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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24화 (32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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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지혜에게 이놈에 대해서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놈이 누구인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지혜가 더 잘 알고 있음을 말이다. 임 전무는 한껏 웃으며 남편의 등을 두드린다. 철판도 꿰뚫을 듯한 강렬한 시선은 지혜에 고정시켜 둔 채.

"어이쿠. 신부가 이렇게나 미인이라니. 동생은 좋겠네, 그려."

넉살 좋은 저 웃음을 보고 있는 게 괴롭다.

"하하. 제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의 속없는 웃음소리가 내 속을 뒤틀리게 한다.

"내가 십 년만 젊어도 이런 여성분의 애인하겠는데 말야. 지금은 좀 무리려나?"

저 말이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소름마저 돋는다.

"지금 임 전무님이 어떠셔서요. 아직 현역 아니십니까?"

"그런가? 어허허허허."

모든 것을 알고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이와 무지한 자의 멍청한 웃음을 가로지르는 지혜의 목소리가 들린다.

"임 전무님이시라구요."

지혜의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지혜는 내 생각보다 강한 여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편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해낸 지혜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그놈과 남편은 그 후에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더 나누고 나서 헤어졌다. 지혜의 남편은 지혜가 간 쪽으로 걸어갔고 그놈은 밖을 향해 걸어간다. 나도 모르게 그놈을 따라간다. 식장을 내려와도 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마리의 아까 그 표정이 떠오른다. 내가 아직까지 지혜를 잊지 못하는 줄 알고 실망했겠지. 그러나 마리에 대한 생각은 금방 지워 버렸다. 저 천하의 쳐 죽일 놈이 우선이다.

"이봐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떤 마음에서인지조차 모르겠다. 차에 올라타려는 놈을 불러 세운다.

"왜 그러슈?"

날 못 알아보는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짧게 스치듯 지나간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도 이상할 노릇이다. 그렇지만 난 네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대가리가 굵어지고 처음으로 때려본 사람이니까 말이다.

지혜와 두 번째로 만나던 밤, 바로 그 밤, 지혜를 끌고 가려던 바로 그놈. 그녀의 불륜상대, 내가 화장실에서 때려 눕혔던 바로 그놈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지혜랑은 이미 끝났잖아!"

내가 소리 지르는 걸 듣고도 상대는 한참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아주 천천히 입매 한쪽 끝이 올라간다. 어리둥절했던 얼굴은 곧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바뀐다. 하다못해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는 한참동안 웃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솔직히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공들여 나를 바라보았다. 발부터 머리끝까지, 다시 머리에서 신발까지 내려 보는 그 시선은 마치 뱀을 닮았다. 사람의 시선이 저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 후덕한 보통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너 이 새끼. 그래 네놈이었군. 그때 지혜 옆에 있던 젊은 새끼가."

녀석은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한참을 또 껄껄 웃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더니 조수석 쪽 창을 내리고 내게 말했다.

"일단 타지. 설마 아주 큰 소리로 여기서 지난 일을 떠벌리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말야. 듣는 귀가 많다고."

그제야 아차 싶었다. 여긴 지혜 결혼식장 바로 코앞이다. 지혜의 친인척, 혹은 아는 사람이 잔뜩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이놈이랑 소리 높여 이야기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내 입으로 지혜의 과거를 폭로하는 셈이 된다. 내가 이놈보다 더 못할 짓을 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놈의 차에 타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올라탔다.

녀석은 차를 출발시켰고 금방 시내를 벗어났다. 차 안에서 우리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정면만 쏘아볼 뿐이었다. 조금 더 달려 어떤 커다란 강 근처에 차를 세운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였다. 둘 다 내렸다.

"이름이나 좀 알자. 이것도 인연인데."

하도 어이없어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 와중에 통성명이라니? 제정신인가? 보닛에 기대어 앉은 녀석은 안주머니를 뒤지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너나 나나 결국은 구멍 동서인데 말야. 너무 떽떽 거리지는 말자구. 혹시 담배 있나?"

처음에 그놈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구멍 동서라니.... 바로 다음 순간, 그 의미를 깨닫고는 곧장 달려들어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밀어붙여 차 보닛 위에 녀석을 쳐 박는다.

"미친 소리 작작 해!"

손에 힘을 가득 주고 으르렁거려 보았지만, 오히려 상대는 태평했다. 멱살을 풀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바짝 쳐들고 내게 시선을 마주한다.

"담배 있냐고 물었잖아. 젊은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래도 이게 진짜......"

"그럼 말야. 만약 니가 지혜랑 안 잤으면 날 쳐라. 내 그냥 맞아주마. 내가 틀린 소리 한 게 되니까."

"이익!!!"

주먹을 치켜 올렸지만, 후려치진 못했다. 놈의 말은 틀리지 않다. 젠장. 젠장. 젠장!

"으아아악!!!"

