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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은미의 거듭된 거절을 효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 안된다니깐. 뭐해, 한석 군. 얼른 따라붙어."
효진이 남자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더니 은미의 옆에 세웠다. 가게에서 볼 때 남자의 키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옆에 나란히 서니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효진은 남자의 곁에 바짝 붙더니 은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그러나 속삭인다고 하는 말치고는 소리가 제법 커서 전부에게 아주 잘 들렸다.
"야, 근데 은미 얘도 만만치 않지 않냐? 어쩌면 니가 좋아하는 지혜보다 더 클지도 몰라."
"얌마!!"
"가면서 막 덮치고 그러면 안 된다? 얘 방금 상처 받은 애란 말이야."
"내가 넌 줄 알아?"
"그래. 내가 아닌 너니까 데려다 주면 되겠네."
효진은 드라마 할 시간 다 되었다면서 두 사람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효진과 지혜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남자와 은미가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은미에게 물었다.
"저기, 집이 어디세요?"
"안 그러셔도..."
"효진이는 자기가 시킨 거 안 하면 나중에 화를 내요. 전 감당이 안 됩니다. 멀지 않은 곳이면 데려다 드릴게요."
은미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동네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자주 가는 동네라고 했다. 은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카페 미리내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은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걸어가다가 남자가 물었다.
"효진이랑 지혜 친구세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역시 남자는 은미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약간이나마 기대하고 있던 은미는 살짝 실망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구......"
아까는 같은 여자들끼리고 효진이 워낙 활달하여 대화가 수월했는데 막상 남자와 단둘이 되고나니 은미는 대화하기가 영 거북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평소 얼굴을 보던 사람이라 말이 아예 안 나오진 않았다.
"그냥 어쩌다가...."
"어쩌다가?"
"길에서 만났는데, 언니가 집으로 오라 그래서..."
은미는 자기가 생각해도 퍽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은미의 이런 터무니없는 이유와 설명을 남자는 금방 납득했다는 점이다.
"예에, 그러시구나."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딱히 대화의 서두를 열만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은미의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차로에 있는 횡단보도에 도착하자 은미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저, 여기서 길만 건너면 바로 집이에요. 이제 그만 들어가 보셔도 돼요."
"괜찮으시겠어요? 아까 효진이가 스토커 어쩌구 하던데요."
"에? 그런 건 아니구요... 암튼, 감사했습니다."
은미가 허리까지 굽혀 꾸벅 인사를 하자 남자는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은미는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바로 건너려고 했다. 그때 남자가 은미의 어깨를 와락 당겼다. 갑작스럽게 몸이 뒤로 젖히자 은미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남자의 품에 자신의 등을 기대고 말았다. 뒤로 해서 확 안긴 거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덤프트럭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차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은미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집채만 한 차가 쓸고 지나간 것이다. 깜짝 놀란 은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남자가 그렇게 은미를 뒤에서 안은 채로 트럭이 간 쪽을 보며 혀를 찼다.
"어휴. 노란불인데 악셀을 더 밟네, 더 밟아. 저기, 괜찮으세요?"
"아, 예."
"큰일 날 뻔 하셨어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은미는 남자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다. 조금 전 이 남자의 품에 안겼을 때 무언가 기분이 많이 이상했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그런 기분이었다. 은미는 몸을 돌려 다시 꾸벅 인사하며 빠르게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네."
"다음에 오시면, 제가 잘 해드릴게요!"
"네?"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은미는 몸을 돌려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뛰어가면서 자기가 방금 무슨 말로 인사했는지조차 까먹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길을 건너서 한참을 종종거리며 뛰어가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아직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은미는 고개를 한 번 더 꾸벅하고는 집을 향해 뛰어갔다.
평상시 그녀는 심하게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며 걸리적거리는 가슴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뛰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째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 돌아와 오늘의 일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가람이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와 막나가는 행동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지만, 효진이와 지혜의 조건 없는 베풂과 한석이라는 남자의 호의에 그 상처를 덮을 수 있었다.
