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44화 (34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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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은미는 입을 딱 벌렸다.

"뭐....뭐라고?"

그녀는 자신이 본 가람의 태도가 현실이 아니길 빌었지만, 그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야, 생각을 해봐라. 니랑 나랑 사귀자고 한지 벌써 육개월 다 되어 가는데 우리가 뭐 진도 뺀 거 있냐? 키스는 고사하고, 어디 가서 방을 잡기를 했냐? 씨발, 진짜 좀 만지자니까 존나 빼고. 이게 사귀는 거 맞아?"

"그...그럼 사귀면, 사귀면 그런 걸 다 해야 돼? 꼭?"

"아, 그럼 뭐 하러 사귀어? 아무것도 안하고 손만 잡고 다닐 거면. 니가 무슨 초딩이냐?"

은미의 가슴에 금이 갔다. 사귀기로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둘이 명동에 놀러갔었던 일이 생각났다. 온종일 그녀가 고민한 건 옆에 있는 가람의 손을 잡을까 말까였다. 그러나 가람은 너무도 쉽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고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꽤 행복했다. 그런데 그 행복한 기억이 이리도 쉽게 부정당했다. 사귀는 기간 내내 철벽 방어를 거듭한 여친에 대한 불평만 가득한 가람을 보면서, 그녀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지자."

"뭐?"

"니가 생각하는 사귀는 거랑 내가 생각하는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끝내자고."

자기가 생각해도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울음도 어느새 뚝 그쳐있었다. 이토록 단호하게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런데 앞으로 더 이상 너랑은 못 견디겠다. 이런 식이면... 난 힘들어."

가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반성하는 걸까. 은미는 내심 그런 모습에 자신의 말을 번복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단호하게 나가기로 한 이상 선을 확실하게 긋고 싶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안녕."

은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가람의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겨 그럴 수 없었다.

"이거 놔."

팔을 뿌리쳐 보았지만, 가람의 태도는 강경했다. 낮게 착 깔린 가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까고 있네."

"뭐?"

"씨발. 너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존나 비싸게 굴다가... 뭐? 니가 날 차? 이 년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 존나 우습게보네? 응?"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와 폭언에 은미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녀를 쳐다보는 가람의 눈빛은 흡사 육식동물의 그것 같았다.

"야, 내가 닐 따먹고 버리는 거라면 몰라도 니가 날 찬다고? 하. 씨발. 최가람 성질 많이 죽었다. 전 같았으면 씨발 그냥 자빠트리고 따먹었을 텐데 계속 신사적으로 나가니까 존나 우습게 보이긴 우습게 보였나 보네. 응?"

"가..가람아.... 이거 놔...."

손목이 아팠다. 워낙 세게 잡힌 탓이다.

"이거 놔아? 이거 놔아? 안 놓으면 어쩔 건데? 이 년이 어따 대고 이래라저래라야!"

가람의 나머지 한 손이 높이 올라갔다. 은미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설마, 싶지만 지금의 가람은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가 대비했던 충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가람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뭐냐, 너. 이거 안 놔?"

가람의 손을 공중에서 붙든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은미는 실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못 놓겠는데?"

"놓으라고!"

"너부터 쟤 잡은 손 놔. 그러면 내가 놓지."

"니가 뭔데?"

그러자 그 사람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그냥 지나가는 행인1."

가람의 손을 잡은 건 커트머리를 한 여자였다. 한 눈에 보기에 이십 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가람은 손을 뿌리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로 눈높이는 비슷했다. 한순간 내심 쫄았던 그였지만, 상대가 여자인 걸 알고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씨발. 그냥 상관 말고 꺼지라고. 니년이 뭔데 참견이야? 이거 내 애인이거든?"

"애인? 애인이면 사랑해줘야지 왜 패고 지랄이야? 니 말대로 년이니까. 같은 년이 맞는 건 못 보겠거든."

"빨리 안 꺼져? 니도 한 대 맞을래?"

"돈 많은가 보네? 돈 많으면 일단 쳐봐. 근데 딱 봐도 나보다 돈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 치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 변호사랑 이야기해야 할 거야. 자신 있어? 일단 쳐보라고."

여자는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가람에게 머리를 들이댔다. 강경하게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 밀린 가람은 치켜 올린 손을 주춤거리고 만다. 약자에겐 강해도 강자에겐 강하지 못한 그였다. 그러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효진아! 거기서 뭐해?"

효진이라 불린 여자는 놀이터 입구에 서 있는 다른 여자를 보고 외쳤다.

"지혜야. 니가 일루 와서 증인 좀 해라. 이놈이 이제부터 날 칠 건데 나중에 고소할 때 니가 증인 좀 해줘."

"증인? 고소? 그게 뭔 소리야?"

긴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곁으로 다가와 차분한 목소리로 효진에게 되물었다. 지혜라고 불린 여자는 가람과 은미를 번갈아 보더니 어쩐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은 듯 보였다. 어째 자신을 상대하는 사람 수가 많아지자 가람은 앉아 있던 은미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은미는 그런 가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다. 몸에 힘이 빠져 꼼짝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기요. 괜찮아요?"

