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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집으로 난입해야 하나, 아니면 필복이 여기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집 앞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필복도 황급히 지혜에게서 떨어져 거실로 돌아갔다. 누군가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형님. 벌써 오셨습니까?"
"허허, 난 시간 맞추어 온다고 왔는데 말야."
"하하하, 제가 좀 늦었죠? 자기야. 음식 준비 다 됐어?"
지혜의 남편, 규호는 필복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부엌으로 들어와 지혜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지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을 맞이한다.
"으응... 거의 다 되었어."
"중요한 분이니까 맛있게 좀 부탁할게."
"..........알았어."
고개를 숙이는 지혜의 어두운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규호는 거실로 돌아가 필복과 환담을 나누었다. 곧이어 지혜가 차린 상이 차려지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몸이 다 저릴 지경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대략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필복의 회사에서 최근 노후화된 차량 교체가 대대적으로 있을 예정인데 거기에 규호를 참여시킬 모양이었다. 거들먹거리며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필복 앞에서 규호는 사막에서 물장수라도 만난 모양으로 크게 기뻐하며 꺼뻑 죽는 시늉까지 한다. 필복도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술이 한참 들어가고 나니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심히 눈꼴시어진다. 심지어 지혜에게 술 좀 따라보라고 권하면서 옆자리에 앉혀 허벅지를 탕탕 내리치기까지 한다. 남편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콱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더 가관은 그다음이었다. 어느 순간 규호는 술이 꽤 올랐는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렸고 필복은 노골적으로 지혜를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혜가 모르는 척 몸을 빼거나 손을 쳐내는 식으로 필복을 거부했지만, 규호가 코를 골기 시작하자 숫제 옷이라도 벗길 요량으로 덤벼들기 시작한다.
"왜 이래!"
지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필복을 밀어내었지만, 그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한 번 더어!"
"놔, 놓으라구!"
두 사람은 식탁에서 물러나 소파에서 악다구니판을 펼친다. 그러나 지혜가 녀석의 힘에 눌리어 치마는 반쯤 벗겨지고 윗도리는 목 부분이 늘어나 덜렁거린다.
"미쳤어? 이러다 남편이 깨면 어쩌려고?"
"씨발. 깨보라지. 내가 꿀릴 게 있을 것 같아?"
"뭐?"
"말마따나 내 한마디면 니 남편 연봉의 자릿수가 달라지는데.... 게다가 좀 있으면 승진심사라며? 응?"
"더러운 새끼."
그러나 지혜의 손에서 밀어내는 힘이 빠지고 있다. 필복은 지혜를 거의 올라타다시피 한다.
"씨발년아. 진작 이렇게 고분고분 나오면 니나 나나 편하잖아. 왜 이렇게 앙탈이야?"
지혜의 셔츠가 걷어 올라간다. 탐스러운, 아니, 탐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란 그녀의 거대한 유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필복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흐흐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래서 니년을 못 놓겠다니까. 이거 봐라. 존나 먹음직스럽잖아."
녀석의 손 아래 지혜의 유방이 짓뭉개진다. 지혜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때? 남편이 잘 해주냐? 응? 응? 말해봐. 이 걸레 같은 년아."
녀석의 손이 지혜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다. 지혜는 다리를 꼬아가며 저항해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박아주는 게 모자라면 나한테 말하라니까. 니년 보지 맛을 아는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 크흐흐."
지혜의 수난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지혜의 집이다. 만약 내가 난입하여 필복을 때려눕힌다 한들 그 여파는 반드시 지혜에게 미칠 것이다.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남편이라도 깨면 그 감당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저 욕지기나는 광경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주변을 살피던 나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단 뒷담을 넘어 밖으로 나간다. 지혜 집 대문 앞으로 간 다음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필복의 차로 다가갔다. 고급 중형차니 분명 그 장치가 있을 것이다. 주변을 확인하고 손에 든 돌멩이를 높이 치켜든다. 그리고 운전석 쪽 유리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삐익- 삐익- 삐익-
한 밤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알람 소리. 역시 이런 차에는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다. 제대로 먹혔다. 깨져 나간 창을 두고 그대로 몸을 빼내어 골목 어귀로 숨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밖으로 나온 필복은 자기 차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어떤 새끼가!!!!"
