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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들어가며 ────────────────────
이하 스토리는 더블데이트 루트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며 본편의 등장인물과 시간, 사건만 차용한다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외전에서의 모든 이야기는 본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고 진행됩니다.
───────── 더블데이트 외전 < 카페 미리내 >
은미는 그 남자가 조금 신경 쓰였다. 몇 주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그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커피를 시켰다. 오는 시간은 늘 오후 4시 15분. 매일 오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니 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 주 화요일도 왔었다. 오늘은 목요일. 시계를 올려다보니 3시 5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오려나?'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괜히 입구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굳이 이 가게에 그 남자가 항상 오는 이유가 뭘까? 설마.....?'
남에게는 이야기 못 할 핑크빛 상상을 조금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괜한 생각이겠지.'
자의식 과잉이다... 라고 생각했다. 시내도 아닌 아파트 상가 한 켠에, 그것도 그리 큰 브랜드 체인점도 아닌 동네 카페 "미리내". 하루 몇 명 오지 않는 조그만 가게다 보니 손님이라고 해보아야 그 면면이 일일이 파악되고도 남음이다. 오전에는 애들 학교나 유치원 보낸 주부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희들끼리 수다를 떨며 커피와 무료 제공 쿠키를 축낸다. 오후에는 보험 상담이나 다단계 판매원들이 죽치고 있는 거 빼고는 지극히 한가하다. 저녁이나 되어야 메뉴 하나 시켜놓고 자리보전하는 학생 커플이나 가볍게 맥주 한 잔 더하려는 이들로 사람이 좀 찬다. 그중 한가한 시간인 오후에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이다 보니 저절로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다. 은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도 브랜드 커피일까.'
시침이 4에 도달하고 있는 걸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 머신으로 다가갔다. 압력을 체크하고 물을 조금 보충했다. 아까 점심시간에 왔던 손님들 이후 머신이 쉬고 있었기에 온도를 미리 맞춰둘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 남자가 오늘도 제 시간에 온다면 말이다. 예쁜 꽃이 그려져 있는 종이 컵받침과 밋밋한 문양이 새겨진 머그컵을 쟁반 위에 세팅해둔다. 밀에 커피콩을 조금 넣어 두었다. 최근에 콩을 바꿨다. 예전까지는 케나 몸바사를 사용했는데, 커피콩 영업사원을 추천을 받아 브라질 세라도로 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는 사장 - 그러니까 가게에 잘 들르지도 않고 장부만 확인하는 엄마의 타박을 받기도 했지만, 은미는 고집을 피웠다.
'그래도 향은 이게 더 좋은 것 같아.'
애초에 난데없는 엄마의 변덕 때문에 시작한 카페였다. "우리나라도 이제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앞으로 고급 커피를 찾는 시대가 올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지론을 늘어놓으며 비싼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들여다 놓았다. 오빠나 아빠, 다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은미는 여태까지 엄마가 했던 일 중에서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부러 나와서 일을 하겠다고 한 것도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가고 싶지도 않은 대학을 굳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억지로 야간에 밀어 넣은 아빠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내색은 크게 못 했다. 거절 못 하는 그녀의 성격 탓이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역시 그였다.
"뭘로 드릴까요?"
"커피 주세요."
역시....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페 메뉴 중에서 커피만 해도 열 종류가 넘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커피가 무엇인지 아는 그녀는 굳이 재차 확인하지 않는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나 있었다. 밀 손잡이를 돌려 분쇄된 커피 가루를 내리고 홀더에 담았다. 손가락으로 훑어 양을 맞추고, 머신에 털어 넣는다. 압력과 온도를 확인한 후, 스위치를 넣자 그아앙- 하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함께 원액이 추출되기 시작했다. 눈금이 표시된 컵에 담긴 생수를 부어 정확한 양을 맞춘다. 스포이트로 시럽 한 방울을 딱 떨구곤 유리로 된 스틱으로 딱 한 번 휘젓는다. 꺼낸 스틱의 끝에 혀를 살짝 대본다.
'좋아.'
