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38화 (33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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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어떤 한줄기 검은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필복을 박차고 지나간다. 그렇다. 그 모습은 도저히 사람의 속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바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스피드다. 바람은 그대로 필복을 몇 번 차서 떨구더니 녀석의 팔 하나를 잡고 무슨 장작 쪼개듯이 무릎에 대고 구부린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사람의 생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이런 소리인가. 귀를 틀어막고 싶지만 팔을 들어 올릴 기운이 없다.

"끄아악!!!"

기괴한 모양으로 꺾인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필복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녀석과는 전혀 반대의 입장인 나로서는 방금 등장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예린!!!!"

그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필복을 내려다 보며 한동안 서 있다가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려 고개만 까딱거린다. 처음에는 날 산 속에 혼자 두고 몰래 내려간 너도 이렇게 만들어 줄까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인사를 한 거였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냐. 정말.... 고마워."

고맙고 미안했다. 이런 순간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녀가 고마웠고 지난 아침 그렇게 그녀를 두고 혼자 떠나와서 미안했다. 바닥에서 신음하던 필복은 필사적으로 예린에게서 벗어나려고 용을 썼다. 그는 악다구니를 외쳤다.

"너는 또 뭐야?!"

"나?"

바닥에 앉은 채로 뒷걸음치던 필복은 등이 벽에 막히자 더는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예린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난 말이지, 이분의 수행원이야. 내가 그분의 곁을 잠시 비운 사이에 네놈이 내 소중한 님께 참 많은 짓을 했다고 하더군."

"내...내가 뭘!"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예린은 필복의 다리 위로 올라탔다. 무릎으로 녀석의 허벅지를 단단히 조여 놓고 손을 뻗어 녀석의 성한 쪽 팔의 손목을 잡더니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일단 하나."

"끄아아아악!!!"

무언가 손꼽아 셀 때는 손가락을 안쪽으로 접지 않나? 예린이 손가락 접는 방향을 반대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차로 치었고."

"끄윽....그...그만해....."

"그리고 두울."

"으아아악!!"

내가 귀를 다 틀어막고 싶을 지경의 비명이었다. 비록 내가 죽이려고 했던 상대이기는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눈물콧물 흘려가며 비명을 지르는 광경은 결코 유쾌한 게 아니었다.

"저분이 아끼는 사람을 괴롭혔으며...."

"제....제발......"

"마지막으로 세엣."

"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나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셋이라고 남은 세 개를 한꺼번에 꺾을 필요는 없잖아. 예린!!!

"이렇게 상처를 입혔겠다."

"으허허어엉... 제발.... 제발.... 선생님.... 살려주십쇼......"

필복의 몸은 축 늘어질 대로 늘어졌지만, 한쪽 팔만은 예린에게 붙들린 채였다. 예린은 놈의 팔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다가와 줄을 풀어주고는 입고 있는 자켓을 벗어 침대에서 벌벌 떨고 있는 지혜에게 덮어준다. 지혜는 겁먹은 얼굴로 나와 예린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필복을 보며 두려워했던 것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일단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괜찮아. 우리 편이야."

다리를 절뚝거리며 예린의 곁에 섰다. 예린이 나를 부축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냐. 내가 고집을 부렸는데, 뭘."

기운만 있다면 예린를 업고서라도 동네 한 바퀴를 돌았을 테다. 고마운 사람은 나인데 예린은 못내 미안해한다. 그녀의 등을 한번 두드려주고 필복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벽에 기댄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는 내 시선을 느끼자 무릎으로 기어오며 내게 매달렸다.

"이보게, 동생.... 아니, 사장님. 아니, 아니, 회장님, 선생님.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는 나에 대한 호칭부터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왜? 아까 하려던 거 마저하지그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는! 사장님께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요! 네에?"

"나 말고, 니가 접근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시는 지혜 근처에도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애써 엎드려 머리를 쿵쿵 찧으며 비는 꼴이 우스웠다.

"어떻게 할까요? 마저 처리할까요?"

예린이 스윽 나서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점심때 먹다 남은 찬밥은 어떻게 먹을까요 물어보는 말투다. 그러자 사색이 된 필복이 더더욱 내게 매달린다.

"사장님. 제발.... 제발.... 이분에게 말씀 좀 잘 드려서....."

방금 전까지는 내게 갖은 욕을 퍼붓던 녀석이, 몇 번 얻어맞고 나더니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우습기 짝이 없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이런 하찮은 놈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허무해졌다. 난 발로 녀석을 살짝 밀어버리고 지혜 쪽을 돌아보았다.

"너한테 다시는 접근 안 한다는 다짐만 받고 살려 보낼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일까?"

자랑은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 정말 그를 죽이려했다가 실패했다. 그렇지만 새로 등장한 분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걸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필복이 공포에 질려 울부짖느라 방안이 좀 시끄러웠다. 예린이 그놈을 발로 차서 조용히 시키는 동안 지혜는 필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날, 그놈과의 옛 일을 떠올리는 걸까. 아니면 치욕스러웠던 시간을 떠올리는 걸까. 나로선 알 수 없다.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한참 동안 있던 지혜는 고개를 들어 날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다짐만 받아. 나....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까.... 너무 끔찍했어."

아까라고 한다면 예린의 숫자세기 놀이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를 죽이려고 목을 조르던 순간을 말하는 걸까.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의를 품는다는 것, 그게 그 정도로 끔찍한데 하물며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다. 예린에게 말했다.

"죽이지는 말자. 정신을 차리면 다시는 안 그러겠지.“

"원래 이런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만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합니다. 또, 벗어나고 나면 예전보다 더 흉악해지죠.“

"그런가...?"

