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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은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여자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닫힌 유리문을 통해 남자와 여자애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여자애는 남자에게 뭔가 따지듯이 묻고 있었고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문 너머의 일이라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양새가 그러했다. 저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혹시 방금 여자애가 응시하던 자기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설마 하는 생각에 은미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빨리 식힐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난감하리라.
딸랑- 탁-
문에 달린 종은 유리에서 조금 떨어져 매달려 있다. 문을 살짝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방금처럼 거칠게 확 밀고 들어오면 종이 울리다 말고 유리에 부딪혀 저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어서.... 아, 가람이구나."
그녀의 남자친구, 최가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남자친구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는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하고 반가운 목소리 대신 불평을 시작했다.
"응? 어제 내가 준 옷은 왜 안 입고?"
"아이 참. 그건 너무...."
가람은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 들어와 은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는 은미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왜 그렇게 맨날 이런 티셔츠만 입어. 바지 말고 치마 없어?"
"난 이게 편하단 말야."
"에이, 그러지 말고오. 응?"
사귄 지 반년이 되어간다. 은미는 아직도 자신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적응이 안 되고 있지만, 가람은 은미를 조율하는 방법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르듯 말하면 그녀의 성격상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은미는 가람의 재촉에 도무지 이기질 못한다.
"이따 나가서 입은 거 보여줄게. 지금은 가게잖아."
"치이. 난 가게에서 입으라고 사준 거란 말야. 응? 그러지 말고... 자기야. 응, 응?"
남자치고는 그리 큰 키도 아니고 조금 선이 여린 편이라 저런 식의 애교도 봐줄만 하긴 하다. 은미는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아. 알았어. 잠깐만 카운터 좀 보고 있어줘."
남자친구랑 사귀면 다들 이런 걸까. 은미는 궁금했지만, 처음 사귀어보는 것이기도 하고 누구에게 따로 물어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고개를 흔들며 가람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안쪽에 있는 다용도실에 들어간다. 한쪽에 놓인 쇼핑백을 들어 올린다. 그 안에는 어제 가람이가 가져다준 '옷'이 들어있었다. 한번 꺼내보고 도저히 입을 엄두가 나질 않아 그대로 넣어두기만 한 거였다.
일단 셔츠를 벗었다. 그녀의 어깨넓이와는 전혀 맞지 않는 XXL의 박스티다. 전면에 인쇄된 그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색깔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검은색이었지만, 그녀의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항상 입는 옷이었다. 셔츠를 벗자 하프 컵 브래지어에 담긴, 말 그대로 터질 듯한 풍만하고 거대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개를 내려 보아도 자기 발끝이 보이지 않을, 그런 크기였다. 은미는 마지막으로 샀던 브래지어 사이즈를 기억하고 있었다.
70H.
고등학교 때 차고 있던 브래지어가 잘 맞지 않아 늘 가슴이 아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속옷가게로 가서 브래지어를 새로 사줬다. 그렇지만 국내 제품 매장에는 그녀의 가슴에 맞는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백화점에 있는 수입속옷 가게로 데려가 주었다. 거기서 직원이 직접 재어준 사이즈가 언더바스트 둘레가 70에 컵사이즈가 H로 나왔다. 직원은 호들갑을 떨며 이 정도면 자기네들도 현재 가지고 있는 기성품은 없고 주문을 하셔야만 한다며 카탈로그를 펼쳐보여 주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속옷들은 하나같이 난리도 아닌 디자인이라 은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무늬가 적은 걸로 주문했다. 그 후로는 그것 말고 다른 브래지어를 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잡지 같은 데서 귀엽고 예쁜 속옷들을 봐도 한숨이 나올 뿐이다. 자신의 사이즈는 도무지 나오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그녀는 항상 지금처럼 펑퍼짐한 티셔츠로 상체를 가리고 있었다.
지금껏 그래온 그녀인데... 남자친구인 가람이 가져다준 옷은 하필이면.....
"속옷도 꼭 갈아입어. 응?"
"꺄악!!"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셔츠로 앞을 가렸다. 문이 조금 열려 있고 가람의 얼굴이 쑥 들어와 있었다.
"뭐...뭐 하는 거야. 얼른 저리 가."
"참나. 내가 무슨 치한이야? 자기 애인한테 몸 좀 보였다고 그렇게 막 비명을 질러?"
