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30화 (33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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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뭔가 엄청난 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기는 한데 영양가 있는 소리는 하나도 없다. 난 아래쪽을 보며 씨익 웃어 보이고는 다시 올라간다. 고립무원. 여기에 이렇게 매달려 올라가면서 철저하게 이 단어를 깨달았다. 뼛속까지 파고들어 와 새겨진다. 지금 여긴 오로지 나만 있고 나를 도와줄 것은 내 손과 내 다리뿐이다.

"조심해요!"

"파이팅!"

안타까운 목소리로 응원하는 유진과 마리를 뒤로하고 삽시간에 땅으로부터 멀어진다. 처음에는 1미터도 채 못 올라가고 벽에 달라붙어 있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문제없다. 겨울의 찬바람도, 얼음처럼 차가운 돌덩이도, 모두 내 한 몸 같다. 두 손과 두 발. 내가 기진 모든 것을 활용해서 틈과 틈을 붙잡고 기어 올라간다. 오늘은 반드시 저 목표를 달성하고 말겠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신중하게 발을 내딛고, 팔을 뻗는다. 등과 허리로 몸을 지탱하고 체중을 분배한다. 잡고 매달려도 되는 돌과 밟아도 되는 바위를 구분한다. 풀뿌리와 나무 등걸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이 험준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처럼 매달린 동지들이다. 한 발, 한 걸음, 한 손, 한 팔만큼 솟아오르는 데는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아래쪽에서 유진과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도착한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무언가 손에 들어왔다.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손에 쥔다. 깃발이다. 그걸 쥐고 마저 정상까지 올랐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포효했다. 저 멀리 산등성이마다 괴성이 메아리치고, 새가 날아올랐다.

땅으로 내려와 예린에게 깃발을 내밀었다.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나버려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방문객들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떠난 모양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내민 깃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린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건조하게 건네고 무언가 꺼냈다.

칼, 노끈, 각목, 쇠파이프 그리고 총.

간이 책상 위에 늘어놓은 물건은 사뭇 사나운 물건들이다. 그녀는 내게 한 가지 고르라고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난 노끈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고르셨습니다. 센스가 있으시군요."

"잘 골랐다는 건?"

"초심자가 사람을 죽이기 가장 적합한 물건을 고르셨습니다."

칭찬받은 걸까. 칭찬 받아도 좋은 내용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사소한 의문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 예린은 부엌에서 사용하는 칼보다 더 두껍고 길쭉한 칼을 들어보였다.

"칼은 효과적이지만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고기를 자르는 일과 사람을 찌르는 일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사람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죠. 초심자가 우연히 좋은 기회를 잡는다고 한들, 제대로 찌를 수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번에는 각목과 쇠파이프를 가리킨다.

"둔기 역시 흔하게 사용하는 편입니다만 린치가 아닌 일대일에서 숨통을 끊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칼보다 더 어렵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때리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 역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예린이 손에 쥔 것은 총이었다. 묵직하고, 탁한 검은빛이 흐린 조명 아래서도 빛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총입니다. 빠르고 효율적이며, 손쉽게 생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초심자가 사용하기도 쉽고, 설령 강인한 상대라고 해도 단번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한 만큼 견제가 큽니다. 빼앗긴다면 도리어 이쪽이 당합니다. 상대를 단번에 죽이지 못하고 도망가 버리면 더 곤란합니다. 총상은 경찰의 수사 대상이고, 입수 경로 또한 추적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배제합니다."

그렇게 '효과적이고 걸리지 않게 사람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 담담하게 말하는 예린의 모습은 퍽 낯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게 몹시 익숙한 일처럼 보였다. 어쩌면 난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이런 부탁을 한 걸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설명이 엄숙했기에 학생은 진지하게 배움에 임할 뿐이다.

"한석 씨가 고른 노끈을 봅시다. 길이는 1미터 내외, 구하려고 들면 전국 어디에서나 간편하게 구매할 수도, 혹은 급한 대로 만들어 쓸 수도 있습니다. 재질은 딱히 상관없습니다. 전깃줄이든 빨랫줄이든, 아니면 허리 벨트도 상관없습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 가능합니다."

