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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간신히 유진이를 밀어놓고 나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1인용 병실이었다. 난 병원 침대에 뉘여 있었고 왼쪽 팔에는 바늘이 꽂혀 링거에 연결되어 있었다. 허리 뒤쪽이 찢어질 듯 아픈 것 말고는 다른 부분은 죄다 멀쩡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자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리사에 효진이까지..."
리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효진이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리사가 말했다.
"지금 이틀 만에 깨어나신 거예요. 그날, 아라가 휴대폰으로 신고를 했어요. 지혜 씨는 체포되었고 오빠는 병원으로 후송되어서 치료 받으신 거고요. 다행히도... 장기를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한두 달이면 충분히 회복될 거예요."
"거 참 다행이구나. 고마워, 리사. 그리고 유진과 효진. 전부."
효진은 날 보며 말했다.
"고맙기는... 그래. 짜샤. 이게 다 무슨 난리냐."
"내가 피운 난리는 아니잖아."
그러자 효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래. 알다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다. 너한테만은 미리 다 말해야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설마... 지혜에 관한 이야기냐?"
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유진에게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리사와 유진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들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효진은 내 옆으로 와서 간병인용 보조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하아...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되나..."
"지혜에 관해서잖아. 일단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는지부터 이야기해 줘."
"지혜는...."
한참을 망설이던 효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내 무언가 작심한 표정이 되더니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늘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표정에 난생처음으로 비장감이 감도는 것 같다.
"지혜는 일단 유치장에 있어. 죄질이 나빠 구속 수감되어 있거든... 빼내려고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다만 초범도 아니어서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아. 형사재판이 시작되면... 우린 어떻게든 지혜의 정신병력 쪽으로 몰고 갈 생각이야. 최소한 교도소 대신 병원에 보내도록."
눈앞이 캄캄했다. 비록 내 등을 찌른 여자이기는 하지만 희한하게도 난 지혜에 대한 미움보다도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녀는 내 첫여자이기도 하거니와 최근까지만 해도 뜨거운 밤의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교도소 아니면 병원에 가야 한다니...
"병원이라니... 지금 니가 말한 병원은 정신병원이겠지?"
"그래."
"병명은 뭔데?"
"우리는 의존증의 하나로 보고 있어. 알코올에 심하게 의존하는 걸 흔히 알코올중독이라고 하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는 뭐랄까. 관계에 있어서 의존성이 심한 거야. 전문용어로는 동반의존이라고 해... 지혜는 이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 의존증이라고 볼 수도 있고."
"동반의존? 성 의존증?"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지만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혜는 날 처음 보자마자 모텔로 데리고 가서 관계를 가졌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날 사랑해서도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 우울했기 때문이다. 그 우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옆에 있는 날, 남자로서의 물건이 달려있는 놈을 선택했을 뿐이다. 두 번째 보는 날도 마찬가지였고, 앞집에 이사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고,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을 섹스로 푸려고 했다.
한때는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제는 궁금하다. 그녀가 정말 날 사랑하긴 한 걸까. 이런 의심조차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럼 대체 ... 결혼 상대와는 왜 헤어진 거야? 그렇게 관계에 의존적인 지혜가 스스로 이혼을 선택했을 리는 없잖아.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왜 택한 거냐고."
"그건..."
효진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그녀의 망설임이 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만든다. 지혜의 칼부림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그녀의 전 남편이.... 그녀의 칼을 맞고 다쳤었다. 그때도,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걸까. 효진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이내 대답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무덤에 가지고 갈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어. 선미도 대충은 짐작해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그러니 너도..."
"알겠어."
효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혜의 남편... 그 개자식은... 지혜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 내가 지혜의 친구인 걸 알고,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는 지혜와 결혼한 거였어. 나와 다리를 놓아달라고 지혜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게 여의치 않자, 지혜를...... 지혜를....."
효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태 그녀를 알아오면서 이토록 흥분한 것을 보지 못했다. 어찌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무는 지 피가 날 지경이다.
"지혜를 어떻게 했는데? 때린 거야?"
"그게... 그런 간단한 게 아냐... 녀석은 지혜를... 지혜를....다른 남자에게 넘겼어. 다른 남자로 하여금... 지혜를 유린하게 했다고."
"뭐어!!"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병실의 온도가 삽시간에 수십 도가 내려간 것 같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세상이 핑핑 도는 가운데 효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놈이 지혜의 그런 의존성을 알고 그랬는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지혜는 그런 와중에서도 남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어... 심지어 지혜의 몸을 탐하는 놈이 지혜의 전 불륜 상대였어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동시에 그런 짓을 당했어도... 지혜는... 지혜는.... 남편에게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어...."
"세상에.. 세상에 그런 새끼가..."
난 그저 지혜가 남편과의 어떤 불화가 있었던 걸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남편이 자기 마누라를 딴 남자에게 허락한단 말인가. 그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아이가 생기고... 잠시 그런 짓이 줄어들었어.... 그렇지만 남편의 분노가 지혜에서 수영이에게 옮겨간 것뿐이지, 그가 착해진 게 아냐. 수영이를 거듭해서 폭행하는 그를 보면서... 지혜가 저지른 짓은... 그래,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지혜가..지혜가 이야기해줬어.. 결국 참지 못하고 찔렀다고..."
"그래,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냐. 그렇게 이혼하고 떨어져 살기 시작하자, 이젠 지혜가 수영이를 학대하기 시작했어. 수영이 때문에... 수영이 때문에 자신이 남편과 이혼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수영이를 매일같이 때리고... 학대하고... 또 아픈 수영이를 두고 남자를 만나러 밤이면 밖에 나가고... 그게 지혜의 이혼 후 생활이었어."
내 몸을 탐하던 지혜의 뜨거움이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음탕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지혜. 그런 뜨거운 몸을 가진 그녀가 내가 오기 전까지 남자를 굶고 있었을 리는 없다. 거기에 수영이에 대한 학대까지 듣고 나니 지혜에 대한 분노보다는 원망과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걸 막으려고 선미를 파견하고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게 한 거야. 리사와 연구소를 세워서 지혜에 대한 치료를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어. 지혜의 남편, 그 개새끼는... 지혜에게 어떤 약도 먹이고 있었어.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지혜의 그런 성향을 더 증폭시키고 안 좋게 만드는 약이야. 하지만 섹스의 쾌감은... 쾌감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닐 정도로 증폭시키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소문을 들은 적 있다. 부산 바닥을 휩쓴 적 있다는 모종의 약물이 있었고, 부산 바닥을 주름잡고 있던 어둠의 조직이 약물 제조자를 추적하고 있다는...
"선미가 지혜에 대한 모든 것, 행동상황 등을 조사하여 윤가희 박사에게 보고하면 그에 적합한 약물을 처방해서 음식물에 섞여 먹이곤 했지. 지혜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도 했었지만, 본인이 너무도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런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서 연구소가 만들어졌구나..."
"그래. 그리고 지혜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못하도록... 그걸 경호하는 역할도 리사의 회사가 해주었고."
연구소, 윤가희 대표, 리사. 그리고 효진이까지. 이들이 그동안 은밀히 해왔을 노고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안하다. 그렇게... 그런 식의 치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끼어 들어서 일을 더 그르치게 된 것 같아."
효진은 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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