나중에 온 여자, 지혜라고 했던가. 그 여자가 은미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이 물었다. 은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효진이 혀를 찼다.

"아, 저놈 시키. 더 도발해서 날 치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럼 합의도 안 해주고 감방 보낼 수 있는데 말이야. 쩝. 아쉽네."

"넌 일을 좀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내가 뭘."

지혜와 효진이 대화를 나누는 폼이 서로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은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를 표하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휘청이고 말았다. 효진이 그녀를 부축했다.

"저런, 괜찮아요? 벌써 맞은 거야?"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좀 놀라서...."

"쯧쯧. 그러니까 남자는 잘 가려서 만나라구요. 얘 꼴 나지 말구."

효진은 한 손으로 은미를 부축하며 다른 손으로는 지혜를 가리켰다.

"넌 또 가만히 있는 날 왜 끌어들여?"

지혜가 효진의 손을 쳐내며 타박했다. 그러나 효진은 개의치 않고 낄낄거리며 은미에게 말했다.

"쟨 말이죠. 유부남이랑 그러다가 나중에...."

"야! 너어 진짜... 그럼 밥 안 준다?"

"아, 알았어. 알았어. 쳇.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대단하거든요?!"

"넹. 알아모시겠슴둥."

허리에 손까지 얹어가며 발끈하는 지혜의 기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진은 장난스럽게 넘겨 버렸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며 지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아무튼 고맙습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은미가 고개를 꾸벅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효진이 불렀다.

"이봐요. 학생? 혼자서 괜찮겠어요?"

"네? 아... 뭐...."

"원래 저런 놈들은 간 척하고 있다가 나중에 와서 또 해코지 할 수도 있어요."

은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렇게까지요?"

"설마가 사람 잡는 거 뭐 하루 이틀인가?"

무심하듯 말하는 효진이었지만, 은미는 겁이 덜컥 났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가람과 지난 학년 동안 같은 수업을 들었고 몇 개월 전부터는 사귀기도 했지만, 정작 오늘 보여준 저 악독한 모습은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그의 악독함이 또 어떤 모습을 하고 또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조금 전 상황도 효진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여 하얗게 질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지혜는 효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얘! 너 정말...."

그제야 효진은 은미를 보고 자신의 말이 가져온 여파를 깨달았다. 그녀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쩌지"라는 표정으로 지혜를 돌아보았다. 지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기는! 저기요, 우리 집이 바로 요 앞인데 좀 들렀다 갈래요?"

"네? 집이요?"

"어차피 우리 지금 밥 먹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같이 들고 시간 좀 보내다 가요. 아니면 나중에 우리가 바래다주던가 할게요."

은미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필요는...."

그러나 효진은 이미 은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끌고 가고 있었다. 어깨에 팔을 두른다는데 은미가 좀 키가 작았기에 어째 헤드락 같은 모양이 되고 만다.

"그래. 내가 이따 밥 먹고 바래다줄게요. 그놈 또 나오면 이번엔 내가 합의금 꼭 삥 뜯고 말 거야."

"아...아니, 전 그러니까."

지나치게 쾌활한 효진과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지혜의 조합이 일으킨 납치에 거절 못 하는 은미는 그대로 끌려갔다. 결국 그녀는 팔자에도 없이 처음 보는 남의 집에서 저녁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지혜의 음식 솜씨는 좋았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도 인스턴트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은 은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잠깐. 혼자 가면 어떻게 해. 우리가 음...... 아니다, 좀 있으면 드라마 하잖아. 난 좀 곤란한데."

분명 아까는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한 효진이었는데 지금은 또 말이 바뀌었다. 아까의 만남에서 지금의 식사까지 이미 효진의 이런 마이웨이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한 은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언니. 여기서 별로 먼 것도 아니고 금방 가요."

아까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비롯한 이런저런 신변이야기를 한 이후 은미는 효진과 지혜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은미의 거듭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효진은 그녀에게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무언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왜?"

"너가 제일 만만하잖아."

"아오, 진짜!"

효진에게 끌려온 남자가 투덜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은미는 방금 들어온 남자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 오는 바로 그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긴 어쩐 일일까. 그리고 효진과는 꽤 친한 것처럼 보였다. 설마 둘이 사귀는 건가? 그나저나 남자도 바로 여기 사는 건가? 은미의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는 동안 효진이 은미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얜데, 저쪽 동네 산대. 너 그쪽에 자주 가지? 니가 좀 데려다 줘."

"그러니까 내가 왜에! 나 바쁘다니깐."

"공부도 안 하면서 뭐가 바빠."

"공부하고 있었는데 니가 끌고 왔잖아!!!"

남자가 아무리 버럭 소리를 질러도 효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남자는 효진에게 짜증을 부리다가 은미를 보곤 짜증의 수위를 좀 낮추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은미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저 그냥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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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고백 : 은미를 아무데서나 만지겠다고 추근덕거리는 가람의 모습은 딱히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작가 본인의 경험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폭력, 폭언 이런 짓은 맹세코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데서나 여친 옷 속에 손 넣고 헐떡거렸던 건... 그건 참... 그게... 후우... (여보, 이해하지? 요즘은 덜 그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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