출장 가는 삼촌에게 부탁하여 외국에서 나온 바리스타 전문잡지까지 읽었던 그녀였다.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연구를 거듭했다. 커피의 양이라든가 물의 온도라든가.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커피 자체가 가지는 향과 그 풍미가 좋았다. 그렇기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네 카페의 브랜드 커피지만 그녀 나름의 애착이 담긴 커피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온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그가 있는 자리로 향한다. 오늘도 뭔가 어려워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은미가 책의 내용을 읽은 건 아니었지만, 슬쩍 보아도 페이지 안은 영어와 이상한 수식 등으로 가득했다. 은미가 바로 곁에 올 때까지, 그는 꽤 집중해가며 읽고 있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그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그제야 고개를 든 그는 그녀 쪽은 보지도 않고 커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잔을 잡고 나서야 자신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상대를 확인하고 눈인사를 건넸다.
"아,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개까지 꾸벅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책으로 넘어가버린 터라 그녀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쟁반을 품에 안고 돌아오면서 뒤를 살짝 돌아본다. 한 손에는 책,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들은 그가 잔에 살짝 입을 갖다 댄다. 은미 생각에는 커피에 좀 더 집중을 하면서 그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셔주면 좋겠는데 그는 마치 도서관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마시듯이 대충 마시고 있었다. 조금 맥이 빠졌다.
카운터와 바를 겸하고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나오고 있는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녀 혼성 밴드의 앨범 하나를 꺼내 CD체인저에 넣었다. 지난번에 남자친구가 사다줬는데 들어 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남자친구가 준 선물 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았다. 로딩이 끝나자 가냘프면서도 호소력 짙은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볼륨을 조금 낮추었다.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박자에 맞추어 발을 까딱여 본다. 그리고 남에게는 결코 안 들릴 목소리로 아주 조그맣게 따라 불렀다.
"Oh, 바라보네
아무런 생각 없이
나의 머리위로 떠다니는
어두운 그림자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괴로움이 아니야
외로움이 아니야
Delight ~ Delight In My Heart Delight..."
수줍음이 많은 그녀인지라 작년까지만 해도 노래방에 가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가자고 몇 번 꼬셨지만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청천벽력의 재앙과도 같은 일이라 한사코 거절하곤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같이 놀러 가자는 제의를 받을 만큼 동기들이랑 친하질 못했다. 그런 성격의 그녀였기에 올해 초에 남자친구가 생긴 것만 해도 정말 놀랄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입생의 티를 조금 벗었다고 느끼는 1학년 말, 자신은 전혀 생각치도 않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고백을 받고 갑작스레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시 종이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구 쪽을 향해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그 교복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 부속고등학교의 교복이다. 깜찍하니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겼고 얼굴도 작고 뽀얗다. 교복만 아니라면 중학생, 아니 국민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 했다. 그녀는 이 얼굴도 알고 있다. 항상 저 남자가 오는 날이면 말미에 따라붙는 녀석이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몹시 친근한 걸로 봐서 아주 친한 사이거나 아니면 동생인 듯싶었다. 가끔은 투닥거리기도 하는데 워낙 여자애 쪽이 귀여워서 그냥 애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애가 들어오고 나면 남자는 항상 곧바로 나간다. 아무래도 그가 이 가게에 오는 까닭은 저 여학생을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 같다. 카운터 앞에 온 남자가 물었다.
"얼마죠?"
"삼천오백 원입니다."
오천 원권을 받고 천오백 원을 거슬러 주었다. 잔돈과 영수증을 받아든 남자가 가게를 나갔다. 그런데 아까 그 귀여운 여자애는 나가지 않고 카운터 앞에 서서 은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애의 표정이 귀여워서 웃으면서 물었다.
"왜? 너도 주문하게?"
"아니요. 그냥 좀 보려구요."
"뭘?"
여자애는 마치 공항 출입국 심사대의 요원처럼 은미의 상반신을 훑어보았다. 별생각 없이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여자애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이내 깨달았다. 은미는 얼굴을 붉히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그녀의 콤플렉스인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다. 은미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여자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하아. 이 아저씨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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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이 꼭 한석이 이야기라는 법은 없지요. 한석이 이야기 아니라는 법도 없구요.
본편 몰라도 그냥 읽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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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미리내>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카페 웨이트리스 이은미입니다.
메인 루트에서 유진이 이 아가씨를 두고 한석에게 했던 말이 있으니 찾아보시면 쏠쏠한 재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