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27화 (32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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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그렇게 어려워하며 던진 질문이... 참 수준 낮다.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 까먹었어. 무리일 거 같다."

"정말요? 기억상실증이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는 폼이 참으로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정면을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뻥이야."

"이익!!!!"

유진은 당장에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받침대 마냥 두고 다듬이 방망이질이라도 리드미컬하게 때려주고 싶은 표정이지만, 내 곁에 예린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혀만 쏘옥 내밀고는 마리와 함께 병실을 떠났다. 오늘 밤 담당은 예린인 모양이었다. 침상에 반쯤 기대앉은 난 예린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젠 그렇게 불침번 설 필요가 없지 않나?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전화해도 되고 말야.”

“어머님이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오시겠다는 거 겨우 쉬시라고 해두고 나왔습니다.”

아아. 우리 엄마. 엄마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공부한답시고 집 떠나와 지내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뻘짓하러 춘천 갔다가 사고까지 당한 아들내미가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 보살시피십니까. 엄마만 보면 미안해 죽겠다. 예린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가만히 듣다가 뭔가 꺼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조사를 끝냈습니다.”

그녀가 어떤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올 것이 왔다. 예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얼마 전 내가 깨어났을 때의 그 당황하던 표정이 겹쳐 보인다. 심호흡을 하고 꺼내본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천천히 드러나는 사진의 가장자리를 보면서도 가슴이 옥죄여 온다. 꿈엔들 잊힐까 싶은 그놈의 사진이 제일 먼저 나온다. 어떤 집에서 나오는 모습,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 차에 올라타는 모습.....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부들부들 떨리려는 손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다음 장을 펼친다. 녀석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 오직 예린에게만 은밀하게 이 사람에 대한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다. 지혜와 한때 불륜관계였다는 것. 지금은 그녀의 남편과 아는 사이라는 것. 그가 누군지, 어디서 뭘 하는 인간인지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왠지 예린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녀 역시 내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알았다고 대답하고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이런 결과를 가지고 왔다.

상세히 읽기 전에 고개를 들고 예린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리사에게 이 조사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했을까? 근래에 리사와 나눈 통화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예린이 리사에게 뭔가 숨기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니 리사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보고서를 살핀다.

이름은 임필복. 나이는 이제 딱 55세. 대물물산이라는 중견기업에서 전무를 맡고 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승진가도를 달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방 쪽 공장에서 현장 기반을 닦고 서울로 올라와 요 몇 년 사이에 전무자리까지 꿰찼다. 수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요즘처럼 경제가 뒤숭숭한 시기임에도 꽤나 잘 나가는 모양이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녀석에 대한 분노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에 쥔 사진을 구겨버리고 만다. 예린에게 물었다.

"양.... 규호라고 했던가. 지혜 남편이?"

"예."

"그 사람이랑은 어떤 관계인데?"

필복은 규호를 가리켜 자기 동생 같은 이라고 했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린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대물물산이 올해 초 물류 쪽으로 사세를 확장시키면서 거기에 소요되는 차량은 전부 양규호를 통해 구매한 모양입니다. 양규호는 그 덕분에 이 지역에서 올해의 판매왕이 되었죠."

"그게 올해 초라고?"

"예."

기억을 더듬어 본다. 시간을 맞추어 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임필복이 양규호에게 접촉한 것은 분명 지혜가 선을 보고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한 게 틀림없다. 자동차 세일즈맨인 양규호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를 통해 아주 많은 자동차를 사면 된다. 말이야 쉽지만 어지간한 추진력과 강단이 없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고작 불륜상대였던 여자 하나 엿 먹이는데 그만한 에너지를 쏟는 녀석이라니. 제대로 돌은 녀석이다.

하긴, 그렇게 돌은 놈이니까 사람을 차로 밀어버릴 생각도 했겠지...

이런 생각으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예린이 뜻밖의 소릴 한다.

"지금도... 수시로 그 지혜라는 분과 접촉하는 모양입니다만...."