"정 죽이기 싫으시다면 보험만 하나 들어두겠습니다."

"보험?"

예린은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 필복과 마주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임승현. 맞지?"

필복의 울음이 뚝 그쳤다. 임승현? 누구지? 우는 아이 달래는 곶감 브랜드인가?

"그....그걸 어떻게!!!"

방금 전까지 얻어맞으며 고함지르느라 벌겋게 달아올랐던 필복의 얼굴에서 핏기가 쫙 빠졌다. 대체 누구 이름이기에 저렇게까지 반응하나 싶었는데, 지혜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도 아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예린은 천천히 뜸 들이며 말했다.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에서 여자를 하도 많이 건드려서 감방에 많이 들어갔다 나와서 취직이 안 되는 놈이 하나 있어."

예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필복의 귀에 똑똑히 꽂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필복은 지금 필사적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도 그런 질 낮은 녀석은 좋아하지 않아. 일단 쓰레기 같은 놈이라 버려두고 있었는데, 요즘 환경이다 뭐다 해서 재활용 많이 하잖아? 내가 그 쓰레기 같은 녀석의 재활용 방안을 생각해봤어."

예린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가 말을 멈출 때마다 필복은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놈에게 내가 일을 줬지. 온종일 임승현 뒤를 쫓아다니는 게 이제부터 그놈 일이자 그게 녀석의 직업이야. 아침 일찍 영어 학원 나가느라 새벽, 그 아무도 없는 시간에 집을 나서고 저녁에는 무슨 동아리인가 다니느라 밤늦게 온다면서? 그렇게 에쁘게 생긴 아가씨가 혼자 다녀서야 되겠어?"

예린의 말을 듣고 승현이라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눈치 챘다. 예린의 말을 들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필복을 보고 있노라니 참 허무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 딸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걸 아는 녀석이 지혜에게 그런 짓을 해? 역겨움에 토할 것 같다.

"일단은 말이야. 그냥 아가씨가 잘 다니는지, 새벽길이나 밤길이 안전한지 아닌지 매일매일 관찰해서 나한테 보고 하는 게 녀석의 일이야. 그치만 말이야. 여태까지 나쁜 짓을 많이 했던 녀석이라서 말이야. 응? 나도 일단은 그 아가씨한테 손대면 너도 죽는다고 말은 해뒀는데 말이야. 내가 만약 월급 주는 걸 멈추면... 녀석이 내 말을 들으려나?"

"아이고, 선생님. 승현이 걔만은 제발.....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한 애입니다.... 제발요...."

"그저께 녀석이 나한테 아주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내줬는데, 얼굴도 아주 예쁘더라고. 몸매도 좋고...."

"아이고, 선생님.... 제발요. 제게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딸입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영문도 모른 채, 성범죄 전과자에게 매일매일 미행당하고 있는 한 아가씨를 생각하니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승현이라는 아가씨는 아마도 지혜나 나와 비슷한 또래인 모양이다.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인 지혜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한 짓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한 짓을 알고 있을까. 설령 알고 있다, 모른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죄를 그녀가 떠맡는 게 온당할까 싶었다. 예린의 협박은 정말이지 잔인하면서도 무도했다.

딸의 이름과 구체적인 일상을 들먹이는 협박범은 다짐하듯 말했다.

"잘 생각해."

"여부가...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손 모아 싹싹 비는 필복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니 딸년이 소중하면, 너부터 똑바로 하는 게 좋아."

"맞는 말씀입니다.... 네........"

가족을 인질로 삼아 상대를 철저하게 굴복시키는 예린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이런 짓, 그러니까 난데없이 쳐들어와 누군가의 팔과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그의 가족사를 늘어놓으며 조용히 협박하는 일이 너무도 익숙해보였다. 사람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 방법을 논하던 그녀였다. 새삼 그녀의 검은 옷이 오싹해보였다.

이대로 땅 파고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자세인 필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지혜를 데리고 방을 나선다. 예린은 바닥에 떨어진 문을 줍더니 문틀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그렇게 문을 닫기 전 방바닥에 앉아있는 필복에게 한마디를 더 남겼다.

"그리고 대물물산. 조금 있으면 자금 회수에 들어가니까 부도내기 싫으면 빨리 회사로 가보는 게 좋을 거야."

"네에?"

필복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지만, 예린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이제 저 새끼를 볼 일은 두 번 다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박자 늦게 필복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숫제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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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에 따라 박 회장의 후계자 또는 김 회장의 후계자가 되는데, 이중에서 어느 게 더 재력, 권력이 크냐...라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음.

일단 재력 사이즈에서는 박 회장이 훨씬 압도적입니다만

(더블데이트 세계관에서의 JS그룹은 일단 현실세계의 S그룹, H그룹, D그룹 세 곳을 합친 것 정도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권력, 그중에서도 나쁜짓까지 할 수 있는 권력을 포함하면 김 회장 쪽이 더 어둠의 세계에 가깝고 강력한 편이다... 뭐, 이렇게 산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박 회장 쪽은 돈의 힘이고, 김 회장 쪽은 몸의 힘이랄까요. 다만 박 회장은 재력을 바탕으로 각 방면에 끈이 닿아있고, 정재계에 손을 뻗치고 있다면 김 회장은 부산-경남 지역 한정이지만 거의 밤의 지배자이고, 야쿠자까지 손이 닿아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써놓고 보니 어딜 봐도 둘 다 훌륭한 악당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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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번 루트는 340회에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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