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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33화 (33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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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밤새도록 나와 살을 섞은 후, 품에 안긴 예린에게서 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사는 분명 날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지금 부산의 상황이 몹시 안 좋다고 했다. 요 며칠 동안 예린이 계속 불안해보였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리사는 자신을 향한 위협보다도 "그녀의 남자"인 나에게 향한 위협을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나를 찾아오지 못한 것도, 내게 예린을 붙여 이 은밀한 숲속에 숨기기로 결정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예린은 리사의 결정에 반발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리사를 지켜야 하는 최측근 경호원인데, 고작 최한석이라는 사람 때문에 리사 곁을 떠나야 하는 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예린은 내 품으로 파고들며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한석 씨의 복수를 돕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아가씨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임필복에 대한 복수를 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리사는 예린에게 서포트를 지시했다. 그런 동시에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리사도 내가 빨리 회복되길 바란 모양이다. 전해듣기로, 지금 리사의 몸 상태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병이 재발한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는 예린이 여전히 함구했다.

정말 내가 회복이 다 된다면 그때까지 자신도 어떻게든 낫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겠노라고 리사가 말했다고 한다. 예린이 전해주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그냥 외면할 수가 없었다. 리사에게도, 예린에게도.... 심지어 우리 엄마에게도 미안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새벽이 다가오고 산언저리에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자,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린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맨 얼굴은 몹시 아름다웠다. 밤사이에 보았던 그녀의 새로운 표정을 모두 기억한다.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에는 작은 기척에도 모조리 반응하던 그녀였다. 정말 깊이 잠이든 건지, 아니면 나의 하산을 방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나올 때 그녀의 재킷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그녀의 차 키와 약간의 돈이 들어있었다. 산을 벗어나 근처 도로에 세워둔 예린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푼다. 기어를 변속한다. 핸들을 틀어 서울 방향의 도로에 차를 올렸다. 액셀을 밟았다. 예린에게는 몹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가야 한다.

한참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가지고 온 서류철에는 필복이 다니는 회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차를 몰고 근처에 가서 잠복을 시작했다. 녀석을 미행하다가 혼자 있게 되면 반드시 처리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한다. 시간이 흐르고 녀석의 차가 회사 주차장을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 바짝 붙지 않게 주의하면서 녀석의 뒤를 따른다. 도심으로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녀석의 차는 외곽으로 향했다.

도심을 벗어난 필복의 차는 조금 더 외곽지역으로 나아가 어떤 주택가에 도착했다. 몇 번이고 놓칠 뻔했으나 간신히 따라붙었다. 단독주택이 있는 집 앞에 차를 세우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떨어진 골목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려 녀석이 들어간 집을 확인한다. 단층짜리 양옥이었는데 좁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주위를 확인하고 뒷담을 넘어간다. 매일 같이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던 바위 절벽에 비하면 여긴 장애물도 아니었다. 단숨에 매달려 후다닥 뛰어넘는다. 자세를 낮추고 집으로 다가간다. 커튼이 쳐진 창 가까이 붙는다. 몸이 많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창 안의 동정을 살폈다. 거실인 모양이었다. 필복이 소파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만약 녀석이 혼자 있다면 집으로 쳐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내부의 소리를 들어 보기로 했다. 몸을 옮겨 환기구 쪽에 귀를 바짝 대고 있자니 희미하게나마 안의 소리가 들려온다. 필복이 부엌 쪽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응? 허허허."

너털웃음. 그러나 그 웃음이 나에겐 너무도 소름 끼치게 여겨진다.

"이리 좀 와서 앉지? 간만에 보는 건데 와서 서비스도 좀 해주고."

태도를 가만히 보니 옷도 벗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기 집이 아닌 모양이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디지? 누구한테 말하고 있지? 말투가 엄청 편한데?

"아직 규호 오려면 시간 좀 있는데 한 판 뒹굴고 있을까? 응? 어때?"

느글거리는 저 목소리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나저나 규호라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던 나는 멈칫했다. 설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이름이 맞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을 옮겨 거실 창문을 벗어나 부엌 쪽 창으로 다가간다. 작은 창이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각도가 좋지 않다. 간신히 자세를 바꿔보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나.....

너와 나는 대체 어떤 연으로 맺어진 걸까. 이것이 단순히 우연일까. 우연이 겹치고 겹쳐 이루어진 모양을 세상은 인연이라 부르지 않던가. 난 지금 아찔함마저 느끼고 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순전히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소개팅 상대가 늦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을 원래 만나야 할 사람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자신도 사정이 있었기에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 하룻밤을 함께 보냈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너와 나는 바로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약속도 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들어간 술집 화장실에서 그렇게 마주치고 다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너는 자신의 치부까지 이야기해 버렸다.

그리고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내 옆집에 이사 오면서 말이다. 거기서 결코 잊지 못한 관계를 가졌지만, 너는 다시 내 곁을 떠났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난 그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임필복. 날 죽이려던 그놈을 죽이려고 내가 독을 품고 나선 이 길 위에서 나는 너를 이렇게 다시 마주한다.

어떻게 내가 너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엌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혜였다. 나의 첫 여자.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 내가 처음으로 결혼식에 직접 가서 내 이름으로 축의금을 낸 여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멍해있던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니다. 필복을 죽이려던 나의 필사적인 마음 한편에는 예린이 말해주었던 지혜와 필복의 관계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결국 지혜와 나는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서방님이 부르는데 말야."

필복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싱크대에 서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필복이 지혜의 뒤로 바싹 붙는다.

"또 아랫구멍을 열심히 쑤셔주어야 말을 잘 들을라나? 응? 응?"

녀석의 뱀 같은 혀가 지혜의 목을 핥는다. 녀석의 음탕한 하반신이 지혜의 뒤에 춤을 춘다. 녀석의 두꺼비 같은 손이 지혜의 가슴을 주무른다. 그 터무니없는 장면을 보면서 급격하게 열 받아버린 나는 지금 내 입장을 잊고 창문을 부셔버릴 뻔했다.

"놔."

"어허, 이거 요새 또 안 눌러줬더니 앙탈인감? 응?"

지혜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필복의 능구렁이 짓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지혜의 긴 치마를 슬금슬금 걷어 올리기까지 한다. 그녀의 육덕진 허벅지가 드러나고 팬티까지 필복의 손이 닿자 지혜는 신경질적으로 놈의 팔을 쳐내며 몸을 홱 돌렸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좀 있으면 남편이 올 거야!"

"그래서, 뭐? 니년 남편 오기 전에 빨리 한번 대주겠다고?"

"저리 꺼져. 소리 지르기 전에."

"질러봐, 씨발년아."

필복은 자신의 속내를 전혀 감추지 않고 오히려 지혜를 안을 듯이 팔을 벌리며 다가간다.

"소리 질러 보라고. 여기 날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남편이 있는데도 존나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하고 말이야. 음?"

바들바들 떨리는 지혜의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염된다. 울컥해진다. 지난 시간... 내가 못 보는 곳에서, 내가 없는 시간에서 지혜는 필복에게 대체 무슨 짓을 당해왔을까. 보고 있는 이 장면만으로도 피를 토할 것 같은데 상상이 닿는 그 어렴풋한 무언가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차피 난 저 자식을 죽이러 여기에 왔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할 때를 선택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복 저 자식은 지금 이 순간 죽여야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온 노끈을 더듬었다. 끝부분이 만져지자 꺼내어 한 손에 살짝 감았다. 다른 쪽을 잡아 쥐고 팽팽하게 당겼다. 창문 너머 보이는 필복의 목이 유난히도 도드라져 보였다. 저 목에 이 줄을 감아, 그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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