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53화 (35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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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은미를 더듬던 남자가 말했다.

"뭐하긴, 좀 만져보고 있지. 왜? 만지면 닳기라도 하냐?"

은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 결코 좋게 끝났다고 할 수 없는 관계인 최가람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은미는 그를 여기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은미의 곁에 바짝 다가오더니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흥. 뭐야. 씨발. 내가 그렇게 입으라고 갖다 바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만.... 왜? 새로 생긴 그놈이 이거 입으라더냐?"

"무...무슨 소리야. 새로 생긴 놈이라니."

"이년이 모른 척하는 거 보게."

가람은 그녀의 귀에 자신의 입을 바짝 대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가 니네 집 근처에서 다 봤거든? 맨날 니 데려다주던 그 키 큰 새끼?"

"한석이 오빠....?"

"한석인지 한돌인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씨발. 뭐야, 니 사람 가리면서 가랭이 벌리는 거냐? 엉?"

가람은 그녀에게 바짝 붙은 채로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말하는 목소리 하나하나 은미를 공포에 젖게 만들었다. 가람의 손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고 거의 감싸 안고 있다시피 하였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사이좋은 연인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은미의 파격적인 옷차림에 한 번씩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말이다. 은미는 간신히 답했다.

"오빠랑 난 그런 사이 아냐...."

"그럼 이건 뭔데? 니 년이 평소에 원래 하고 다니던 차림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런데 그 새끼가 이렇게 입으라고 시키던? 엉? 엉? 엉?"

가람은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살갗을 아프게 찔러오는 손길도 손길이지만 온몸을 떨게 만드는 모멸감에 은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람의 폭언은 이어졌다.

"야, 이미 개통 끝났으면 어디 한번 대줘봐. 씨발. 내가 괜히 너랑 사귄 줄 알아? 친구들이랑 내기해서 니 처녀라는 데 십만 원 걸었단 말야. 확인도 해볼 겸 따먹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도 끝끝내 안 벌려주더만, 그 새끼한테는 바로 벌려줬나 보지? 응?"

은미는 울컥했다. 늘 조용하고 답답하기까지 했던 자신에게 가람이 먼저 다가와 사귀자고 했던 진짜 이유를 알아버려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때는 이런 인간을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 아니라니깐. 그런 거...."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람의 모습이 마지막 헤어짐을 기점으로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천성이 착했던 그녀는 가람과의 연애를 애써 좋은 추억으로만 기억하려고 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남자와의 대화를 엄두조차 못 냈던 그녀가 한석이랑 그 정도 가까워진 것도 어쩌면 그동안 사귀었던 가람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석의 앞에 그 메이드복인가 뭔가 하는 것을 입고 설 수 있었던 것도 - 좀 엇나가긴 했지만 - 그래도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가람의 덕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토록 사람이 많고 공개적인 곳에서 그녀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괴롭히는 이가 그녀의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그녀는 너무도 슬펐다.

그녀의 슬픔을 가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갖은 수를 써보고 이상한 옷도 사다 주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생각했던 터다. 다른 여자들을 꼬실 때 사용한 방법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은미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순수하리만큼 무지했다. '돈과 시간, 옷을 갖다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자지 않은 여자'에게 쏟아지는 분노 이면에는 상대와의 교감이나 대화 부족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는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숫제 떡 주무르듯이 은미의 가슴을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은미와 헤어지고 나서 가장 아쉬운 건 바로 이것 하나였다. 사귈 때 이렇게 만질 수 있게 해줬으면 좀 좋아. 가람의 흥분은 석유를 들이 부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자신과 사귈 때는 수녀보다 더 철저하게 감추고 살던 전 여친이 지금 이토록 대담한 복장으로 바뀐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야이, 씨발년아. 개통 끝났을 거 아냐. 그때처럼 니가 울면 내가 또 쫄아서 물러날 줄 알아? 이번엔 어림없어. 너 다음 역에 나랑 내려. 씨발년아. 내가 방 잡고 바로 자빠트려줄게."

그의 손길은 이곳이 공공장소라는 것도 잊은 채 점점 더 난폭해졌다. 은미는 속삭였다.

"가람아, 제발...."