애꿎은 보닛만 후려치고 만다. 손을 놓았다.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찾아내 뒤로 던졌다. 찰칵찰칵 소리가 나더니 이내 담배 연기가 내 쪽까지 흘렀다. 담배 한 개비를 반쯤 태울 시간이 흐르고 녀석이 조용히 말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지. 예전에 자네하고 나하고 좀 안 좋게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오래전 일이기도 하니 그냥 잊어버림세. 사람이 옛날 일에 집착하면 못 쓰는 법이여."

생각해보면 그는 오히려 나한테 맞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내가 굉장히 속 좁은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는 담배 연기를 흘려보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냥 동생처럼 알고 지내는 양 과장이 결혼한다고 해서 순수한 마음에서 축하해주러 온 거네만...."

후우- 하는 긴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물씬 내 쪽으로 풍겨온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는 나도 한 대 몹시 땡기는 기분이다. 지혜의 남편과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다... 동생처럼 알고 지낸다... 지혜로서는 몹시 찝찝한 일이겠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말야. 오히려 자네야말로 여긴 왜 왔나? 양 과장이랑 아는 사이야?"

"...."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봐라. 자네야 말로 아직까지 지혜를 못 잊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아까 보아하니 표정도 몹시 안 좋아 보이더만."

강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이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표정은 당신 때문에 그렇지!"

그러나 녀석의 능글맞은 표정은 여전했다. 오히려 큰소리다.

"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나. 허허. 비록 늦어서 사진은 촬영 못했다만 이래봬도 신랑 측에다 축의금도 냈다고. 뭐가 문제지?"

"으흑....."

분했다. 분명 이 자식이 이런 자리까지 온 사실은 꺼림칙한 일이다. 그러나 녀석의 말마따나 녀석은 지혜가 아니라 신랑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온 이유에 대해서 전혀 꿀릴 것이 없게 된다. 내가 꺼림칙하다는 것 말고는 겉으로는 아무런 논리의 허점이 없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자니 녀석의 말이 이어진다.

"여자가 결혼 전에 다른 남자랑 사귀고 그러는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서 뭐 큰 허물이라도 되나. 그냥 자네나 나나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일인데, 안 그래? 괜히 열 내지 말게."

녀석은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를 빼더니 이내 출발해버렸다. 녀석이 떠나고 나서도 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오지랖도 넓게 전에 몇 번 잤던 사이인 여자 결혼식에 와서는 그 여자의 옛 애인을 붙들고 다그친다. 저 녀석이 지혜와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하면, 나와 지혜 사이는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저 녀석이 지혜와 불륜 상대가 된 건 나를 알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오래 생각해보아야 답이 없다. 어차피 지혜와는 이제 볼 일도 만난 일도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어둡고 검은 마음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곤란한 마음이 가득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여긴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는 지극히 한적한 도로였다. 나쁜 새끼. 이런 데다가 나를 떨구고 가다니. 이런 식으로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내 담배도 가져가 말야. 억지로 녀석의 나쁜 점만을 골라 생각하며 도로 쪽으로 나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마 이쪽 방면으로 가면 시내가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 패잔병마냥 터덜터덜 걷는다.

그렇게 한 오 분가량 걸었을까. 뒤쪽에서 불현듯 차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본다. 아직 오후인데도 벌써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다니 이상한 차다. 일단 손을 들어 히치하이킹을 시도한다. 이곳은 차가 전혀 다니질 않아 한 대라도 지나갈 때 얻어 타야 한다. 차가 이쪽으로 점점 달려온다. 나를 본 것일까.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차선을 지그재그로 이상하게 물고 달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뒷걸음질 쳤지만 그런다고 그 차와 나의 간격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차의 속도는 내 예상보다 빨랐다. 너무 빨랐고, 나를 지나가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부딪힌다. 피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몸을 던져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차의 좌측 보닛 위쪽에 처박힌다. 운전석 쪽 창을 타고 한 바퀴 구르며 몸이 날아오른다. 썬팅이 짙게 된 그 유리 너머, 눈에 익은 얼굴을 본 듯한 착각을 느낀다. 허공에 체류하는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낙하의 시간은 영겁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를 구른다. 기괴하게 뒤틀린 내 팔과 다리가 보인다. 평소라면 저 방향으로 꺾이지 않는데 이상하다. 바른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노력만이 가상하다. 내 몸, 내 정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눈꺼풀이야말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신체부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어디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뜨거운 핏물이 내 눈을 덮는다.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간다. 내가 붉게 물드는 건지, 세상을 가득 덮는 붉은 홍수가 범람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예전에 길바닥에서 내가 주워 들었던 죽은 강아지가 생각났다. 녀석을 아스팔트에서 데리고 와서 땅에 파묻은 건 잘한 짓인 거 같다. 아스팔트 위는 너무도 차가웠다. 차갑고 차가우며 지극히 차가웠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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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에서 이런 인사 드리기 좀 뭐하지만...

즐거운 추석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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