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1 / 0471 ----------------------------------------------
[외전] 카페 미리내
"어머, 저희 옷이 대부분 수제라서 좀 단가가 나가요. 모르셨나 보네요. 먼저 가져온 옷도 좀 비싸긴 했어요."
"그...그래요?"
은미는 아주 잠깐, 자기가 준비해온 옷을 입지 않는다고 성질을 내던 가람이의 심정을 알것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생각은 황급히 털어버렸다. 이제는 그의 모습만 떠올라도 불쾌할 따름이다. 돈이 부족해 난처한 은미를 보며 초향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요, 은미 씨라면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제 제안을 들어 보고 수락하신다면 이 옷들은 그냥 다 드릴게요."
"전부 다요? 뭐...뭔데요?"
은미는 아까 자신의 몸을 주물러 대던 초향의 손길을 떠올렸다. 혹시 이상한 제안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초향의 제안은 다른 방향으로 은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음...... 그러니까, 저희 모델이 되어 보지 않겠어요?"
"모...델이요? 제가요?"
은미는 깜짝 놀라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항상 수더분한 차림의 자신이었는데 난데없이 모델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초향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 가게는 단순히 여기서만 물건을 팔지 않아요. 혹시 인터넷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인터넷?"
"네. 저는 거기서 쇼핑몰도 하나 운영하고 있죠. 아직 초창기이긴 하지만 앞으로 꽤 성장가능한 사업이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투자도 하고 있거든요. 여태까지는 그냥 마네킹에 입힌 채로 옷 사진을 찍어서 업로드 하곤 했는데 아까 은미 씨를 보면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바로 은미 씨가 저희 옷을 입고 모델이 되어주는 거예요. 어때요? 제 생각이?"
"그래도 키도 작은 제가 모델이라니....."
"어머. 세상 여자들이 전부 전문 모델처럼 키크고 늘씬늘씬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적당히 중간 키에 볼륨감이 있는 은미 씨라면 사진으로 봤을 때 라인이 꽤 예쁘게 잘 나올 거예요. 좋은..... 걸 가지고 계시니 조회수도 꽤 높아지겠죠."
"좋은"이라고 말하며 초향의 눈길은 은미의 가슴에 한참 머물렀다. 인터넷은 물론 초향이 늘어놓는 단어의 대부분은 은미로서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옷들을 꼭 가져가고 싶었고, 돈은 모자랐으며 초향이 내놓은 제안이 그리 썩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은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초향이 활짝 웃었다.
"다음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들고 한번 찾아갈게요. 커피숍이 어디 있는 거죠?"
은미는 카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초향은 그것을 받아적더니 포장된 옷들이 담긴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은미는 뭔가 하나 빠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기, 세 벌 뿐인데요?"
초향이 씩 웃었다.
"한 벌은 입고 가셔야죠. 손님."
"네엣?"
화들짝 놀란 은미를 향해 초향은 아까 벗어두었던 치파오를 건넸다.
"마음에 드신 옷이잖아요? 이걸 입고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 멋대가리 없는 옷은 당장 벗어서 저 주시구요."
"그...그래도요....."
"저희 모델도 해주실 분인데 이 정도 담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 안 되겠다면 그냥 다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만?"
"아, 안돼요!"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초향은 은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자, 그럼 이제 벗자구요."
무자비한 초향의 손 아래 은미는 무참히 발가벗겨졌다. 주어진 옷이라고는 앞서 입었던 치파오뿐. 은미는 그걸 입고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가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초향은 은미를 벗기고 입히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런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섰지만 은미의 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 이런 노골적인 차림으로 나서본 적은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곤 가게 앞에서 한 걸음도 못 떼어 바들바들 떨고 있노라니 결국 초향이 다시 나와 어깨를 짚는다.
"제가 얘기 했잖아요. 여자의 매력은 당당함에서 나온다고. 이렇게 약한 모습이면 생기려던 매력도 사그라 들겠어요. 자, 허리 펴고! 어깨 펴고!"
초향이 등을 떠민다. 은미는 원망섞인 눈으로 초향을 바라보았지만, 초향은 은미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향해 눈짓을 하곤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별수 없이 은미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날 집까지 향하면서 어떤 정신으로 지하철을 타고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역에서 집까지 걸어 온 지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갔던 그녀였다.
그러나 초향의 그런 하드코어 트레이닝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카페 점원들에게 치파오 유니폼을 권했을 때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지만, 이미 은미가 입고 있는 데다가 사장 자녀이자 카페 매니저인 그녀가 평소 성격과 달리 꽤 강경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다들 궁시렁거리면서도 입어주었다. 덕분에 한석의 시선과 유진의 잔소리에도 은미는 당당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유진은 은미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런 걸 왜 입냐고. 은미는 대답했다.
"이제부터 이게 우리 카페 유니폼이거든."
유진은 어이없어했지만, 은미가 그렇게 나오니 딱히 태클은 걸지 않았다. 그저 은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석의 정강이를 한번 차고 밖으로 나가버릴 뿐이었다. 은미는 속으로 작은 환호를 질렀다.