사방을 둘러보지만, 그렇다고 내가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녀석이 안달복달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녀석은 있는 대로 화를 내며 열 받아 하다가 결국은 차를 끌고 가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혜의 집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주차해놓은 예린의 차로 갔다. 운전석에 앉아 좌석을 뒤로 제쳤다. 거기서 그렇게 밤을 보냈다. 둥근 달이 날 내려다보는 가운데 앞으로의 일을 열심히 궁리했다.
다음 날,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했다. 시계를 보니 대략 아홉 시 정도 되었다. 오가는 사람을 보고 있다가 사람이 뜸해졌을 무렵 지혜의 집으로 다가갔다. 대문 앞에 달린 인터폰을 누른다. 전자음으로 된 짧은 시그널이 흐르고 곧이어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나야. 한석이."
다소 지지직거리는, 소리 품질이 영 좋지 않은 인터폰 너머로 지혜의 침묵이 느껴졌다. 한참 만에 그녀가 말문을 연다.
"어쩐.... 일이야?"
"할 말이 있어."
"연락을 하지 그랬어. 어떻게 여길 알고...."
지혜로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나에게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사는 곳을 찾아온 옛 남자에게 경계심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로서도 이런 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 몹시 의외였기에, 날 이곳으로 인도한 녀석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임필복, 그놈에 관해서야."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찌잉- 소리는 분명 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이르자 지혜가 문을 열고 나온다. 전에 비해 핼쑥해진 얼굴이 몹시 안쓰럽다.
"어떻게.... 알고 있지?"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맞다. 내 정신 좀 봐."
지혜를 따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편에 걸린 웨딩사진이 이곳이 신혼부부의 집임을 새삼 상기시킨다. 거실을 지나가다가 소파를 본다. 어제 필복이 벌이던 추잡스러운 짓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는다.
"커피 줄까?"
"응."
부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타고 있는 지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문득 예전 자취방 맞은편 그녀의 방이 생각난다. 거기서도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끓여주는 커피를 맛보곤 했었다. 커피물이 끓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가 타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 향이 조금 식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내가 임필복의 이름은 언급한 일을 말하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그 사람을 본 적이 있겠구나. 그때 술집에서 내가 그 사람을......."
"아니. 그때가 전부가 아냐."
"뭐?"
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하아.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지혜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네 결혼식 날, 그 날 너가 그놈을 만났을 때.... 나도 있었어."
"그....그래. 기억난다. 분명 넌 그때 복도 앞에서......"
"그래. 필복을 먼저 본 나는 네가 그놈이랑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널 붙잡았던 거야. 물론.... 아무 소용없었지만."
"하아."
지혜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텐데 굳이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난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필복을 찾았어. 주차장에서 녀석을 찾아내서는 말을 걸었지."
"뭐 하러?"
"따지고 싶었거든. 여기 대체 왜 왔는지..... 그렇지만 그놈은 너랑 상관없이 네 남편을 보러 온 거라고 딱 잡아떼더군."
"맞아. 안 그래도........."
지혜는 뭔가 이야기할 것처럼 하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생략된 그녀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뭔데? 이야기해."
"아냐. 아무것도. 그래서? 너부터 이야기해봐."
지혜의 재촉에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녀석과 헤어지고 가려는데....."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다. 부딪히는 순간의 섬뜩함. 죽음처럼 차가웠던 아스팔트. 시야를 뒤덮던 붉은 세상이 새삼 떠올라 몸서리치게 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놈이 나를 쳐버렸어. 차로."
"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만다. 입을 가린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녀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최대한 차분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덕분에 그동안... 병원에서 반년 가까이 누워있었어. 이렇게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모....몰랐어. 한석아. 나는 전혀....."
지혜는 내게 다가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내 무릎에 얼굴을 기대왔다. 두 손으로는 내 손을 꼭 맞잡는다.
"미안.....정말 미안해. 너한테는.... 나 때문에....."
"이러지 마, 지혜야.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다. 눈물로 범벅이 된 지혜의 얼굴을 닦아준다.
"미안....정말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지혜는 꽤나 오랫동안 울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기가 난감했다. 어느새 나는 그녀를 포옹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안고 있으니 예전의 기분이 살아난다. 얇은 티셔츠 너머 그녀의 몸이 물씬 느껴지면서 어떤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느새 울음이 잦아들은 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눈 그다음은 입이다.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로 입이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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