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22화 (3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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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Story

한석이가 선영과 계약서를 작성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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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01>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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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아, 그냥 놀러왔어. 엄마 바빠?"

"바쁘긴. 그냥 있지 뭐. 영업 시작 전인데 밥이라도 시켜줄까?"

"응. 돈까스 시켜줘."

"그래. 잠깐만."

유미가 전화를 걸어 돈까스 하나와 백반 하나를 시키는 동안 유진은 사무실을 잠시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있는 일정표를 들여다보던 유진은 유미를 불렀다.

"이거 언니가 쓰는 거지?"

"선영이 말야?"

"응."

"그렇지, 뭐. 왜? 뭐가 틀렸어?"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리지 않고........ 똑같네."

"뭐가?"

"그런 게 있어."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유진은 예전에 카페에서 보았던 시험지를 떠올렸다. 한석이 새로 과외를 시작했다는 중학생의 글씨는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였다. 중학생의 글씨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낯익은 글씨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이렇게 같은 글씨체가 벽에 적혀 있다. 유진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등 뒤에서 유미가 좀 있으면 밥 온다고 이야기했지만,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유진은 생각했다. "설마"라는 생각과 "어째서?".

"어라, 유진이 아냐?"

가게 밖에서 선영과 마주쳤다. 유진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말했다.

"응. 엄마 좀 보고 가려고."

"지금 가는 거야? 밥이라도 먹고 가지."

"생각 없어."

"잘 좀 챙겨 먹어. 너 식사를 제때 챙겨줘야 되는데 언니나 나나.... 휴우."

유진은 한숨을 내쉬는 선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확히는 선영의 흉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같이 속옷을 사러 갔을 때 선영의 사이즈는 D컵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유독 특정부위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선영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봐?"

그러자 유진은 선영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밥 잘 먹으면, 나도 언니처럼 가슴 커지나?"

"글쎄에. 우유가 좋다고는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

선영은 깔깔 웃으면서 유진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언니도 수고해."

유진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슈퍼에 들렀다. 500mL 우유를 집었다가 내려놓는다. 대신 1000mL짜리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이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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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01>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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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 군대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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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02> -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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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한 귀퉁이가 들리더니 한 아가씨가 들어선다. 오고 가는 걸쭉한 욕설과 함께 조개가 익어가는 이런 포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처자였다. 산뜻한 베이지 색의 블라우스에 단정한 남색 치마. 뽀얗고 산뜻해 보이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기에 무심결에 그녀를 돌아본 남자들은 한 번씩 더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고 가게를 스윽 둘러보았다. 자신이 찾던 대상을 구석에서 발견하자 곧바로 다가간다.

"마리야."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피부 빛이 좀 더 그을리고 머리카락이 짧다는 점만 제하고.

"언니 왔나. 거 앉아라."

마리의 언니, 리사는 동생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비스로 나오는 우동만 놓여있었고 다른 안주는 없었다. 소주병만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이미 둘 다 빈병이었다. 리사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포차 주인장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 잔 하나 주시구요, 시원 하나 더 주세요."

"안주는 안 시키는교?"

"모둠 하나 주세요."

여태 마리가 안주 하나 안 시키고 술만 축내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주인장은 그제야 싹싹한 표정을 지으며 조개구이 철판을 세팅해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개들이 익어감에 따라 점점 입을 벌린다. 리사는 집게를 들고 국물이 안 빠지도록 주의하며 뒤적거렸다. 이윽고 익은 녀석 하나를 들어 마리 앞에 놓인 접시에 놔주었다.

"먹어."

"됐다, 마."

"안주 먹어가며 먹어야지. 속 버린다."

"배리면 말제, 뭘 또."

"말 안 들을래?"

"와? 말 안 들으면 쥐패게?"

"이게 진짜?"

"진짜 뭐? 지 해먹을 거 다 해먹은 언니야가 뭔 벼슬하겠다고 또 동생을 잡는데?"

리사는 가볍게 혀를 찼다. 예전부터 마리가 성격이 괄괄하긴 해도 원래 언니의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었다. 엉뚱하고 갑작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기색도 꽤 있어서 가끔씩 화를 내며 타일러보지만, 그때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대들기까지 하는 녀석은 결코 아니었다. 이게 다 작년 일 때문이다. 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알았어.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미안하다면 다가? 닌 사람 찔러죽여놓고도 미안하다고 할끼가?"

"내가 누구 칼침 놓은 건 아니잖아. 없는 일 지어내지 마."

"언니가 한 짓이 내 등 찌른 게 아니고 몬데? 니 참말 내 맘 몰랐나? 말해봐라."