그다음 날, 카페에서 일하며 은미는 계속 생각했다. 학교에 어떻게 나가나, 가람을 다시 어떻게 보나 온종일 고민했지만, 결론은 딱히 나질 않았다. 시간이 되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학교에 나갔다. 강의실에서 마주친 가람은 그녀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인사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하려고 했다면 주머니에 넣어둔 호루라기를 꺼내어 냅다 불려고 했는데 조금 뻘쭘해졌다. 가람 말고는 딱히 다른 친한 친구도 없던 터라 그녀의 학교생활은 예전의 은둔생활로 다시 돌아간 듯싶었다. 쉬는 시간에 가람이 평소 어울리던 패거리와 쑥덕거리며 은미가 있는 쪽을 몇 번 째려보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다시 화요일이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반가운 얼굴들이 카페로 찾아왔다. 효진과 지혜였다.
"여어. 은미 양. 잘하고 있어?"
"어머, 언니. 어서 오세요."
지난번 식사 때 은미는 카페 미리내에서 일하고 있단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야기를 잊지 않은 효진과 지혜가 찾아와 준 것이다. 효진은 바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긴 뭘 잘하나."
그 말투는 마치 요릿집에 들어와 앉으며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중년 아저씨의 말투였다. 지혜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뭐야, 효진이 닌 너무 아저씨 말투야."
"뭐 잘하냐고 물어보는 건데 뭐."
가볍게 투닥거리는 두 사람이 바에 나란히 앉았다. 은미는 웃으며 말했다.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응. 우리 점심 먹고 후식으로 뭐할까 하다가 니 이야기 생각나서 한 번 와봤어. 가게 이쁘고 좋다야."
효진은 가게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지혜는 은미에게 자신 있는 걸로 두 잔 달라고 했다. 은미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한 후 브랜드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대접했다. 아무리 공짜로 얻어먹으러 온 사람들이지만 겨우 가장 싼 커피 주는 거냐고 효진은 투덜거렸다.
"어머, 공짜로 드실 거였어요? 전 돈 받으려 그랬는데?"
은미의 농담에 효진이 손사래를 치며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보고는 금방 표정이 환해졌다.
"음~ 이야. 내가 진짜 커피 비싸게 파는 데서도 많이 먹어봤는데 여기만큼 맛있게 끓여내지 못하는 것 같아."
"후후. 비싼 데 어디요?"
효진은 서울 시내에 있는 커다란 호텔의 이름을 댔다. 5성급 호텔이었다. 으레 농담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은미는 효진의 표정이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다소 놀랐다.
"거기 커피 맛을 알 정도로 자주 가세요?"
"어? 어... 어쩌다 보니."
"언니가 거기 가서 커피 마실 일이 뭐가 있는데요?"
"아, 뭐. 그런 일이 있어."
효진이 대충 얼버무리며 수습하는 동안 지혜도 커피의 맛을 칭찬했다. 은미는 거기에 대답을 하며 그녀가 오전 동안 구워두었던 무료 제공용 쿠키들을 꺼내어 대접했다. 자기 몫의 커피도 하나 끓여왔다. 어차피 손님도 없이 한가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그렇게 바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한가롭게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되었다. 은미가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딸랑-
"아, 어서 오세요."
반가운 얼굴이 가게로 들어온다. 늘 그렇듯이 카운터에서 주문만 하고 자리로 가려던 그는 바에 앉아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치고는 서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손가락을 들어 아는 얼굴을 가리킨다.
"어라, 니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러는 한석 군은?"
방금 들어온 이는 한석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던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카운터에 서 있는 은미에게 향했다. 효진은 빙글거리며 말했다.
"뭐야. 은미도 한석이 숨겨놓은 애인이었어?"
그러자 한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미라니? 그게 누구야?"
지혜가 은미를 손으로 가리키자 한석은 그제야 지난번에 자신이 데려다 준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주문을 받는 종업원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던 그였기에 그 당시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데려다주던 날도 딱히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 그럼 그때 그분이....?"
은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는 방금 효진이가 했던 말이 꽤 크게 울리고 있었다. 방금 효진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은미'도' 한석이 숨겨놓은 애인"이었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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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본편 타임라인대로라면 이 시기에는 지혜가 없을 때죠. 근데 이번 편에서 가슴 이야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등장하십니다. 이게 외전의 특징입니다. 작가 마음대로의 시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