예린은 노끈의 양쪽을 손에 한 번씩 감아쥐더니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책상 위에 놓여있을 때는 평범한 끈이었는데, 그녀 손에 들리니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런 동시에 싸움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협지를 보면 끈 하나로 상대를 농락하는 무림 고수가 나오죠. 그건 고수니까 가능합니다. 소설이니까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싸우기보단, 살해 그 자체에 충실한 도구입니다."

살해.

사람을 죽여서 목숨을 빼앗는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그녀는 너무 쉽게 입에 담고 있었다.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처음에는 생리적인 거부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녀의 설명에 "납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살은 상대방의 저항이 가장 큰 편에 속하는 살해방법입니다. 뇌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 뇌에 대한 공격은 인간은 물론이고 모든 동물이 거칠게 저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뇌로 가는 피를 전달하는 경동맥, 바로 그 포인트를 최대한 빨리 압박하는 게 중요합니다. 경동맥의 위치는 여기와 여기입니다."

예린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 앞쪽을 가리켰다. 평소에는 눈 여겨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녀의 목선은 굉장히 가늘고 여리여리했다. 피부도 굉장히 뽀얗다. 지금 이렇게 사람 죽이는 방법을 설명하는 여자의 목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실례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이해하셨습니까?"

"아, 네. 응. 아, 알겠습니다."

넋 놓고 있다가 대답이 다소 늦었다. 그러자 예린은 어디 서인가 가져온 나무줄기 한 토막을 앞에 세워두고 줄로 재빨리 휘감았다.

"쥐는 법은 이렇게 하시고, 단번에, 한 번 휘둘러 감는 방식으로 상대의 목을 조르십시오. 무릎으로 상대의 몸을 밀고, 양손을 자신 쪽으로 당기면 됩니다."

무릎으로 나무토막을 밀면서 두 손을 당기자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20센티미터 정도 지름이 되는 원기둥 모양의 나무가 단숨에 두 동강 났다. 어마어마한 약력과 스피드였다. 바닥에 떨어진 두 조각 나무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예린은 자신이 방금 해 낸 일에 큰 감명이 없는 듯 했다. 그녀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목은 나무보다 단단하고 질깁니다. 이렇게 단번에 잘라지지 않고 버티며, 또한 몸에 숨이 남아있는 한 버티기 마련입니다. 설령 자고 있던 사람이라고 해도,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가만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목아 졸리기 시작한 생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걸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린을 따라 가건물 안쪽으로 가니 스포츠 매트가 넓게 깔려있었다. 교실 정도의 크기였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유도 수업이 생각났다. 예린은 내게 끈을 넘기고 내 앞에 등을 보인 채 섰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끈을 쥐고, 같은 요령으로 제 목을 감으십시오."

"에? 그러면 당신이 숨 막힐 것 아냐..."

"글쎄요. 해보시죠."

"아프지 않겠어?"

"저한테 사람 죽이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예린이 여자치고 꽤 키가 큰 편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더 크다. 그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뭔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죽인다. 내가 사람을 죽인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자신이 없다. 예린은 재촉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끈을 단단하게 쥐고 예린의 목을 뒤에서부터 한 번 돌려 감아 조이...

퍽-

휙-

약 1초간 세상이 뒤집혔고, 2초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건물 천장이었다. 예린이 내 머리 옆에 서 있었다. 유도의 업어치기와 비슷한 동작으로 그녀가 날 메다꽂은 모양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그걸 간신히 버텨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린과 마주했다. 무어라 화를 내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분명히 단숨에, 빠르게 감으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렇지만 예린이 반격하리란 소린 안 했잖아!"

"저는 나무토막이 아니니까요."

"으으으...."

다시 자세를 취하고, 목을 조르고, 넘어가고 바닥에 뻗는다. 벌떡 일어나 다시 덤비고, 또 메다 꽂혀서 매트 위를 구른다. 맨손클라이밍으로 손아귀와 팔 근육이 단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다고 없던 맷집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다시 도전하고,

퍽-

휙-

"다시!"

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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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최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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