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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예린이 날 데리고 간 곳은 경남 어딘가에 있는 산이었다. 수직에 가까운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지고 뒤로는 끝없는 임해가 펼쳐진 곳이었다. 절벽 밑에는 커다란 가건물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숙소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간단한 생활도구와 간이침대는 갖춰져 있었으나 인기척 하나 없이 황량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자 예린이 답했다.
"저희가 단합대회하러 종종 오는 곳입니다."
"단합대회라....."
단체 생활을 하는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포츠 동호회는 아니지 않나? 그쪽이?...라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짐을 모두 푼 예린은 내게 설명했다.
"지금 한석 씨가 가진 것은 두 팔과 두 다리 뿐입니다. 그걸 단련하는 방법이 한석 씨가 회복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니 뛸 수도 없습니다만 기어 다닐 수는 있겠죠. 대신 바닥이 아니라 이곳, 여기서 기어오르는 겁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떨어지지 않는 것부터 배우십시오."
그러면서 그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암벽 앞이었다. 수직... 아니, 수직보다도 더 앞으로 기운 예각으로 솟은 곳이었다. 고개를 들고 그 끝을 바라보다가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여기....를 나보고 올라가라구?"
"예."
"내가 복수를 도와달라고 했지 언제 이런 걸 시켜달라고 했어? 싸우는 법이나 사람 죽이는 법은?"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 하시는데, 그럼 그놈에게 지금처럼 아장아장 걸어가서 한 대 때려주시겠습니까?"
예린이 그놈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예린은 암벽의 가장 높은 곳, 가장 멀리 있는 곳에 있는 깃발을 가리키며 저걸 가져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암벽등반이라니. 그러나 예린은 진심이었고 체중을 분배하는 법부터 자세, 손가락 힘 키우는 법 등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온종일 암벽에 들러붙어 있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몸 회복은 고사하고 골병 드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암벽에 올랐다 떨어지고 구르기를 반복...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암벽과 사투를 벌였다.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오면 예린이 날 엎드리게 해놓고 근 한 시간 정도를 꾸준하게 마사지해주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몸 구석구석을 내맡기는 것에 쑥스럽기도 했고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손에 완전히 내 몸을 맡기게 되었다. 온종일 시달린 근육들이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노곤노곤하게 풀어졌다. 사실 여태까지 병원에 있으면서 제대로 잠을 못 잔 경우가 많았다. 이런저런 괴로운 생각에 뒤척이다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게 일쑤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경우 한 번 없이 그대로 푹 잠들었다.
그러기를 한 달. 이제는 먹고 자고 마사지 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조건 암벽에 달라붙어 있게 되었다. 처음 예린이 목표로 잡았던 정상까지는 불과 몇 미터 남지 않았다. 예린은 나의 빠른 회복과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이제는 슬슬 다른 걸 가르쳐 달라니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몸은 이제 완전히 회복된 거잖아. 그러면 본격적인 걸 가르쳐 달라고."
언제나 그러하듯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간이침대에 엎드려 예린의 마사지를 받으며 투덜거렸다. 벌써 며칠 전부터 계속 해온 말다툼이었다.
"내가 맨 처음에 예린 씨에게 부탁한 거 잊은 거야? 난 여기에 그저 암벽등반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니란 먈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으아아악....."
예린이 체중을 실어 허리를 꾹 누르니까 무지하게 아프다. 예린은 거의 나에게 올라탄 자세로 허리를 누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자세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온몸을 짜르르 하고 관통하는 욱신거림과 시원함 때문에 흥분할 겨를이 없다. 그녀는 내 엉덩이를 올라타고 허리부터 시작해서 등 전체를 마사지하며 천천히 말했다.
"깃발을 가져오시라니까요."
"쳇."
괜히 더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엎드려 있으니 그녀는 눈치 채기 어렵겠지만, 사실 난 지금 몹시 부끄러운 상태였다. 다리 사이가 부풀어져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예린을 여자라고 생각한 적이 잘 없었는데, 외딴 곳에 단둘이, 그러면서 거의 매일 살과 살을 맞대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녀가 의식되곤 했다. 마사지를 받을 때면 일부러 투덜거리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내 마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아닌 게 아니라, 깃발까지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이내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게 꿈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으면 더 안달이 나는 법이다.
"깃발을 가져오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거야?"
"예."
"그러고 보니 처음에 두 달이라고 그랬지? 그건 누가 정한 거지?"
".......리사 아가씨가 정했습니다."
"그래?"
리사......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면 내 마음이 약해진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 리사였다. 내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나서 보러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시기가 좋지 않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요 근래에는 전화도 잘 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 더욱 리사가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금의 난 오직 예린을 통해서만 리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리사가 보고 싶었다.
