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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어둠이 날 받아들였다. 그 속에서 꿈을 꿨다. 길고도 지루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것 같은 신 나는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뭐랄까. 썩은 물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 같았다. 한 번씩 물속 깊은 심연에서 날 잡아당기는 해류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몸이 저절로 쓸려갈 뻔하기도 하고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아 그냥 혼자서 내려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누군가 위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어 끌어올려 주었다. 손의 주인은 매번 달랐다. 어떨 때는 리사, 또 어떨 때는 유진이, 언젠가는 선영, 또 어떨 때는 마리, 다시 또 예린이 ... ..... 그리고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엄마.
엄마가 보고 싶었다. 너무 멀리 떠나 있어, 자주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분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래서 눈을 떴다.
나는 눈을 떴다고 믿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눈을 뜬 것일까 아닐까. 이윽고 깨달았다. 잠에서는 깼지만, 아직 눈꺼풀을 다 밀어 올리지 않은 터였다. 눈에 힘을 주어 떠보기로 했다. 고작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일이 천근만근의 추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도 힘든 기분이다. 도시락 하나 다 까먹고도 남을 시간이 걸려서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날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얼굴을 하나 발견한다. 사람 얼굴은 아니었다.
달이다.
둥근 달이 창밖 가득 날 비추고 있었다.
길고도 지루한 꿈을 꾸는 동안 보지 못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달이 이토록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눈물이 흐르는 바람에 기껏 힘들게 뜬 눈이 다시 얼룩진다. 시야를 가린다. 눈꺼풀은 간신히 들어 올린다고 해도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닦고 싶었지만, 마치 나에게 손이 달려있지 않은 기분이다. 달에게 말을 건다. 대답이 없다. 누군가 떠오르게 하는 달의 둥근 얼굴이 내 기억을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아예 눈을 감고 한숨 자기로 했다.
밝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달은 보이지 않았다. 하얗고 둥근 구름만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여보니 누군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모양이다. 라디오 앵커가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기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환율이 불안하고 기업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기업들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곤란하다. 고개를 돌려 주위에 뭐가 있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내 목을 무언가로 콱 눌러놓은 듯한 기분이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꺼풀뿐 이었다. 떴다, 감았다를 반복한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어머니, 들어가서 주무시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은 목소리. 예린의 목소리였다.
"하이구. 음. 내가 까묵 잠들었구만. 예린이 왔는감?"
엄마 목소리다. 하아. 맨날 자고 있으면서 깨우면 안 잤다고 우기는 뻥쟁이 우리 엄마.
"오늘은 제가 있을 겁니다."
"에구.... 이거 미안해서 워째쓰까."
"저녁에는 마리 아가씨가 오기로 했으니 오늘은 안 나오셔도 됩니다."
"아녀. 그래도 밤에는 내가 봐야지루. 집에 가 눠도 잠이 안 온께."
"주말이라도 좀 쉬셔야죠. 들어가세요, 어머니."
"희유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예린이는 말수가 적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엄마가 예린이랑 저렇게 살갑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했던가? 내가 기억하기로 엄마가 예린이를 본 거라고는 내 생일잔치 벌이던 날 하루밖에 없을 텐데.
"나가 복이 없제.... 남자 복이 없어..... 맴 준 놈은 내를 몰라주고 도망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는 반병신이 되뿌리고....."
그 뒤로도 엄마의 장탄식이 이어진다. 듣고 있다니 처음에는 가슴이 저렸다가 나중에는 너무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그러니까 살짝 짜증도 났다.
그나저나 마음은 준 사람이 도망갔다니... 그건 설마 내 친부에 대한 이야기일까. 여태 살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어렸을 적, 남들 다 있는 아빠인데, 나는 왜 없냐고 물었다가 펑펑 우는 엄마한테 잔뜩 혼난 뒤로는 다시는 물어보지 못했다. 옛말에 이르길 사연 없는 무덤 없고,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왜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성모 마리아도 아닌 엄마한테 나의 내력을 따져 물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한가지 생각나는 건, 나한테 왜 아빠가 없냐고 물어보았을 때 보았던 엄마의 얼굴이다. 늘 여장부로 소문 난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여태까지 그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물어볼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에 잠긴 동안 엄마가 나간 모양이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나가고 나니 다시 화가 난다. 흥, 반병신이라니. 이렇게 멀쩡한 나를 보고 그게 뭔 소리다냐. 몸이 안 움직이는 것 때문에 그런가? 눈꺼풀은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감았다 떴다, 얼마나 잘 움직이고 있는데 말야. 아무도 알지 못하나?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곧이어 의자 끄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숨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누군가 혼자 내 옆에 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아까 나갔으니 아마도 예린인가 보다. 다시 창밖을 보기로 한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아예 안 보이다가..... 어라?
내 눈앞을 덮는 손이 보인다. 눈을 뜨고 그것을 본다. 커다란 손.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예린의 얼굴이 나타난다. 여전히 선글라스는 새까맣다.
"하....한석 씨. 눈 뜨신 겁니까?"
예린의 당황한 목소리라니. 생전 처음이다. 그나저나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사람에게 눈을 떴냐고 물어보다니, 그건 또 무슨 경우야?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내 고개를 여전히 움직이지 않기에 대신 눈꺼풀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그러자 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다.
"제....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렇다면 눈을 두 번 깜빡여주세요."
그건 쉽다. 난 당신이 예린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 의미를 담아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예린이 그 커다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예린이 무언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간호사!"
아따 목소리 한 번 오지게 크네. 그리고 또 부스럭부스럭.
"아...아가씨! 한석 씨가 눈을!!! 네. 지금 방금 확인했습니다......예.... 예..... 잠시만요."
귓가에 차가운 감촉의 무언가가 닿는다. 기다랗고 단단한 무엇인 거 같은데 거기서는 뜻밖에도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석 오빠? 내 말 들려요?"
예린이 내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깜빡인다고 소리쳤다. 아마도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그것을 내 귀에 가져다 댄 모양이었다. 차분한 리사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리사의 목소리는 다소 젖어있었다.
"지금 바로 보러 가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네요. 죄송해요. 여기 일이 해결되면 바로 가도록 할게요. 너무 보고 싶어요. 오빠."
나도 보고 싶다, 리사야. 그러나 말은 할 수 없기에 그저 두 눈만 거듭 깜빡일 따름이었다. 예린이 다시 전화기를 가져가 무어라 한참을 이야기한다. 곧이어 의사가 들어와 내 눈에 핀라이트를 들이대고 간호사에게도 뭔가 지시한다. 정신이 없다.
그러나 진짜 정신이 없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나타나 내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고 곧이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마리가 내 팔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 얼마 후 찾아온 유진이는 내 손을 자기 이마에 대고 나지막이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교회 다니는 녀석인지는 몰랐는데... 또 어느 날 밤에 혼자서 찾아온 선영은 내 몸을 끌어안고 울다가 날 숨 막히게 할 뻔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무슨 통곡의 벽으로 보이나. 왜들 하나같이 날 붙잡고 이렇게들 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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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이번에 제가 쓴 단행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연재하는 <더블데이트>는 아니고 <단신부임 부장님은 촉수괴물을 기른다>라는 이상한 내용의 단권 짜리 이야기입니다. 알라딘에서 저 제목으로 검색하시거나 "카라차"라고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많이 사주십시오.
아, 그리고 여기에 댓글 다신 분 중에 한 분을 뽑아서 책을 한 권 증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한은 10월 10일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