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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그 필요 없는 걸 뭐 하러 세 개나 따셨나 모르겠지만.... 암튼 우린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은 집 앞의 밭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걸어가는 게 빠르다. 경운기가 겨우 지나다닐 좁은 길이라 아이들과 선미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나와 유진이 뒤에서 천천히 따라 걸어갔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유진은 길 중간쯤 이르러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편지... 다 봤죠?"
"응."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후로는 편지가 없었죠. 소식이 궁금했지만... 저도 그때 논문 막바지라서 미처 신경을 못 썼구요."
"응."
"언니는... 잘 있어요?"
"응. 그렇지, 뭐."
유진이가 매주 온 이유는 선영의 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 번에 전부 주면 될 것을, 이 녀석은 짐 정리가 덜 끝났다, 아직 못 찾았다, 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매 주마다 한 통씩, 많아야 두 통씩 편지를 넘겨주었다. 아마도 그 핑계로 매주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암튼 그런 식으로 우리 집에 일 년 넘게 드나들었다.
유진이는 유학 가서 지내는 동안 공부만 잔뜩 했을 뿐이지 딱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거의 맺지 않았다고 했다. 유미 씨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짓는다. 왠지 알 것 같아서 더 물어보진 않았다. 외로운 유학 생활의 유일한 위안거리이자 인간관계라고 할 만한 것은 선영의 편지뿐이었다고 했다. 그 편지로 나와 선영의 생활은 물론, 아이들의 근황까지도 모두 전해 듣고 있던 유진은 멀리서도 우리 가족의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부산에 도착해서 아라를 한 눈에 알아본 것도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만 몰랐을 뿐, 나의 또 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진과 나란히 걷고 있는 이 길, 농로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선미는 이미 맞은편 길에 도달한 후다. 이제 수십 미터만 더 걸어가면 모두와 합류하여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에 앞서 미루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야 할 듯싶었다.
"유진아."
"네?"
갑자기 불러서 그런지, 유진이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녀석의 옆에 나란히 서서 앞을 본 채로 물어보았다.
"너, 나 아직도 좋아하냐?"
"......뭐...뭐라고요?"
녀석의 말투에서 당혹감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예전에는 녀석의 말과 행동에 하나하나 휘둘렸지만, 홀아비는 좀 더 뻔뻔해도 되는 것이다.
"날 아직도 좋아하냐고 물었어."
"이...이 아저씨가 노망이 났나, 미쳤어요? 내가 애 딸린 홀아비를 왜 좋아해야 하죠?"
일부러 유진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보이기에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냐? 그럼 내가 괜한 소리 했네."
무심하게 말을 남기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니까 뒤쪽에서 내 옷자락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싫다고는...."
"뭐? 안 들려."
"...싫다고는... 안 했다고요..."
다시 걸음을 멈춘다. 저 앞에서는 아라가 빨리 오라고 펄쩍펄쩍 뛰면서 성화다. 난 여전히 앞을 보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래. 난 네 말대로 애 딸린 홀아비에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는 농꾼이야. 게다가 상처한 아내도 아직 잊지 못하고 있고, 한때 내가 좋아했었던 어떤 불행한 여인의 아이에 대해서도 연민을 가지고 있어. 효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보살펴 주겠냐만은... 지혜의 치료가 그렇게 계속 늦어지고, 또 수영이만 좋다고 한다면 이리로 데려와 키울 생각까지도 있어. 그래도 좋아? 아니다. 싫지 않은 거야?"
"....네..."
"그에 비해서 넌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고, 공부도 많이 해서 아는 것도 많잖아. 내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어. 그래도 날 싫어하지 않을 거야?"
"....싫어하고 말고는 내 마음이라고요. 왜 자꾸 아저씨가 뭐라 그래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몸을 돌려 유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녀석의 얼굴을 애써 확인하려고 하지 않고 머리를 마구 흩뜨려주었다.
"가자.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 하지는 않겠어. 아직 나에게도, 너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몰라."
유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의 녀석과는 달리 조용히 날 따라왔을 뿐이다. 맞은편 길에 도달하자 선미가 조금 묘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일 년 전, 그녀는 내게 "감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려 여태껏 한 번도 그녀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없다. 은근한 요구나 눈짓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 하지만, 그때마다 모른 척 해왔다. 선미의 시선에 괜히 찔려 헛기침을 조금 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얼른 가죠."