다음 날, 다시 암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코스는 이제 거의 눈에 들어왔고, 몸도 거기에 맞춰졌다. 사람이 움직이는 건 두 다리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손가락과 손, 팔과 어깨, 등과 허리 이 모든 게 사람의 움직임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오전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저게 어딜 봐서 재활이에요?"
마리와 유진이였다. 둘은 맨날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째 늘 붙어 다니는 모양이다. 마리가 날 가리키며 예린에게 투덜거리는 게 들렸다. 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 왔네?"
"왔~네~에?"
유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쏜살같이 달려온다. 키만 맞으면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지만, 아쉽게도 녀석은 짧았고 난 길었다. 게다가 웃통도 안 입고 있으니 잡을 멱살이 없지. 속살이라면 모를까. 유진은 내 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잔소리했다.
"아저씨는 어디 좀 갈 때 온다간다 소리 좀 하면 어디가 덧나요? 또 연락도 없이 잠수해버리기에 이젠 아예 죽어버린 줄 알았잖아요!"
그 사이에 복근이 좀 생겨서 유진의 손가락은 내 배를 쉽게 찌르지 못했다. 유진이 당황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녀석을 손목을 잡은 후 씩 웃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걸?"
환한 미소와 함께 답해준다. 유진은 날 올려다보고 잠시 얼굴을 붉히더니 손을 놓아달라고 투정부렸다. 매일같이 딱딱한 돌덩어리만 쥐고 살다보니 지금 손에 닿은 느낌이 너무 보드랍고 좋았다. 더 잡고 있으면 변태가 될 것 같아서 얼른 놓아주었다.
"매일 난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아주 처절하게."
"처절하게요?"
그러자 유진은 내 정강이를 발로 찼다. 아프진 않지만, 아픈 척 해주었다.
"말이면 단 줄 알아요? 내가 얼마나 걱정을...."
"알았다. 알았어. 방학 한 거야?"
난 유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려다가 내 손이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냥 긴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예린에게 오늘은 망월바위까지 갔다 왔다고 이야기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수첩에다가 뭔가 기록했다. 난 그 사이에 예린이가 가져다놓은 주먹밥 한 덩이를 먹은 다음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맨다. 근 한 달 만에 만난 유진과 마리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허투루 쓸 수가 없다.
"또 올라간다구요? 저길?"
송진가루를 다시 묻히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노라니 유진과 마리가 곁에 와서 내가 가야 할 코스를 올려다보며 신음을 흘린다. 나도 이 절벽을 처음 봤을 때는 대충 저런 반응이었던 것 같다.
"으윽.... 저긴 성한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거 아니에요?"
"할 수 있습니다."
유진의 질문에 나 대신 예린이 대답한다.
"지난 한 달간 한석 씨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해낼 겁니다."
엄격한 교관에게서 들은 모처럼의 칭찬에 박수를 몇 번 쳐준다. 송진가루가 휘날리자 유진과 마리가 불평을 해댔다. 손을 한 번 휘저어 주고는 벽에 달라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퇴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무리하는 거예요? 이게 대체 말이나 돼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유진이가 예린에게 대들다시피 쏘아붙이고 있었다. 예린을 어려워하던 녀석이었는데... 꽤나 무리하고 있구나.
"이런 산속에서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구요. 저렇게 무식하게 산만 타고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낫나요? 사람이 좀 푹 쉬고, 몸에 좋은 것도 좀 먹고 그렇게 해서 건강을 회복해야죠! 운동생리학 같은 것도 몰라요?"
"모릅니다."
인정사정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예린의 딱딱한 어조는 안 그래도 불 같이 화가 나 있는 유진에게 기름을 끼얹는 꼴이다.
"안 그래도 겨울인데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지내지는 못할망정 저런 개집 같이 생긴 곳에서..."
"사방에서."
예린의 목소리가 잘 갈아진 칼처럼 예리하게 유진의 말허리를 잘라낸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보다 톤이 좀 높다.
".....사방에서 좆같은 것들이 수십 명이 연장 들고 달려들고, 뒤에는 한 새끼가 사시미로 쑤시고 있고, 우리 애들은 다 디졌고, 눈 까뒤집고 아무리 둘러봐도 나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고 한다면."
저렇게 격한 표현이라니, 예린은 안 그래도 가만히만 있어도 무서운 사람인데 더 무섭다.
"어떠시겠습니까. 잡히면 죽습니다. 그때도 휴식 타령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그 운동생리학인가 뭔가 나부랭이대로 일단 좀 쉬고 먹을 것 좀 먹고 다시 붙자고 그러겠습니까? 할 만큼 했다고 했으니 밝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거기서 끝냅니까? 대체 거기서 살아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해보십시오."
예린의 박력에 눌린 유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라고 하자 예린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은 한석 씨를 지켜보는 겁니다. 어차피 앞으로 남은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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