"뭐?!"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까 뒷골이 땡긴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도로 드러눕는다. 예린은 보고서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불규칙하게 별도의 장소에서 가끔 만남을 가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대체 그놈이 지혜에게 무슨 짓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예린. 거기까지 조사를 안 한 것인지 아니면 조사를 했는데 나에게 말을 안 해주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지러운 생각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대단히 미친놈이다. 그놈은 제대로 미친놈이다. 그놈은 아울러 자기와 지혜의 관계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을 차로 그대로 밀어버리는 과감성도 갖추고 있다.

지혜의 결혼식이 생각난다. 시간적으로는 7개월 전의 일이지만 나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능글맞게 인사하던 임필복의 뱀 같은 언사와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의 너털웃음. 돌처럼 굳어버린 지혜의 뒷모습..... 눈을 감고 있으면 그때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장면이 낡은 영사기에 얹어진 필름처럼 자꾸 돌아간다. 실제로는 벌써 몇 달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불과 며칠 전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 녀석을 모른 척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면.... 그냥 그놈에게 말을 걸지 않고 차에 올라타지만 않았다면..... 덧없는 후회는 반복해서 내 기억에 아픈 상처를 남길 뿐이다. 돌아보면 거기에는 후회만이, 아픔만이 가득하다. 난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기억과 후회는 끊임없이 나를 붙잡고 놓질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사슬들을 끊어내야만 한다. 그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지 않고는 그 사슬들이 영영 나를 묶은 채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짙은 어둠 속에 무언가 언뜻언뜻 보일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의식을 잃고 잠들어 있을 때 보았던 무의식의 저 편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스쳐지나가곤 한다. 그중 하나가 내게 외치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선명한 모습을 색채를 빛내고 있었다.

복수. 오직 복수.

눈을 떴다. 한 달 만에 보는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한 달 전, 움직이지 않는 몸에서 오직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저 달. 나로 하여금 눈물 짓게 만들어버린 저 달. 달을 보고 있노라니 한 사람이 떠오른다. 달처럼 환한 미소를 짓던 지혜.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제 내 여자는 아니지만.... 그녀를 향해 구렁이 같은 필복의 검은 혀가 넘실대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소름이 돋는다.

"예린 씨."

"예."

예린은 늘 그렇다. 갑작스럽게 불러도 당황하는 일 하나 없이 곧장 대답을 해온다. 마치 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냥개처럼. 버튼만 누르면 곧장 작동하는 기계처럼.

"나를 도와 줄 수 있어?"

"예."

진지한 예린의 대답인데, 난 괜스레 웃어버렸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예린 쪽을 향해 돌아본다. 어두운 밤하늘보다도 더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내가 뭘 도와달라는 줄 알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있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달라고 하면 어떻게 도와주려고?"

반쯤 웃으며 말했지만, 예린은 언제나 그러하듯 진지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습니다."

하아. 이래서 문제야. 내 주위의 여자들은 어째 리사 말고는 다들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아니, 이런 것도 고분고분하다고 하면 고분고분한 거라고 해야 할까. 하긴 그래야 예린이지. 사실 리사도 그리 고분고분한 녀석은 결코 아니고 말이다. 한숨을 살짝 내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펼친다.

"내 뺨을 친 놈이 있어."

아주 세게, 혹은 죽여 버릴 요량으로 라는 말은 뺀다. 굳이 넣지 않았다. 예린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주라고 하지만 말이야.... 성인도 아니고 도 닦는 사람도 아닌 평범한 나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녀석의 뺨을 나도 쳐야겠어. 그래야 내가 내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도 산 게 아냐."

"그렇습니까?"

"나.....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싶어."

지난 한 달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이 말을 결국 꺼내고 만다. 사람이 머릿속으로는 어떤 상상이든 할 수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컴퓨터의 작동 버튼을 누르는 일이라든가 지나가는 여자를 쓰러뜨리고 옷을 찢고 강간을 하는 일이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을 싹 다 엮어다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는 일이라든가. 생각으로는 뭘 못하겠는가.

그러나 말은 다르다.

생각으로 머물고 있던 무언가가 음성이라는 신호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내 손을 떠나 그 자체로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 말은 살아있다. 그 자체가 힘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도리어 내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엄청난 소리를 내뱉은 나는 그 말이 가지는 무게만으로 온몸이 쩌릿쩌릿하다.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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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즐거운 연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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