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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그렇습니까?"
너무도 명료하고 단답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맥이 좀 빠졌다. 나로서는 정말 미칠 듯이 번뇌하고 죽을 듯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며 꺼낸 말이란 말이다. 예의상 놀란 척이라도 하거나 말린다거나, 그런 태도는 아예 싹도 보이지 않는다. 예린의 이런 무뚝뚝한 반응 앞에서는 "어제 빵을 먹었는데, 맛이 더럽게 없었어. / "그렇습니까?"라는 정도 말 밖에 안 되는 느낌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정말 예린 씨는...."
"네? 무슨 문제라도?"
"아냐. 늘 한결같아서 보기 좋다고."
"감사합니다."
결연한 마음에 금이 갔다. 이래서는 무슨 애가 장난감 사달라고 꼬장 부리는 꼬라지만도 못하게 되었다. 말을 내놓자마자 후회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다니... 그게 할 짓인가. 가능하기나 한 짓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예린의 말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까요?"
"......뭐?"
놀라서 예린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입만 움직일 따름이다. 가끔 보면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평소 말이 별로 없던 그녀인데도, 뒤이어 나오는 설명은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저희는 약보다는 연장을 더 선호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일반인이라면 아무래도 약이 깔끔하겠지요. 뒤탈도 없을 테고 처리도 쉽겠지요. 연장이 손에 익지 않다면 아무래도 지저분해지니까요. 또한 사용법을 익히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능하면 전문가를 고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이 경우는 개인적 원한이니 아무래도 직접 하시는 걸 더 선호하시겠지요. 원하신다면 녀석을 잡아서 한석 씨 앞에 데려오는 것까지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뒤를 잡히는 경우도 있어서 신중하셔야 합니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 예린 씨.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한다.
"죽인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도리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신이 방금 전에 얼마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놨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마....말이 그렇다는 거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은 건 아니었어."
그러자 예린은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끄덕인다.
"그렇습니까?"
"하아....."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몸을 깊숙이 파묻는다. 30도 각도로 세워놓은 등받이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몸을 지탱한다. 창밖의 달을 다시 본다. 짙은 구름이 흘러와 달을 살짝 가리고 다시 벗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구름은 모양을 갖추고 흐르지 않고 마치 혼란스러운 내 마음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다 점점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하나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 그렇게 저 멀리 흘러간 구름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왔던 일을, 정말 실행에 옮길 결심 말이다.
"예린 씨."
그녀의 이름을 살짝 불러본다. 언제나 그러하듯,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해오는 그녀.
"네."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예린의 대답은 언제나 긍정적.
"그렇습니다."
복수. 내 마음속에 결국 자리 잡은 하나의 단어. 불현듯, 아주 오래 전 들었던 오페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소프라노 가수가 뭔가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음역까지 오고 가며 부르던 노래가 하도 인상적이라 가사를 따로 찾아보았던 기억. 그 가사는 이러했다.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죽음과 절망이 내 주위에 불타오르네!
네가 자라스트로로 하여금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는 더 이상 나의 딸이 아니다."
밤의 여왕은 복수를 외치며 그녀의 딸에게 칼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라이벌인 자라스트로를 죽이지 않으면 딸이 아니라고 선언해버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존재에게 또 다른 내가 부여한 사명이 있다. 나를 죽이려 한 그 인간을 죽이지 못하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도 나를 몰랐다. 이토록 깊은 어둠과 독한 마음이 내게 있었는지. 그러나 그걸 해내지 못하면 살아 있는 이곳이 곧 지옥이 될 거라는 확신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렇게, 결심을 내렸다.
"그렇다면 날 도와줘."
"역시 직접....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이번에는 예린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이렇다 저렇다 할 반대를 하지 않는다. 평가를 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길을 제시할 따름이다. 그녀는 나의 도구였다. 아주 날카로운 칼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이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도 같았다. 그녀가 보는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러나 어둠보다 깊은 그녀의 검은 선글라스는 내 모습을 비추기보단 그대로 빨아들였다.
"내 손으로.... 반드시....."
가만히 듣고 있던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조만간 준비가 끝나는 대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주무십시오. 취침 시각이 지났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담요를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가더니 불을 껐다. 내 손에 움켜잡고 있는 서류와 사진을 수거해간다. 보조의자에 앉은 예린은 마치 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내 가슴을 토닥여준다. 눈을 감았다. 까무룩 잠이 온다.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 요즘은 걸핏하면 잠이 온다. 잠결에 예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저라면...."
낮은 허밍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게 나에게 자장가가 된다.
"왼뺨을 맞기 전에 녀석의 팔을 꺾어버립니다. 다시는 감히 팔을 뻗어 저를 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해줍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방긋 웃음이 나온다. 그래, 그래야 예린이 답다니깐.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야.....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달리고 있었다. 돌부리에 발이 치이고 나동그라져도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앞을 보니 거대한 무대가 놓여 있었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무대였다. 배경은 아주 깊고 짙은 검은 색이었다. 무대 앞에 서서 잠시 발을 멈추고 있자니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에 있던 장막이 걷히고 온통 검은 옷을 차려입은 한 여인이 나타났다. 짙게 드리워진 베일로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어깨와 가슴 윗부분은 대담하게 파여서 고혹적인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아래로 갈수록 풍성하게 펼쳐진 드레스 차림이었다. 왠지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녀는 두 손을 펼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Tod und Verzweiflung flammet um mich her!
Fühlt nicht durch dich Sarastro Todesschmerzen,
so bist du meine Tochter nimmermehr."
아는 노래였다. 하지만 모르는 노래다. 어디선가 일어난 화재로 인해 무대가 불타기 시작했다. 내 몸도 함께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무대 위의 그녀는 완전히 불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내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한 손을 높이 들자 그녀의 몸 전체에서 흑광이 터져 나와 주변을 감쌌다.
며칠 후, 예린은 내게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퇴원 수속을 밟았다. 재활 치료를 더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하고 조용히 예린을 따라 병원을 나섰다. 퇴원 수속을 밟는 동안, 엄마는 걱정을 태산같이 하며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안달복달 해댔다. 더 좋은 곳으로 재활치료를 하러 간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다.
"어머님, 이쪽으로..."
수속을 마친 예린이 엄마를 데리고 저쪽으로 가더니 뭔가 이야기했다. 워낙 작게 말해서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예린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더니 나와 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그때 말했던 게... 그럼..."
"그렇습니다."
"으휴... 이를 어째쓰가..."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내 등짝을 후려치고 병원을 먼저 떠났다. 조금 전까지는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그렇게 애쓰시더니 예린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날 바로 보내주었다. 예린에게 대체 무슨 소릴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두 달입니다."
"뭐가?"
"그 안에 승부가 납니다."
"승부라니?"
"그런 게 있습니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지만, 하루 몇 시간 걷는 게 고작인 나는 예린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선영이나 유진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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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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