 방으로.. 어서..."
선미를 부축해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안으로 들어가 방을 잠그라고 이른다. 수영이가 문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이 날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왔다. 저 작은 녀석이, 뭐가 그렇게 울상일까. 난 괜찮은데.
"선미, 선미 어디 갔어?"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 황급히 아이들 방문을 닫고 그 앞을 지켜 섰다. 젠장. 우리 집에 저런 칼이 또 있었단 말인가. 고기 자를 때 사용하는 톱칼이었다. 한 손은 등 뒤로 한 채로, 다른 손을 내밀었다.
"지혜... 그 칼.. 내려 놔... 괜찮아... 여긴 널 힘들게 하는 사람 없어... 난 널 공격하지 않아..."
그러나 지혜의 눈빛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내가 모르는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아니다. 모른다고 하면 거짓일지도 모른다. 내 몸을 탐하던 그녀의 눈빛은, 아마도 저런 빛이었을 것이다. 여태 모른 척 했겠지.
등으로 방문을 지탱하고 서 있었지만, 점점 서있기 힘들었다. 지혜의 사나운 눈빛을 마주한 채, 그대로 다리가 풀린다. 앞으로 엎드린다. 허리 뒤에서 뭔가 왈칵왈칵 나가는 느낌이 들지만, 확인할 도리는 없다. 허리춤 아래로 바지가 축축해지고 있지만, 난 결백하다. 오줌은 싸지 않았다.
눈을 감기 전, 아이들이 들어가 있는 문을 보았다. 문은 다행히도 닫혀 있었고 지혜가 다가가 문을 열려고 애쓰는데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마도 문을 닫고 잠근 모양이다. 수영이 이 녀석... 그래도 할 때는 똑바로 하는구나 싶어서 다행스러웠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밀려온다. 눈꺼풀이 무겁다. 난 좀 쉴 필요가 있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일까.
모르겠다.
"슐~ 슐, 떨어졌어요, 사장님~!"
들고 있는 소주병으로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는 한 여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있다. 이름은 김지혜지만, 이 당시의 난 그녀의 이름을 이명희로 잘못 알고 있었다. 진호 선배가 주선한 급한 소개팅에 대타로 나가게 된 나였는데, 정작 이명희는 약속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게 왔다. 커피숍에 혼자 앉아 있는 지혜를 보고 명희라고 혼자 착각한 나는 그녀의 앞에 앉았었다. 어찌어찌하여 같이 저녁을 먹었고 술까지 먹으러 갔었다.
"저, 명희 씨. 이미 많이 드셨는데요... 이제 그만 드시는 게...."
"한석 쒸이?"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 혀는 꼬일 대로 꼬인 그녀다.
"오늘이, 우리 데이트 촛날인데.... 제가, 춈 많이 마셨져?"
"아니, 뭐... 데이트라면 데이트지만....."
"미안해여~ 미안해~ 해에~"
"아니, 미안할 거 까지야...."
"화지만~ 난~ 한석쒸같은 솨람이~ 너무 좋아~ 그래서 마셨어여~ 괜찮져?"
"...괘...괜찮아요."
"그럼, 괘안으니까 한 병 더~!! 솨장님!! 여기 쐬주 좀 주세요~ 잘 흔들어서~"
자정이 넘어서까지 그녀와 술을 마셨다. 간신히 술을 다 마시고 나왔더니 지혜는 2차 타령이었다. 그런 그녀를 간신히 데리고 길을 가는데 오뎅과 핫바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핫바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앙...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랑 모양이 닮았네엥...."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핫바를 하나 손에 쥐더니 입에 물고 먹는 게 아니라 살살 빨기 시작했다. 간신히 그녀를 제지하여 핫바를 내려놓게 하고 끌고 갔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파고들며 속삭였다. 잔뜩 젖은 목소리였다.
"아까, '핫바'를 좀 빨았더니... 아니... 먹었더니... 막 젖고 그래.....요...."
그러면서 혼자서 팬티를 벗으려고 했었다. 길바닥에서! 결국 그녀와 난 모텔에 갔다. 난생처음 모텔에, 그것도 여자와 가게 된 나는 옷 벗기는 것조차 버둥거렸지만, 지혜는 달랐다. 그녀는 능숙하게 내 자지를 빨고 옷을 벗겼다. 자신이 알아서 옷을 벗은 후에는 가방에서 콘돔을 꺼내어 내게 씌워주었다.
"해....해도 돼요?"
정말 한심하게도.... 그녀의 몸 위에 내 몸을 포개놓고도 난 이런 소릴 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까지 간 상황에서 해도 되는지를 묻다니. 십 년 전의 난 정말이지 숙맥 중의 숙맥이었다. 지혜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아흑...."
그녀의 안은 다소 빡빡했다. 젖어있었다고는 하나 덜 애무가 되었던 듯.... 그러나 이미 삽입의 쾌감에 사로잡힌 나는 그녀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를 부둥켜안고 그저 아랫도리를 쉴 새 없이 찍어 올리기만 했다. 가슴을 빨고, 유두를 깨물고, 그녀의 허리를 가득 끌어안고 자지를 들이밀기에만 급급했다. 테크닉이고 뭐고 애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린 좆질이었다.
