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49화 (34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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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은미도 마주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여자 혼자뿐이었다. 이런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는 또 얼마나 요란하게 입고 있을 것인가 내심 궁금하긴 했었는데 막상 보니 생각보단 평범했다. 물론 쫙 달라붙는 호피무늬 원피스에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이 길거리에서 흔히 볼만한 모습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은미의 쇼핑백에 담긴 옷에 비하면 무난한 편이라고 할 만 했다. 중간 정도의 키에 나름대로 글래머러스한 몸매였다.

"아까 전화했었는데요...."

"아, 그러셨죠? 무슨 일이시죠?"

은미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벽이나 행거에 걸린 옷들은 조금 야한 정도의 옷들이 대부분이지 그녀가 가져온 옷 정도는 아니었다. 은미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 옷을 여기서 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거랑 같은 옷을 구하고 싶어요."

"어디 좀 볼까요?"

여자가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안에 있는 옷을 꺼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 옷이군요. 왜요, 한 벌로 부족하세요? 대체 어떤 플레이를 하시길래...."

'플레이?'

은미로서는 요새 못 알아들을 소리가 많이 흘러나온다.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건 아닌 것 같아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구요. 음... 저희 유니폼으로 쓸까 하구요."

"아아, 그러시구나. 언니들이 몇 분이나 되세요?"

"저 포함해서 네 명이요."

꽤 오래 고민한 끝에 은미가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사장은 어차피 그녀의 엄마였고, 일할 사람 뽑는 문제부터 커피 원두 고르는 일까지 가게 운영에 대한 대부분의 권한은 은미에게 있었다. 그녀는 평상복을 입고 일하는 카페 방침을 바꾸어 유니폼을 만들어서 입기로 했다. 유니폼은 물론 그녀가 방금 들고 온 옷이다. 은미는 그 유진이라는 깐깐한 여학생이 자신을 향해 따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왜 그런 옷을 입어요?"

그리고 은미는 대답할 것이다.

'이게 우리 카페 미리내 유니폼이거든.'

좋았어. 그러면 완벽하다. 은미는 자신의 꾀에 감탄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종업원들의 의견은 전혀 논외였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이 옷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아까와 같이 계속 한석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아까 느껴졌던 묘한 기분을.... 그리고 한석의 시선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이런 건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겠어요? 조금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주인이 이끄는 대로 안쪽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가게 안쪽은 칸막이가 쳐 있었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간이 스튜디오 같은 설비가 되어 있었다. 조명설비와 커다란 카메라 같은 것을 구경하느라 은미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안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잠시 후 예의 옷을 도로 들고 나오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어떡하죠? 이 옷은 이게 마지막이었네요."

은미는 깜짝 놀랐다.

"네에? 그... 그런가요?"

"예. 원래 이런 종류의 코스튬은 미리 많이 만들지는 않거든요. 주문 들어와서 만드는 경우도 있고...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역시 없네요."

"그럼 주문을 하면 얼마나 걸리죠?"

"적어도 1~2주는 주셔야죠."

"그렇게 나요....?"

옷이라고 해봐야 늘 지하상가 같은 곳에서 티셔츠 정도만 사 입던 은미였다. 그러다 보니 이 가게에만 오면 당연히 옷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은미는 크게 낙담했다. 그런 은미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던 가게 주인이 묻는다.

"굳이 이 옷이 필요한 이유라도 따로 있으신가요? 유니폼으로 하긴 좀 쎈데요. 대체 뭐 하는 업소시길래?"

"에? 저흰 그냥 커피숍이구요..... 그....그야.....그게 예쁘고.......노출도도 있고........"

"흐음? 커피숍에서 이런 걸 유니폼으로 하신다구요?"

사실 솔직히 처음부터 말하려면 자신이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이유이긴 하다. 어떤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데 혼자 입으면 난감해서 가게 점원 전체에게 유니폼처럼 입히려구요. 속에서는 맴도는 데 막상 남에게 설명하려니 꽤 난감했다. 버벅거리는 은미를 보면서 가게 주인은 종이컵 두 잔에 차를 타가지고 왔다.

"뭔가 사연이 있으신 것 같은데 급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이 시간에는 저도 꽤 한가한 편이거든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도 이렇게 차까지....."