"......알았다, 알았어.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리사 앞에 놓인 소주 잔은 비어있었다. 마리가 따라주지도 않았기에 리사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그리고 홀짝 마셔버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쓰디썼다. 리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잔을 채우고 마리의 잔도 채워준다. 마리는 입을 벌리다 못해 쩍쩍 벌어지고 있는 조개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마리가 말문을 열었다.

"벌써 일 년이제?"

"그래."

"그럼 잊아부릴때도 됐다. 내도 더는 추태 안 부릴게."

마리가 잔을 들자 리사도 같이 들었다. 둘의 잔이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소주를 반쯤 마시고 내려놓은 마리는 젓가락을 들고 조개를 뒤적거렸다.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개 한 녀석의 살점을 떼어 입에 가져가면서 무심하게 묻는다.

"근데 요샌 뭐한데?"

".......잊는다며?"

"그러는 언니야도 뭐 하는지 마, 다 알고 있을끼 아닌가."

마리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기에 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말해봐라. 내 또 쫓아간다 어쩐다 안칼테니."

리사는 몇 달 전에 술 잔뜩 마신 마리가 자전거 끌고 서울 가겠다고 부렸던 난동을 떠올렸다. 고개를 저어 나쁜 기억을 털어내고는 대답했다.

"3월에 군대 갔어. 지금은 파주에 자대 배치 받았고."

"파주? 거가 어딘데?"

"경기도 북부."

"하이고, 마. 윽수로 머네. 차로 가도 하세월이겠구만."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생소한 지명이었던 터라 보고를 받은 직후 지도를 꺼내어 확인해보았었다. 자신들이 있는 부산과 정반대의 곳이었다. 여기는 최남단 동쪽끝. 거기는 최북단 서쪽끝. 대한민국에서 두 장소를 꼽았을 때 가장 먼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곳을 일부러 골라서 뽑은 듯한 느낌이다. 같이 지도를 보고 있던 예린이 평소의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섯 시간 이상은 걸리겠군요." 아직 자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금 창피했다. 서울에 두고 온 이를 잊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방황하는 마리를 애써 소리 내 탓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한편도 꽤 오래도록 시렸다.

조개구이를 다 먹지도 않았지만, 술이 좀 들었기에 두 사람은 포차를 나왔다. 두 사람 일어난 테이블에는 시원 소주 네 병이 깨끗이 비어진 채로 놓여있었다. 포장마차 건너편에 세워둔 차 옆에 서 있던 예린이 다가왔지만, 리사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좀 걸을게요."

그녀는 동생을 부축한 채로 해안 도로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마리는 뭔가 궁시렁거리고 있었지만, 술 때문에 혀도 꼬여있고 발음도 불분명해서 뭐라 그러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끔씩 나오는 이름에 가슴이 좀 아플 따름이었다. 조금 걷다보니 몽돌로 가득한 해안이 나온다. 발아래 밟히며 자그락 소리는 내는 자갈을 따라 한참 더 걷는다. 밤에 바라본 바다는 새카맣다. 두 사람은 해변에 앉았다. 세 병 가까이 마신 마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은 리사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 오빠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어."

마리는 대답이 없었지만, 리사는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나갔다.

"내가 마리 널 선택했듯이 오빠도 나름의 선택을 하신 거겠지."

파도 소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두 사람을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도로 변에 서 있던 예린이 다가와 재킷을 리사에게 덮어주려 했다. 리사는 그것을 마다했다.

"바람이 찹니다."

"이리 주세요."

리사는 자신의 동생에게 재킷을 덮어준다. 자신을 따뜻하게 덮는 느낌에 마리가 머리를 들더니 고개를 돌려 언니와 시선을 마주한다.

"아직 세상에 남자는 많제? 그치?"

리사가 살포시 웃으면서 동생의 오류를 수정해주었다.

"억수로 많제."

"하모."

두 사람은 씨익 웃었다. 똑같은 얼굴에서 똑같은 웃음이 피어난다. 마리가 손을 뻗어 언니의 손을 찾았다. 리사는 손에 닿은 동생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향해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언니를 돌아본다.

"우리 약속은 아직 유효한기고?"

"그렇지."

"근데 언니야는 이미 한번 깼고?"

"음.... 너도 한 번은 봐줄게."

"참말이제?"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통하는 느낌을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었다. 차에 올라타자 예린이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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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02>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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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이 이야기가 앞선 스토리 중에서 어떤 시점에 나왔을 지 돌이켜 보시는 것도 나름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아직 이전 편에 댓글 안 남기신 분은 남겨주세요. 10표 이상 획득한 루트가 있으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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