다음 날, 계약서를 쓰기 위해 초향이 카페로 찾아왔다. 그녀가 도착했을 무렵, 한석도 있었다. 초향은 한석을 곁눈질로 살피고 카운터로 갔다. 은미와 쇼핑몰 모델 계약서를 쓰고 한담을 나누었다. 초향이 은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그녀는 말을 놓기로 했다. 초향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은미의 시선 끝에 누가 있는지 확인했다. 가게를 나서기 직전,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은미에게 물었다.
"그때 그놈이 아닌데?"
은미는 깜짝 놀라 초향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가게에 옷을 사러갔던 사람은 가람이었고, 지금은 잊고 싶은 그녀의 전 남친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석에게 그 소리가 들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초향은 깔깔거리며 무슨 사정인지 잘 알겠고,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은미의 투잡이 시작되었다. 오후에는 원래 하던 카페 일을 했지만, 오전에는 물랑루즈로 가서 모델 일을 했다.
"좋아! 이쪽을 보고! 옳지! 그렇게!"
화려하고 가슴이 강조된 배색의 원피스를 입은 은미가 몸을 돌리고 카메라를 향한다. 환한 조명 아래 포즈를 취하고 초향의 요구대로 자세를 바꾸어 가며 촬영에 임한다. 초향은 디지털 카메라와 수동 카메라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은미의 모습을 연신 담았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미소라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옷을 갈아입고 또 새로운 촬영을 준비한다. 옷을 벗고 입을 때 초향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은미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다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다.그렇게 한참을 하고 나니 온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얼굴이야 미소가 계속 신경 써가며 땀을 닦아주고 화장도 고쳐주고 했지만, 몸 전체를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준비된 옷의 촬영이 다 끝나고 나자 초향이 종료를 선언했다.
"아아, 우리 은미. 정말 수고했어."
"초향 언니두요. 미소도 수고했어."
미소는 늘 그렇듯이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초향에게서 카메라들을 받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사진 후보정 및 편집 작업 등을 하는 게 미소의 담당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촬영과 의류 준비, 화장, 조명 배치 등을 담당하는 등의 초향 전용 조수역할도 하고 있다. 은미와 초향은 조그만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초향은 얼음이 담긴 잔을 가져다가 시원한 음료수를 따라 은미에게 권했다. 은미가 그걸 마시는 동안 가방에서 뭔가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이번에 나온 우리 가게 브로슈어야. 지난주에 은미가 찍은 게 실렸지."
"정말요? 어디 봐요."
은미가 받아든 것은 작은 책자처럼 꾸며진 홍보물이었다. 표지에 빨간 풍차가 그려져 있고 세로로 "Moulin Rouge"라고 씌여 있었다. 넘겨보니 지난주에 그녀가 찍었던 사진들이 빼곡하게 실려있었다. 은미가 입고 찍은 것도 있고 초향이 직접 입고 촬영한 것도 제법 있었다. 페이지 수가 많지 않아 은미의 사진은 스무 장 남짓 했지만, 처음으로 만져보는 모델 활동의 결과물에 은미는 나름대로 뿌듯해졌다. 끝까지 다 보고 난 은미는 초향에게 물었다.
"지난주 내내 촬영했는데 겨우 요 정도만 실려요?"
"응. 아무래도 인쇄비도 고려를 해야 하니까 말야. 페이지가 많아지면 가격이 쎄더라구. 나도 맘 같아선 은미가 입었던 모든 의상을 싣고 싶긴 했는데.... 일단 홈페이지에는 전부 올라가 있어. 클릭율도 꽤 높아. 홈페이지도 한 번 볼래?"
초향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물랑루즈 쇼핑몰 홈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은미는 여러가지 화려한 옷을 입은 자신의 몸을 모니터로 접하며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구나.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은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은미를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보며 초향이 말했다.
"모델비도 많이 못 주는데 고생 시켜서 미안해."
"아뇨. 언니한테 받는 옷들만 해도 꽤....."
은미가 뿌듯한 표정으로 브로슈어를 다시 처음부터 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초향이 씨익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꽤 뭐? 효과가 좀 있디?"
"에? 예에..... 뭐랄까. 조금은요?"
은미는 배시시 웃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상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초향은 은미에게서 이런 사정을 많이 전해 듣고 있었다. 한석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초향은 은미의 좋은 상담사가 되어주었다. 효진은 워낙 세게 말하는 바람에 은미가 좀 버거웠고 일종의 연적이라 할 수 있는 지혜에게 한석에 대한 걸 털어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초향은 빙긋 웃으면서 은미에게 말했다.
"효과가 있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그 한석인가 한돌인가 하는 녀석은 확실히 꼬신 거야?"
"확실히라뇨...?"
"으이구, 이 숫처녀야. 이걸 했냐, 안 했냐는 거지!"
뭔가 넣었다 뺐다 하는 초향의 손동작을 보고 은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옷 입는 거야 나아졌다고는 하나 속은 원래 은미 그대로였다. 은미는 잔을 내려놓고 손사래를 쳤다.
"거...거기까지는....."
──────────────────────────
*
은미가 워낙 소극적인 캐릭터라서 극의 전개를 위해 약간 변태 같은 캐릭터를 붙여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외전 루트는 358회에서 종료됩니다. 다음에 이어질 루트를 고르는 340회에 아직 투표하지 않은 분들은 꼭 댓글 달아주세요. 340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