"바쁘신가요? 바로 가보셔야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은미는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은미의 맞은편에 주인이 앉았다. 그녀는 은미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가게 이름 보셨죠?"

"네? 네에."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아뇨. 처음 보는 이름이라...."

여자는 두 팔을 자랑스럽게 펼치며 말했다.

"물랑루즈는 19세기 프랑스에 있었던 극장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매음굴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요. 그렇지만 그곳이 당시로는 파격적인 의상과 쇼를 선보이는 기념비적인 장소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해요. 공연 내용뿐만 아니라 거기서 무희 의상은 전 사회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파격적이었다고 해요."

"아, 예."

난데없는 역사 공부에 은미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저런 이름을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는 이유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저는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에엑?"

은미는 깜짝 놀라 주인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보며 생글거리는 그녀를 자기도 모르게 경계하게 된다.

"후후. 역시 표정이 귀여우시네요. 놀리는 보람이 있는 분이에요."

"아, 예에."

역시 농담인가. 농담치고는 수위가 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런가, 주인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어째 느낌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 은미였다. 예전에 효진이의 말투나 은미 가슴 만지며 희롱하는 짓이 아저씨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쪽은 말 그대로 "아저씨 같은" 사람이고 이쪽은 그냥 눈빛부터가 "아저씨"같다고 생각하면 좀 지나치려나. 은미는 설마 하는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눈빛이 자신을 탐색하는 빛이긴 하지만 그래도 행동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혹시 성함이....?'

"이은미입니다."

"아, 은미 씨구나. 전 초향이라고 해요."

"아, 예."

난데없는 통성명에 어리둥절했다. 초향? 본명인가? 성도 이야기해주지 않고 그냥 초향이라니.... 은미가 고민 하고 있는 동안 초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는 은미가 가져온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옷이 예쁜 옷인 건 맞죠. 제가 만들었으니 노출도도 꽤 되고요. 근데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저 옷을 여러 개 원하시는 건가요? 다른 이유는 없고?"

"그게 그러니까....."

솔직히 예쁜 건 모르겠고 은미가 바란 건 은근한 노출이었다. 물론 저 옷은 그런 측면에서 좀 과하긴 하지만 효과는 좋다고 생각했다. 초향은 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처음에는 예쁜 여자를 좋아했어요. 보기만 해도 즐겁고 기분 좋고..... 누가 보더라도 반박을 할 수 없게 정말 잘 짜여진, 그런 이쁜 여자들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죠. 원래 모든 여자는 예쁜 거라구요. 참, 예쁘죠. 주머니에 확 넣어가지고 싶을 만큼요."

"네에...."

아까 그게 농담이 아니었던 걸까. 여자를 좋아한다는? 은미는 다시 긴장했다. 초향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여자들은 그런 순간이 와요. 예뻐지고 싶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순간이.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 대상이 예뻤으면 좋겠다는 그런 순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그런 순간이 찾아온 여자들이 모두 이 가게를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는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죠."

언뜻 봐서는 모를 이상한 네이밍 센스라고 생각했다.

"물랑루즈의 공연을 두고 당시 유럽사회가 들썩였다고 해요. 일개 공연이라고 하기에는 당시로 엄청난 인기였죠. 다리와 속옷을 대놓고 드러내는 의상도 파격적이고. 그걸 두고 세상이 망한다 어쩐다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죠? 지금 프랑스는 최고의 패션 리더인 나라라고 할 수 있죠. 이탈리아 사람들이 들으면 배가 좀 아프겠지만.... 난 그들의 그런 패션 감각의 밑바닥에는 물랑루즈와 같은 퇴폐적 아름다움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래서 나도 나만의 물랑루즈를 열었어요. 이렇게 코스튬, 홀복 전문 매장 말이죠."

막상 초향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수긍도 갔다. 은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미 씨라고 했죠? 은미 씨도 예뻐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기 오신 게 맞다면, 잘 오신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은미 씨는 저에게 좀 솔직해지셔야 돼요. 이건 그저 순전히 제 짐작이지만..... 은미 씨의 유니폼 이야기는 아무래도 변명이신 거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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