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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39화 (33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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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4

지혜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다. 사실 나도 몸이 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지혜가 더 안쓰러워 보였다. 모텔 밖으로 나가니 예린이 차를 가져왔다. 지혜와 함께 뒷자리에 올라탄다. 온몸이 욱신욱신 하니 안 아픈 곳이 없다. 예린에게 일단 지혜의 집 위치를 말해주었다. 왠지 말 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차가 출발했다. 운전 중인 예린의 뒷모습을 보며 물어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한석 씨라면 필복을 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서울에 와서 놈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이 모텔에 들어온 것까지는 알았는데 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시간이 좀 지체되었습니다."

그렇다. 예린이 난입하기 직전 필복에게 걸려온 전화는 아마도 그녀가 돌입하기 직전 시행한 최종확인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와줘서 고마워. 여러 가지로."

"감사는... 됐습니다. 대신, 나중에 리사 아가씨한테 말 좀 잘해주십시오."

"리사?"

대답이 없었다. 예린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던 매사에 주저함이 없이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인 그녀다. 대답을 주저한다는 사실이 그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해봐. 리사가 왜?"

예린은 한참 대답을 주저하다가 차 속도를 약간 늦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저는 지금 리사 아가씨의 호출을 무시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뭐?"

나도 모르게 바로 어제 있었던 예린과의 밤이 떠올랐다. 내 품에 안긴 예린은 내게 말했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겠다고. 리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 나를 따라야 하는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무모할 정도로 대책 없고 가망도 없는 내 복수극이 엉겁결에 마무리된 건 사실 예린이 다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부산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송 부장이..."

뭔가 더 이야기하려던 예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내 옆에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지혜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몰라도, 지혜는 예린에게 있어서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예린 씨. 괜찮아. 지혜는... 계속 이야기해봐."

예린은 룸미러로 지혜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속한 조직의 오야, 즉, 보스인 김 회장이 있고, 그의 심복으로 송 부장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고 했다. 리사와 마리는 김 회장의 딸인데, 조직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마리와 달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조직 일에 사사건건 개입해 온 리사의 존재는 송 부장이 퍽 꺼린다고 했다.

"송 부장은 여태까지 리사 아가씨가 그냥 계집이라고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만... 이번에 곧 출산을 치르고 나면 조직의 후계 구도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바뀔 거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대물물산 자금 압박에 들어가느라 다른 조직의 협조까지 얻어내는 걸 봤으니 이젠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래. 리사가 대물물산을....."

이로써 필복은 몸이 거덜 난 건 물론이고 사회적 기반도 거덜이 나게 생겼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조금 전 예린의 말에 섞여있던 익숙지 않은 단어를 깨달았다.

"자, 잠깐! 출산이라니!!!"

차가 멈췄다. 너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난폭하게 차를 세운 예린은 무심한 어조로, 그러나 몹시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와 제법 오랜 시간을 지내온 나는 이게 그녀의 당황한 말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치미를 뚝 떼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니 뒤에서 목이라도 졸라서 다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내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 말로만 항의했다.

"방금 리사가 출산 어쩌고저쩌고 했잖아!"

"제가 언제요?"

"방금!"

"그게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정확히 설명을....."

그러자 여태 가만히 있던 지혜가 헛기침을 한다.

"저기, 예린 씨라고 했던가요? 저도 들었어요."

"........이런."

예린은 혀를 끌끌 찼다.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석 씨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결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암튼 다음 달이 출산 예정일입니다."

"리....리사가? 임신을....?"

단 하루 밤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그 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설마?

"설마..... 내 아이를?"

"예."

시원스럽게 인정해버리는 예린은 내가 더 안달나기 전에 부연 설명을 한다.

"그리고 엄격히 말하자면,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입니다. 쌍둥이거든요. 지난번에 초음파 사진 찍어 보니 아이들은 무척이나 건강하답니다."

"뭐? 왜 그런 이야기를 여태 안 한 거야?"

여태 리사와 했던 통화를 떠올려본다. 힘겨워하던 목소리이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일언반구 없었다. 내색도 없었다.

"솔직히... 리사 아가씨가 몸이 상당히 약해져 있어서 제대로 출산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도 모릅니다. 병원에서도 아가씨를 말렸지만, 막무가내셨습니다. 거기다 한석 씨 사고가 났을 때는 춘천까지 가서 밤을 새워가며 노심초사 하느라 몸이 더 약해졌죠. 결국 부산으로 실려 돌아온 리사 아가씨는 자신이 병원에 있는 모습을 한석 씨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날 못 오게 하다니! 말이 돼?"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기가 막혔다. 난 또 무슨 전염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정말 그런 이유라니.... 그러나 옆에 있는 지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약한 모습 같은 건 보이고 싶지 않거든. 나도 그랬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일절 말도 없이...."

