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20화 (32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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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 유진이에게.

잘 지내고 있지? 여기는 눈이 잔뜩 오는 계절인데 네가 있는 쪽은 어떨지 모르겠어. 따뜻한 곳이라면서? 일 년 내내 따뜻한 곳에 살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막상 그런 곳에 살면 심심할 것 같아. 눈이 보고 싶어지기도 할 거고. 네가 우리 동네에 오면 뒷산 백당 폭포의 설경을 꼭 보여주고 싶어. 눈이 정말 많이 올 정도로 추운 날이면 폭포가 그대로 얼어붙어서 장관이란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야. 언제고 꼭 내당리로 놀러 와서 직접 보길 바란다.

한석 씨도 나도, 어머님도, 애들도 다 잘 지내고 있어. 우리 집은 방도 많고 마당도 넓은 데 다섯 명이나 지내는데다가 개도 있고 닭도 있어서 늘 시끌시끌하단다. 먼 미국 땅에서 언니도 없이 너 혼자 지낼 거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파. 공부도 좋지만 기회가 되면 네가 한국으로 돌아와 좋은 사람 만나고 살면 좋겠어. 이런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지? 후후. 근데 너도 아줌마 되어 보렴. 처녀들만 보면 결혼을 권하고 싶어진다니까.

지난번이 유라의 백일이었어. 동봉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언니와는 다르게 무척 얌전하고 조용한 아기야. 아라는 백일 때만 해도 하도 발버둥 쳐서 온전한 사진 하나 찍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얘는 달라. 여간 얌전한 게 아냐. 어머님에게 여쭤보니 한석 씨가 어렸을 때 그렇게 얌전했다고 하더라고. 아빠를 닮은 모양이야. 생긴 건 날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신기하지? 아이는 두 사람이 만들어 간다는 게 실감이 나더라.

이렇게 부쩍 정신없이 지내고 살다보면 언니가 했던 말이 실감이 안 나. 언제고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게 두렵기도 해. 그렇지만 그런 만큼 매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너처럼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부만은 게을리 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해. 그래서 언제고 그때가 와도 난 웃으면서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내가 떠나고도 남아 살아갈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억을 좋게 간직할 수 있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할 거야. 그러니 설령 나의 빈자리를 네가 차지해서 우리 아이들을 키워준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을게. 되레 감사할지도 모르겠어.

2005년 겨울밤 내당리에서.

선영 씀. ]

하얀 편선지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선영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녀는 나의 연인이기 전에 나의 학생이기도 했다. 그녀의 글씨체는 뇌리에 박혀있다. 지금 손에 들린 편지는 내게 보내진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눈시울도 뜨겁게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기에 황급히 눈가를 훔치고 울지 않고 있던 척했다.

"아빠아! 이거 봐! 이거!"

흙투성이, 풀투성이의 아라가 무성한 덤불을 헤치고 이쪽을 향해 폴짝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녀석이 내민 걸 받아들자 손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손가락 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청개구리였다.

"꼭 너 같은 걸 가져왔구나. 청개구리 아가씨."

"우이씨. 난 청개구리 아냐! 공주님이지!"

"공주가 다 얼어 죽었구나. 너같이 천방지축인 녀석이 어딜 봐서 공주님이니? 수영이라면 모를까."

양반은 못 되는지, 옆에 있는 숲길에서 수영이가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너풀너풀한 여자 옷을 걸치고 있지만, 조금 전 내게 뛰어든 아라만큼이나 옷 꼴이 말이 아니다. 난 수영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라 따라 다니느라 힘들지?"

수영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힘... 별로 안 들어요. 괜찮아요."

"무리하지는 마라. 선미 씨 또 걱정할라."

"네에..."

오랜 훈련과 여러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예전처럼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지는 않게 된 수영이었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여자 옷은 아직까지 입고 있다. 듣기로는 선미를 비롯한 그녀의 동료들이 수영이를 옷걸이 삼아 각종 예쁜 옷은 다 입혀보는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어울린다 싶으면 수영이의 후견인인 효진이가 돈 아까운줄 모르고 턱턱 결제하기 때문에 수영이가 있는 집의 방 하나가 이미 드레스 룸이라고 했다.