은미는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가람의 팔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손 하나에는 이미 짐이 많이 들려있었고 나머지 손 하나만으로 남자의 힘을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람의 선의에 호소하는 것뿐. 두 사람이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엉켜있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제지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이쪽을 보게 된 이들은 그저 "요즘 젊은 것들은..."이란 눈빛을 보내며 혀를 가볍게 차고 넘어갔다.

"제발... 제발 좀...."

"제발 뭐, 아아. 한 번 말고 두 번 해 달라고? 크크. 두 번이 뭐야. 내가 좆 꼴리는 대로 계속 박아줄게, 그건 걱정 말어."

난폭하기 그지없는 가람의 말이 하나하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은미의 마음을 후벼팠다.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갈 때쯤 손에 들린 쇼핑백이 보였다. 화려한 상자가 담긴 그 옷들을 보며 초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펴고! 자신감을 가져요! 그게 당신의 매력이야.'

그제야 은미는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물론 가람이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가 가장 큰 문제다. 그러나 그걸 계속 받아주고 적절한 선에서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 질질 끌고 간 자신이 문제를 키웠다. 이제는 그것을 끝내야 했다. 우유부단한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의 씨앗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울음이 딱 멈추었다. 그녀는 잠깐 숨을 들이마시고 핸드백 속에 손을 넣어 손끝의 감으로만 어떤 물건을 찾아두었다. 예전에 쓰려고 준비해 두었다가 쓰지 못하고 내내 담아두기만 했던 물건이다. 그게 손에 잡히자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람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이거 놔."

가람은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단호한 말투는 여태 못 들었던 탓이다.

"뭐라고?"

"못 들었어? 이제 날 놓으라고. 이 팔도 그렇고 앞으로 날 건드리지도 마. 너한테 휘둘리는 건 정말 지긋지긋하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선언에 가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내 이죽거리며 되받아쳤다.

"그래서? 어쩌시려구요? 응? 어이, 이은미 씨. 뭘 어쩌겠다구요?"

그는 이제 아예 대놓고 그녀의 가슴 한쪽을 우악스럽게 틀어쥐며 비아냥거렸다. 가슴의 통증을 참고 은미를 이를 악물며 답했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은미는 아까부터 꼼지락거리며 찾아놓은 호루라기를 꺼내물었다. 그녀의 난데없는 행동에 가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동안 은미는 가슴을 쑤욱 내밀며 폐부 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마치 풍선처럼 튀어오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그녀는 힘껏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익--------

가람은 경악하며 귀를 틀어막았고 이런 행동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의 모든 소음을 압도하고도 남을 커다란 소리에 모두 이쪽을 돌아본다. 벼락같은 호루라기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은미는 재빨리 호루라기를 입에서 떼고 힘껏 소리쳤다.

"치한이야!!!!!!"

그동안 참아왔던 그녀의 울분이 담긴 외침이었다. 억누르고 참고 견디기만 해온 그녀의 혼신의 외침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보고 뭐라 한마디씩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난데없는 호루라기 소리와 은미의 외침에 쫄았던 가람은 서서히 원래의 표정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손을 올렸다. 곧 내려칠 기세였다.

"이년이 미쳤나..."

그러나 은미의 외침은 전혀 헛된 게 아니었다.

"이봐, 자네."

한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스윽 나오더니 가람의 팔을 붙들었다. 가람이 이게 뭔가 싶어 그를 쳐다보는 순간 사내는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어 가람의 코앞에 내밀었다. 펼치니 안쪽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경찰 배지였다. 가람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 아니야! 이 년... 아니, 얘랑 저랑은 원래 사귀는 사이라구요! 치한이 결코 아니라...."

몸을 빼내려는 가람을 붙드는 경찰이 은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은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랬는데 깨졌죠. 이제는 저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에요."

은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지하철 수사대 소속 사복 경찰은 현행범 가람의 연행을 계속했다. 가람은 은미를 보며 나중에 보자는 식으로 으르렁거리다가 경찰에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았다. 다른 한 명이 더 있어서 가람은 두 명의 경찰에게 연행되어 끌려갔다. 나중에 온 경찰은 은미에게도 진술을 위해 함께 가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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