"그....그래도....."
은미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가람은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은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내가 사온 건 속옷까지 전부 세트야. 그걸 다 입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얼른.... 나가."
이미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뒤로 갈 수는 없었다. 가람의 몸이 문을 거의 통과할 무렵 밖에서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미는 한 손을 내뻗어 맹렬하게 흔들었다.
"소...손님 왔다! 얼른 나가 봐!"
"쳇. 알았어. 암튼 꼭 제대로 입어야 돼?! 응?"
"알았다니깐!"
소리를 빽 질러 가람을 물리친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의 행동은 늘 돌출적이고 그녀의 예상 범위 밖에 있어서 참 곤란했다. 스킨십은 물론이요 남자 자체에 대한 면역이 없는 은미인지라 가람의 이런 행동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번 노래방에서도 그렇고....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사오는 걸까.'
쇼핑백에서 꺼낸 옷을 펼쳐본다. 지난번에는 엄청 짧고 딱 달라붙는 미니스커트와 이상하게 길쭉한 양말을 사와 입으라고 졸라대더니 이번에는 아예 속옷부터 겉옷까지 세트인 물건이었다. 입을 엄두가 도무지 나질 않지만, 그렇다고 안 입었을 경우 삐지고 재촉하는 남자친구를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내 결심을 내린 그녀는 손을 등 뒤로 돌려 후크를 풀어냈다.
옷을 모두 꺼내놓고 책상 위에 펼쳐보았다. 무슨 용도인지 모를 화려한 옷이었다. 전체적으로 분홍과 흰색이 조화된 상하의였다. 하의는 치마였는데 어찌 보면 외국영화에서 나오는 웨이트리스가 입는 복장 같았다. 가람은 메이드니 어쩌니 했지만, 은미로서는 통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주름이 가득 잡힌 분홍색 치마는 나쁘지 않았지만, 입어보니 굉장히 짧았다. 입고 나서도 팬티를 살짝 덮는 정도랄까. 함께 동봉된 팬티가 그나마 속바지 같이 되어있는 모양이라 같이 입으니 그럭저럭 입을 순 있었다. 상의도 전체적으로 분홍빛이었는데 이걸 입고 나니 가슴의 윗부분이 상당히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포함된 브래지어도 일반적인 밴드 형태가 아니라 뒷부분도 끈이었고 위로는 홀터넥 스타일로 묶게 되어 있었다. 즉, 브라의 반 이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양. 허리 아래로는 앞치마를 두르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레이스가 가득 달려있고 살짝 반투명한 재질이어서 원래 그녀가 카페에서 일할 때 두르는 검은색 무지 앞치마처럼 실용적인 형태의 앞치마는 절대 아니었다.
은미는 그것을 입고 책상에 놓인 손바닥만 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아직 쇼핑백에는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팔토시나 헤어밴드 같은 데 더 들어있었다. 이걸 입고 카페에서 일을 하라고? 가슴의 반절 이상은 앞으로 툭 튀어나오듯이 드러나 있고 엉덩이는 짧은 치마로 간신히 가려질 정도다. 치렁치렁한 차림이라 어디 닿거나 기계 스팀에 지저분해지기 딱 좋았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자신의 원래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람이 선물한 옷은 차곡차곡 개어 쇼핑백에 다시 담았다. 혹시나 싶어서 태그를 떼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니 가람은 바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걸 봐서 아직 주문도 안 받은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은미가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오자 가람은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그는 은미에게 다가왔다.
"뭐야. 내 옷은 어쩌구?"
"이따 이야기해."
은미는 가람을 제치고 손님 앞으로 갔다. 여대생으로 보이는 그 손님은 카페오레 한 잔을 주문했고 은미는 곧바로 커피 만들기에 돌입했다. 등 뒤에서 가람이 계속 툴툴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커피가 다 만들어지고 손님이 받아서 창가 자리로 옮겨갔다. 가람에게 무언가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데 원래 아는 사이 같지는 않았다. 손님이 자리로 돌아가자 가람은 은미에게 다가와 강한 어조로, 그러나 낮은 소리로 항의했다.
"아, 진짜.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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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 인기가 좋았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메인 히로인으로 넣을 걸...
암튼 340회에 투표 아직 안 한분들은 꼭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