"이제 내려가자. 슬슬 밥 먹을 시간 되었잖아."

"네에."

"네!!"

여자아이치고 지나치게 씩씩한 아라와 남자아이치곤 지나치게 소심한 수영이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있는 선영의 묘를 한 번 더 쳐다본다. 지난 윤달에 좋은 날을 택해, 그녀는 물론 그녀의 부모님까지 다함께 이곳으로 이장을 했다. 내당리 우리 집에서 걸어서 이십분 거리인 이 뒷산 일대는 우리 최 씨 가문에 내려오는 몇 안 되는 땅 중에 하나다. 전부 경사도가 심한 임야라서 딱히 밭도 못 일구고, 그렇다고 임업용산지로도 못 쓸 곳이다. 유일한 쓰임이 있다면 선산 비슷하게 꾸며 이곳저곳 해 드는 곳에 고인이 된 웃어른들을 모시는 정도다. 선영이와 내 장인 장모를 모시는 것에 대해 문중에서는 그다지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엄마가 앞장서서 판을 엎어버릴 정도로 설쳐준 덕분에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라야. 내려가기 전에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응."

산속에서 나타난 털북숭이 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까불어 대던 아라도 선영의 묘 앞에서는 점잔을 뺀다. 녀석은 옷에 묻은 검불을 몇 번 털어내곤 선영의 묘 앞에 가서 깍듯이 인사했다.

"엄마. 이제 가볼게. 그리고 또 올게."

몇 번을 보는 건데도 그런 아라의 뒷모습은 내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두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산을 내려왔다. 여름이긴 하지만 산속인지라 해가 빨리 저물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두 녀석을 욕실로 밀어놓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매 주말이면 벌어지는 옥신각신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내가 할 테니 나가서 상을 차리라고요!"

"제가 두 가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유진 님이야말로 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구하느라 많이 피곤하실 텐데요."

"연구는 무슨... 그냥 대충 놀고 있으니까 당신이 염려 안 해도 돼요."

"방금 그 말씀은 연구소장님의 공식적인 발언으로 보고, 박 이사님께 보고해도 되는 거겠지요?"

"이씽... 할 테면 해봐요. 그까짓 연구소 때려치우면 그만이지. 나를 모셔가지 못해서 안달이 난 곳이 쌔고 쌨어? 고작 그 연구소 하나쯤이야!"

이쯤에서 끼어들어야겠다고 판단한 나는 헛기침을 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두 여자의 눈이 날 향하자 그제야 오늘 식사는 나가서 할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까 엄마가 마을회관에서 잔치 있다고 했거든요. 거기 가서 먹을 거니 따로 준비 안 하셔도 됩니다. 애들 다 씻고 나오면 옷 갈아입혀서 가도록 하죠."

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란히 부엌을 나왔다. 그런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각자 자기가 옷을 입히겠노라고 싸우기 시작했다. 휴우. 이건 내가 끼어들어도 어떻게 말릴 재간이 없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하고 먼저 마당에 있는 평상에 나가 앉아있었다.

주말이면 우리 집에는 두 방향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서울에서 오는 수영이가 있고 부산에서 오는 유진이가 있다. 수영이에게는 으레 선미가 따라붙기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와 유진이는 영 사이가 좋지 않다. 작년, 그 일이 있고나서 부산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 누가 야간 간호를 하느냐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더니, 내가 부산의 일을 정리하고 내당리에 도로 들어오고 나서도 주말마다 그 싸움이 반복되고 있다. 말린다고 들을 인물들도 아닌지라 그냥 두고 보는 걸로 중재 아닌 중재를 하고 있다.

유진이 성격이야 원래부터 그랬던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혼자서 외국 생활을 오래하더니 기만 더 세져서 온 것 같다. 선미 역시 말투가 조용조용해서 그렇지 결코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걸 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만 해도 수영이와 아라의 머리를 어떻게 묶느냐를 두고 한바탕 싸운 모양인데, 결국은 미용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는 선미의 완승으로 끝났다. 유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허공을 향해 사자후를 외치고 있었다.

"박사 학위 따위 다 필요 없어!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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