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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26화 (32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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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의식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곧바로 움직일 순 없었다. 반 년 넘게 침상에서 꼼짝없이 누워있던 내 몸은 말라비틀어진 수수깡만도 못 했다. 팔과 다리의 골절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손가락의 감각을 되찾는 데에 일주일, 발가락의 감각을 되찾는데 일주일이 또 걸렸다. 말을 하게 되는 데는 3주가 소요되었다. 삐꺽 거리는 내 몸에서 관절이 제 역할을 깨달아가고 피가 원래대로 순환하며 뛰어야 할 기관이 제대로 뛰게 되는 데에 결국 한 달이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달과 푸른 하늘을 보며 눈을 뜨게 된 지 이제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뻣뻣한 나무토막이 아닐까 의심되던 내 몸뚱아리도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의사는 이제부터 하루 한 시간 정도 걸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내 다리가 아니라 남의 다리 같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다리가 움직이기는 했다. 팔과 다리가 훌쭉해진 게 아주 방금 입국한 아프리카 분쟁국 난민 같아 보인다.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 일어난 일을 전해 들었다. 4월의 어느 날, 북한강변 도로에 널브러져 있던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시체인 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아직 살아있었고 춘천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팔과 다리에 심각한 골절, 두부 손상, 내장 파열, 과다출혈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신분증은 없었지만, 품 안에 예린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터라 경찰은 내 신원 파악을 위해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의 사고 소식은 그렇게 예린을 거쳐 리사와 마리로 전달되었다. 그녀들은 곧바로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춘천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그녀들은 통해 신원이 확인된 나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엄마나 유진에게 연락이 닿은 것도 이때쯤인 모양이다.

그때부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내 곁을 지켜준 것은 엄마, 유진과 선영, 리사와 마리, 예린 등이었다. 내가 꾼 꿈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실제로 내 곁에 있어주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주어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가지 않게 잡아 주었다.

한편 경찰은 내가 발견된 지역 근처 도로에서 타이어자국과 부서진 차체 파편 몇 조각을 찾아냈지만 그걸로 뺑소니차를 찾는 건 무리인지라 몇 달 가지 않아 수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단서가 너무 없었다. 10월 중순에 내가 눈을 뜨자 경찰이 다시 찾아왔다. 내게 사고 직전 목격한 것에 대해 진술하도록 요구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내가 거기에 간 이유도, 나를 치고 달아난 녀석의 차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병실에서 창을 통해 보았던 낙엽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날 부축한 마리에게 고집을 부려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밖에 나가도 된다고는 안 했는데예."

"안에만 있으라고도 안 했잖아."

마리는 찬 공기 맞으면 안 된다고 투덜거렸지만, 날씨는 11월치고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다. 숨을 가득 들이마신다. 무려 7개월만의 바깥 공기였다.

"지금이 11월이라고?"

"야아."

"신기하네. 내가 눈을 감았을 때는 분명 4월이었는데.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야."

정말 그랬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봄에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이미 늦가을이라니.

"타임머신이 아니라 요단강 근처 가서 뱃놀이 하고 오신 거죠."

저렇게 밉살스러운 소리를 하는 녀석은 정해져 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건지 교복차림의 유진이가 다가와 내 팔을 잡는다. 이 녀석은 요새 아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월급이라도 줘야 되려나. 그게 아니면 개근상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 보다.

"벌써 나와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암, 그렇고말고."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예요. 바른대로 말해요."

"아, 정말이라니깐."

호기로운 내 목소리와 달리 내 걸음걸이는 갓 걸음마를 배운 돌배기처럼 위태위태했고 결국 마리와 유진에게 연행되다시피 양쪽 팔짱을 끼워진 채 다시 병실로 향한다. 대신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걷는 걸로 걷기 재활을 이어갔다. 내 몸 전체가 이제야 슬슬 내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물리치료를 병행한 재활치료는 하루하루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안에 불타고 있는 검은 욕망은 내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날 이렇게 만든 놈을 떠올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서 힘이 솟아났다. 보행용 보조봉을 붙잡은 손에 힘이 솟는다.

재활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니 마리와 유진이가 있었다. 유진이가 귤을 사왔다고 했다. 마리가 앉아서 까고 있었다.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깐 귤을 받아먹으며 물었다.

"리사는 언제 온대?"

그러자 마리가 흠칫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리사 이야기만 꺼내면 이 녀석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게... 언니는 여전히 몸이 안 좋아가..... 아무래도요."

"그런가."

리사와 통화는 종종 하고 있다. 그녀는 내게 어쩌다 다쳤는지, 왜 춘천에 갔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 춘천에 간 이유는 그녀도 알고 있을 테지만, 지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는다. 병원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녀는, 지루한 병원 생활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작은 팁을 말해주곤 했다. 그렇게 종종 전화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기운이 없었다. 여전히 상냥하고 밝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뭐랄까. 생기가 부족하달까.

"어디, 아파?"

이렇게 물으면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부정한다.

"그냥 그래요."

리사가 무척 보고 싶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마리는 사흘에 한 번 꼴로 보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리사가 자꾸 보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병실에 누워있을 때면, 그녀와의 밤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랫도리가 후끈해지는 그런 기억이 아니다. 뭔가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교감의 기분이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다. 마냥 동생같이 느껴지는 마리와 달랐다.

그녀를 무척이나 보고 싶지만 부산에 있는 그녀를 보러 가기엔 내 몸이 좋지 않았고 그녀가 날 보러 오기에는 그녀가 좋지 않았다. 내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던 초기에는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날 간호하느라 몸이 급격하게 상했다고 한다. 그렇게나 몸이 많이 안 좋은 걸까. 몹시 걱정되었다. 예전에 그녀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병원생활이 떠오른다. 설마 다시 그렇게 병원에 드러누운 걸까.

리사 생각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왔는데도 딴 사람 찾고 있어요?"

"니가 여기 있는데 굳이 또 널 찾을 필요는 없잖아."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유진이는 내 입에 귤을 쑤셔 넣었다. 껍질을 깠으면 귤을 조각조각 갈라서 하나씩 넣어주어야지 이 무식하게 과격한 녀석은 한 개를 통째로 넣어 제낀다. 숨 막히는 줄 알았네. 마리가 기겁하면서 유진을 뜯어말렸지만, 유진이는 마리의 제재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환자한테 뭐 하는 짓이고."

"간병하잖아요."

"그기 간병이가. 아이고. 간병 두 번 했다가는 사람 잡겄네."

"잡는다고 잡혀요? 이 능구렁이 아저씨가?"

사이가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날 사이에 두고 여전히 티격태격 하는 마리와 유진을 보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어 예린이 왔다. 교대할 시간인 모양이다. 유진과 마리는 가방과 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갈게예."

"그래, 조심해서 가."

병원은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리에게 유진이 좀 배웅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진은 내게 물었다.

"언제 퇴원해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 조만간 하지 않을까?"

"퇴원하면...."

유진이는 몹시 우물쭈물했다. 평소라면 딱 부러지게 말할 텐데 이 녀석은 예린을 좀 어려워했다. 예린이가 나타나면 급격하게 말수가 줄고, 조심스러워진다. 주저하던 유진은 예린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내게 물었다.

".....다시 과외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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