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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선영의 목소리.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니 우리 밭이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더라... 그래.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밭 평수인지라 대략 몇 명이나 사람을 쓰면 될지 가늠하느라 아침부터 돌고 있었다.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 덩굴이 쓰러지지 않도록 세워둔 대나무 지지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풍년이다. 풍년이면 몹시 귀찮다. 오이를 담을 비닐 주문량도 새로 계산해야 한다. 농협 계장이 또 한 턱 내라고 귀찮게 굴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앞에는 만삭인 아내, 선영이 새참을 가지고 와서 앉아 있었다. 나는 밭 가장자리에 가져다 놓은 간이 탁자에 앉아있었다. 산에서 주워 온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는 얼기설기 엉성한 솜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쓰기에 나쁘지 않았다. 제 엄마를 따라 밭에 놀러온 아라는 밭 서쪽을 따라 흐르는 도랑에서는 돌을 주우며 놀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높았다. 구름 한 점이 유유자적하며 흐르고 있었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지극히 일상적인 농촌 풍경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그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선영이 거듭 물어왔을 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여전히 꿈이었음을. 그녀가 떠나가고도 못내 잊지 못하는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녀를 불러내고 있음을.
"자기 생각."
"피이. 그냥 멍하니 있었잖아."
"아니야. 진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어."
산처럼 불러온 자기 배를 쓰다듬는 선영을 보면서 눈물을 참는다.
"이번에 오이 잘 되면, 어머니가 별채를 증축하자고 하시던데. 읍내 건축사무소 다니는 김 씨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아기 방으로 쓸 거면 보일러도 새로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고."
"보일러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데 뭐 하러."
"난방할 곳이 늘어나면 성능이 모자랄 수도 있대."
그래. 확실히 이건 아라의 동생이자 내 둘째 딸, 유라를 낳기 직전의 대화였다. 아라를 낳고 나서 애 먹었던 게 시원치 않은 보일러와 방으로 들이치는 우풍이었다.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선영은 찬바람을 제법 쐬었고, 아라 역시 잔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오래된 집을 완전히 새로 짓는 건 어려울 테니 둘째를 데리고 우리가 지낼 별채를 새로 만들자고 어머니가 제안한 적 있었다. 선영이도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보일러도 새로 하고, 벽지도 새로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솔솔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 방에서 유라가 지낸 건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난 말이야... 어쩔 때 가끔은 무서워."
이것은 선영의 말버릇이었다. 둘이서 술을 기울이고 있을 때나, 섹스를 마치고 몸을 기대고 있을 때나, 잠든 아이를 토닥이며 재우고 나면 그녀는 으레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무서운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날 보며 말했다. 그 눈빛 속에는 날 향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난 말이지. 이 세상에서 내가 완전히, 그리고 날 아는 사람이 전부 없어져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어. 내일이라거나 미래라거나... 그렇게 어렵고 먼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그냥 되는대로 살았어.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행복해. 행복하다 못해 무서워. 언젠가 떠나갈 적에 이것들을 놓지 못할까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웃어 넘겼다. 너무 행복해서 좋다는 표현을 격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왜 그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것이 곧 떠나갈 사람의 외침이었음을.
둘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영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녀가 때때로 짓는 슬픈 표정이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했다. 뒤집어져 찌그러진 차체에 깔린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영원히 그녀에게 제대로 다가간 적 없다.
이것이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그녀의 손을 잡고 느낄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어 선영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진짜가 아니야. 자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허상일 뿐."
"선영아..."
"하지만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어."
"거짓말. 불안해했잖아."
"그건 곧 다가올 끝을 두려워한 거지, 현실을 싫어한 게 아니잖아. 떠나기 싫을 만큼, 끝을 생각하기 싫을 만큼 즐거운 나날이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영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졌다.
"고마웠어. 아라를 잘 부탁해. 행복해야 해."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밭이 포함된 풍경도 그렇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내 머릿속을 채우던 붉은 세계도 조금씩 사라졌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잔해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 역시 몸이 붕 뜨나 싶었는데, 어느새 내 몸은 원래의 질량을 되찾아 아래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허리 쪽에서 밀려왔다. 하얀 빛이 시야에서 들락날락한다.
누군가의 외침, 누군가의 울음소리, 그런 것들이 한데 섞여 귓가에 윙윙거린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날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최한석, 한석 씨, 최 대리, 자기, 여보, 아빠, 아라 아빠, 한석아... 그리고,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
고작 여섯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나를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는 저 녀석... 저 녀석을 언제 한 번 혼내줘야 하는데, 기회가 나질 않는다. 선영이가 그토록 아끼던 그 녀석이 계속해서 날 부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녀석은 10대였고, 나는 20대였으니 아저씨라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그런 삭막한 호칭은 이제 좀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녀석은 선영을 언니라고 불렀으니까, 나한테는 형부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아저씨... 아저씨...제발 일어나요... 아저씨..."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전히 싸가지 없는 녀석이라 퍽 반가웠다. 그것이 녀석의 아이덴티티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겠지...
"그만...불러... 귀 따갑다.."
"아저씨가 일어나야 그만 부르죠."
"한 번만 부르면 다 알아들어...."
"못 알아들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그렇죠.'
유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밀어 올리자 거기에 울먹이고 있는 유진이가 있었다. 난 녀석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박사님이 볼 땐... 쿨럭...다 멍청해 보이겠지..."
"아저씨!"
유진이가 와락 달려들어 내 목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게다가 등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도 힘들다. 아무래도 이 녀석, 내가 깨어난 게 반가운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쓰러트리려고 하는 거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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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이번에도 한석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