예린은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운전할 때는 앞을 봐, 이 여자야!

"그러기에 제가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몇 번씩 조언을 드렸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리사 아가씨를 정말 보고 싶으셨다면 절 때려눕히고서라도 가셨어야죠."

"......내가 예린을 때리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나 싶어서 묻자 이번에도 예린은 시원하게 대답한다.

"제 반격을 맞고 쓰러져서 다시 반년은 요양하셔야 했겠지요."

"하아."

옆에 있던 지혜가 쿡- 하고 살짝 웃었다. 예린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사실 애비 없는 아이를 배었다고 아버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거의 의절해버린 터라... 지금 리사 아가씨 곁에는 한석 씨 어머님과 마리 아가씨만 계십니다."

"대체......"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기댄다. 옆자리의 지혜를 돌아본다.

"미안하다. 지혜야. 일단 너 내려주고 난 부산으로 바로 가야겠어.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어쨌거나 축하해. 잘 되길 바라."

"축하? 그.....그렇겠지?"

실감이 전혀 나질 않는다. 리사가 애를 낳는다고? 그것도 쌍둥이를? 게다가 내가 그 아이들의 아빠? 아침나절까지 총각이었던 나는 졸지에 애 둘 딸린 남자가 되어버렸다. 할 말이 없다. 이게 뭐야, 대체.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놀란 건지 ... 아니면 그 셋 다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인 채로 끙끙거리는 동안 지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리사라면, 마리의 언니 맞지?"

"응? 으응...."

그러고 보니 지혜는 마리는 알아도 리사를 본 적이 없다. 아마 마리에게서 이야기로 전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날 바라보는 지혜의 표정이 야릇했다.

"마리랑 어떻게 잘 되는 건가 싶었는데 언제 또 그 언니를 꼬셨다니?"

"꼬...꼬시다니."

굳이 따지자면 내가 아니라 리사가 날 꼬신 것 같은데. 아악.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날 보던 지혜가 피식 웃는다.

"누군지는 몰라도 널 엄청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그랬지."

"지금 생각났다. 네 축의금 봉투에 부부명의로 내는 것처럼 나란히 쓰여 있던 이름이 아마 그거였던 것 같네. 맞아. 그랬어."

"그런 일도 있었지."

그리고 그 전날에는 날 꼬셔서 잠도 잤고 거기서 애도 가져서 지금 좀 있으면 낳는다고 그러고. 아아. 리사. 널 미치도록 보고 싶구나. 일단 보면 뽀뽀도 해주고 싶기는 하지만 한번 꼬집어 주고 싶기도 하다. 얄미운 이 기집애. 혼내주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할 것 같다.

"조금 샘 나."

".....응?"

리사 생각을 하느라 지혜의 말을 제대로 잘 듣지 못했다. 지혜는 내 쪽을 돌아보며 살포시 웃었다.

"유부녀가 이런 생각 하면 안 되겠지?"

"아....아마도."

"그래도 한석아."

"응?"

"고마워."

그녀의 입술이 내게 다가온다. 예린 쪽을 의식한 난 잠시 멈칫했지만, 그래도 지혜의 부드러운 입술을 잠깐이나마 즐겼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너는.... 날 만난 게 어땠는지 몰라도, 난 널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그녀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게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어떤 전환점이었는지 아직 말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평생 말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지혜야...."

"정말이야. 그 날 카페에서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너를, 네 모습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그 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술에 취해 마구 난장을 피우던 그녀. 나를 모텔로 이끌고 갔던 그녀. 콘돔을 꺼내고 수줍게 몸을 가리던 그녀. 그러나 이젠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다른 여자에게 묶인 내게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린 이제 서로 다른 곳에 속해있어. 난 내 남편에게 돌아가야 하고 넌 널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야지."

"그래."

어느새 지혜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지혜를 따라 내렸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지혜가 고개를 젓는다.

"여기까지면 됐어. 네 덕분에 모든 게 잘 해결되었으니 앞으로 내 걱정은 하지 마 ...."

"그래도 그 차림으로 괜찮겠어?"

"괜찮아. 아직 남편은 안 왔을 거야. 얼른 들어가면 돼."

"그래."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지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소 물기 있는 목소리로 날 올려다보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딱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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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 이번 루트의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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