"하윽!! 하아악!!!"
어느 샌가 그녀의 다리가 내 허벅지를 감고 단단하게 조여와 엉덩이를 많이 들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와 한 몸이 된 채로 들썩거릴 뿐. 침대가 부서져라 몸을 흔들어댔다.
"하악...하악...."
그렇게,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난 지혜와 첫 경험을 치렀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말도 없이 떠나갔다. 이때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해주지도 않았다. 학교에 돌아가서 진호 선배를 만난 나는 그제야 내가 전혀 엉뚱한 사람을 만나고 왔음을 깨달았다.
다시 제대로 "이명희"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정말 우연하게도 화장실에서 지혜를 만나고 말았다. 지혜는 그 당시 사귀던 유부남 직장상사와 마찰이 있었다. 깨지던 중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끼어든 꼴이 된 나는 엉겁결에 그 남자를 때려눕히고 지혜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 손을 잡고 이끄는 지혜를 따라 복도로 나간다.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 왼쪽으로 가면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오른쪽을 본다. 지혜가 오른쪽에서 서서 나를 잡아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왼쪽을 본다. 왼쪽에는 오늘 명희, 그러니까 진짜 이명희랑 들어갔던 술집이 있었다.
"뭐해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지혜가 날 끌며 재촉했다. 그렇지만 난 망설이고 있었다.
만약.
만약 그때 내가 지혜의 손을 놓고 다시 명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십 년도 더 된 일인데도 그 점이 후회스럽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명희를 선택했을까. 잠깐 만나다 헤어진 명희는 보통 깐깐하고 불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여린 구석도 많아 비위를 살살 잘 맞추면 꽤나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여자다. 아아, 지금에 와서 그런 후회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을 되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난 지혜를 따라갔고 다시 또 모텔로 갔다. 거기서도 다시 몸을 섞었다. 서로 모르던 사이에서 알게 된 지 이틀째에 두 번째 섹스. 그렇게 폭풍 같은 밤이 지나고 나서 아침이 되자 지혜는 처량한 어조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해주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라났다. 집안 사정상 고등학교만 나오고 대학은 포기한 채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한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직원 전부해서 50명도 채 안되지만 나름대로 이름 있는 물류업체의 경리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성실히 일했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막 스물세 살 되던 해, 지방에 있는 지점에 있던 한 임원이 승진하여 서울 본사로 올라오게 되었다. 평범한 중년 남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오십 줄에 접어든 그 임원에게 자꾸 마음이 기울었다. 처음에는 자기보고 추근덕거리는 그가 밉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정이 갔다. 은근슬쩍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마음을 허락했고 몸을 허락했다.
유부남이었고 불륜이었지만, 그녀는 그 남자에게 진심으로 반해있었다. 지혜는 자신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변명했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일까요. 모르겠어요. 왠지 나이든 남자를 보면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그렇다고 또래의 남자들과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하아... 별로 오래 가진 않았어요."
그렇게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모텔을 나오면서 그녀에게 연락처를 요구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분명 바로 전날 밤까지는 서로 물고 빨고 그 난리를 쳤으면서도,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해서는 비정할 정도로 차가운 그녀였다. 그저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녀는 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요? 그쪽도 이제 날 두 번이나 따먹고 나니까... 앞으로도 행여 공짜로 또 따먹을 일 없을까 기대하는 건가요?"
"에엑! 아뇨, 전 그런 생각이 전혀...."
"잘 들어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왜 한석 씨에게 내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했을 것 같아요?"
"그...글쎄요..."
"그건요. 앞으로 한석 씨를 절대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잘 가요."
그녀는 그렇게 날 두고 떠났다. 그렇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단정했던 그녀. 그녀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정말 웃기게도 그녀는 내 앞집으로 이사 왔다. 덕분에 그녀의 친구인 효진도 알게 되었다. 지혜의 이사를 도와주다가 그녀의 집에서 잠이 들었다. 늦은 밤, 깊은 밤이 되자 그녀는 날 탐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가 뭐였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효진이까지 가세하여 둘이서 내 자지를 빨아댔다. 쾌감의 밤은 마치 꿈처럼 흘러지나갔다.
그랬던 지혜는 또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다. 내게 전해진 청첩장이 그녀의 결혼을 알렸다. 자신의 섹스 파트너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그녀가 이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거기에 또 직접 가보기까지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녀의 결혼 이후 서로 볼 일이 없었다. 나 역시 선영을 만나 결혼을 하고 함께 살았다. 불의의 사고로 선영을 잃고 난 후 부산으로 왔더니 다시 지혜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혹은 딸이라고 불러도 무방한)녀석이 있었다. 십 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만난 우리는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뜨겁게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그리고 그녀를 그토록 파멸시킨 걸까.
왜 그랬던 걸까.
대체 왜.
왜.
왜.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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