그러자 선미는 애들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까르르 웃으면서 먼저 뛰어가 버렸다. 조금 전 까지는 유진이가 내 오른편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이제는 선미가 왼편에 서더니 같이 걷는다.
"저라고 항상 애들만 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네?"
"어른도 보살필 수 있습니다. 그쪽 방면으로는 스페셜리스트랄까요."
한 몇 초가량, 그러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얌전해져 있던 유진이의 눈빛이 다시 활활 불타기 시작한다. 갑자기 녀석이 팔을 뻗더니 내 오른팔을 와락 끌어안고 매달리시피하여 걸어간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하자 이제 왼쪽 팔은 선미가 붙들고 걷기 시작했다.
"저기...."
"조용해요!"
"그냥 가요!"
두 여자의 기합에 눌린 난,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걷기로 했다. 여기서 입을 열었다가는 아주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말이다. 저 멀리, 회관 앞에 먼저 도착한 두 아이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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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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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 한선영 Rout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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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 루트인 듯 선영 루트 아닌 선영 루트 같은 Route 5 끝났습니다. 지난번 연재에서도 이게 어딜 봐서 "선영" 루트냐는 항의를 받은 바 있습니다만 한석의 마음속에서 선영은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파워 오브 러브.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선영 루트가 맞습니다. 비록 분위기상 한석이가 이제 앞으로 유진이나 선미와 떡을 치게 될 지언정 암튼 그의 마음속에는 선영이가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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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분이 계신데... 그녀는 정상적인 사회 복귀가 어렵습니다. 아주 먼 미래에 퇴원하리라 예상합니다. 그녀의 아이인 수영이는 효진이와 그녀의 "메이드들"이 키우고 있으며, 훗날 태근이의 양자로 입양되어 성을 박 씨로 바꿉니다. "양수영"으로 태어난 이 아이는 부모의 이혼 후 엄마 성을 따라 "김수영"이 되었다가 나중에 "박수영"이 되는 거죠. 기구한 녀석입니다. 덧붙여, 이 스토리 라인에서 발생한 아이들, 아라와 수영이는 이 설정을 그대로 계승하여 제가 연재하는 또 다른 단편에서 둘이서 이것저것 즐거운 일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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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루트 아홉 개 중에서 현재까지 Route 5, 7, 8, 9 클리어 했습니다. 남은 다섯 개 루트는 비교적 짧은 내용이 많기에 전체적으로 연재 중간 정도 도달했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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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가보지 않은 길들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일주일동안 기다리겠습니다. 선택을 기다리는 동안 스토리에 넣기 애매했던 장면 몇 개를 묘사한 외전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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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5회 - 학교에서 리사를 처음 만나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분기점은
- 명희를 찾지 않는다 (선택완료)
- 명희를 찾는다 → Rout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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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34회 - 마리, 리사와 식사하고 난 후입니다. 분기점은
- 지혜에게 연락한다 (선택완료)
- 명희에게 연락한다 → Rout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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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41회 - 유진이와 통화를 끊은 후 입니다. 분기점은
- 유진에게 바로 간다 (선택완료)
- 유진에게 나중에 간다 → Rout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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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50회 - 지혜의 결혼식입니다. 분기점은
- 지금 바로 올라간다 (선택완료)
- 나중에 올라간다 → Rout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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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58회 - 선영의 전화를 받은 후입니다. 분기점은
- 선영의 부탁을 거절한다 (선택완료)
- 들어준다 (선택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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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68회 - 학교에서 교생 일을 하고 있는 한석입니다. 분기점은
- 선영의 집을 일요일에 찾아간다 (선택완료)
- 지금 바로 간다 (선택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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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88회 - 종로에서 전화기를 들고 있는 한석입니다. 분기점은
- ROSE에 전화한다(선택완료)
- 효진에게 전화한다 → Rout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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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3회 - 감옥에 갇힌 한석, 잡혀가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분기점은
- 송화가 잡혀간다 (선택완료)
- 소란이 잡혀간다 (선택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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