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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19화 (31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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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아냐. 나도 그게 효과 있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지혜의 상태는 호전된 게 아니라 그저 억눌려 있었을 뿐이야. 본인 스스로 상태를 인지하고 마주했었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럴 기회를 뺏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리사가 널 부산으로 불러들이고 지혜와 만나게 했다는 소식에 나도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혜를 보다 전문적으로, 직접적으로 치료할 방법을 찾을 거야. 억눌려 있던 지혜의 곯은 상처를 네가 터트려 준 셈이라... 되레 감사하고 있어. 내가 미안해. 한석아. 이런 것들을... 이런 것들을 네게 알려주었어야 하는데."

효진은 몇 번이고 내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효진은 눈물 흘리며 사과하기를 멈추질 않았다. 친구를 사랑한 죄로 효진은 너무도 많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선미 씨는? 괜찮아?"

내 질문에 효진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너보다야 훨씬 괜찮아. 머리에 몇 바늘 꿰매기는 했지만, 어차피 머리 안쪽이라 크게 흉나지는 않을 거야."

"나보다도... 선미가 수고 많았지."

"지금은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되었어. 지금 불러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효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병실을 나가기 전, 궁금한 것 하나를 물어보았다.

"전에 말이야... 지혜에 대해 리사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미가 끼어들어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어. 그게 대체 뭐에 관한 이야기지?"

"그거?"

효진은 눈가를 비비며 울었던 자국을 닦아냈다. 그녀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며 코를 훌쩍이곤 고개를 바로 했다. 날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지혜는 항상 불안해했어. 전 남편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또는 자신이 전 남편을 보고도 어쩔 줄을 몰라 할까 봐. 그렇지만 난 그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거든. 그놈뿐만 아니라 지혜를 능욕한 자들 전부를...."

"....용서할 수 없다면...?"

"다행히도, 리사가 하는 일이 그런 쪽이더군. 협력의 조건으로... 그들에 대한 처리를 의뢰했었어."

리사가 하는 일. 처리, 의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소리다. 효진은 몸을 돌려 문을 나가며 말했다.

"지혜를 더럽힌 자들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못해. 다시는 지혜를 보지도 못해. 그뿐이야."

효진이 나갔다.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어 보느라 멍하니 있었다. 그녀의 말뜻은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동시에 다시 한 번 리사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깨닫는다.

병실에 혼자 남아 효진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지혜의 뿌리 깊은 어둠을 알아차릴 기회가 내게 있었을 지도 모른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녀의 아픔을 치유하고, 슬픔이 깊어지지 않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쾌락에 굴복하고 그녀를 탐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다. 평생 가도 나의 어리석음은 치유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선미가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그녀의 독특한 움직임 덕분에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아, 선미 씨.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어요."

"표정이 무거워보였습니다."

"그냥,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들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미는 침대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언제나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그녀가 이렇게 불쑥 들이대니까 약간 놀랍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한석 님이 하신 일은 결코 멍청한 게 아니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셨고, 또... 저를 구해주셨으니까요."

어라? 어. 어?

눈을 껌뻑인다. 내게 입을 맞추고 나서 물러나 얼굴을 붉히고 있는 선미를 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미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저, 저기..."

"감사의 표시입니다. 몸이 좀 나아지시면 다시 감사드리고 싶네요."

"에? 에?"

아니, 감사하면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끝이지 감사를 다시 드리는 건 뭐지. 게다가 몸이 나아져야 감사를 받을 수 있다니... 도대체 무슨 감사를 주시려고...

평상시에는 거의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자못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왜 입을 맞추었느냐 묻고 싶었는데, 문이 열리고 아라가 뛰어 들어왔다.

"아빠아!"

두두두 달려와 폴짝 내게 안기는 아라를 받아내느라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기는 했지만, 참을 만 했다. 그런 아라 뒤로 수영이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수영이는 들어오자마자 선미의 다리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 얼굴만 내밀고 날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어? 어... 그래. 괜찮아."

녀석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아냐. 니가 왜 죄송하니. 괜찮아."

"그야..."

녀석은 뒷말을 삼켰지만,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녀석의 엄마인 지혜가 날 찔렀으니, 아마도 그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딸과 똑같은 나이의 저 꼬맹이에게 그런 슬픈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은 나보다 더 오래 고통받아온 피해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선미는 내게 다가와 몸을 뒤집게 했다. 불편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선미는 상처 부위를 보겠다면서 내 상의를 거침없이 걷어 올리고, 아랫도리가 꽤 내렸다. 엉덩이에 공기가 닿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좀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미는 거즈가 붙은 주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상처가... 깊으시군요. 나으려면 오래 걸리시겠어요."

"그렇겠죠."

그때 나가 있던 유진이와 리사가 방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선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누구죠?"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선미가 먼저 대답했다.

"오늘부터 한석 님의 전속 간병인인 박선미라고 합니다."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선미.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유진. 피식 웃기 시작하는 리사.

"뭐야! 이 아저씨가 뭐라고 전속 간병인까지 필요해요? 한석 님? 한석 니이이임? 다 나가. 필요 없어. 내가 보살피면 돼!"

유진이 이렇게 외치며 펄펄 뛰자 리사가 유진에게 말했다.

"어머, 진 소장님. 연구소 일은 내팽겨두고 여기서 시간 보내실 건가요? 출퇴근을 안 하는 저라면 모를까, 소장님은 연구소로 가보셔야죠."

은근하면서도 압박감이 장난 아닌 리사의 말투에 유진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지만, 쉽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동안 선미는 아이들을 벽에 있는 소파에 앉히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어 하나씩 들려준다. 그런 다음 내 상처에 붙은 거즈를 교체하고 링거의 수액을 조절하는 등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유진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당신! 지금 이런 거 막 만져도 되는 사람이야?"

그러자 선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저희 아카데미에서는 모든 방면의 서비스를 빈틈없이 제공하고자 간호조무사 자격증은 반드시 취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 정도의 의료행위는 충분히 가능하죠."

"모든 방면의 서비스?"

유진이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 선미는 다른 이에게서 몸을 돌려 날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가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했다.

"네. 모든 방면의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원하신다면요."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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