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55화 (35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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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카페 미리내

가람의 모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여태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한석이 돌변하고 나니 이건 뭐 조폭이 따로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현직 경찰들도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마른 침을 삼킬 정도였다. 그냥 호리호리하고 평범하게 생긴 그의 어디에서 저런 박력이 흘러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 차분하기 그지없는 한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은미는 더욱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노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그녀는 내심 설레였다.

"너... 너....."

놀라움에 할 말을 잊은 가람 모친은 손가락으로 겨우 한석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한석은 예의 그 바른 표정으로 돌아가 여상스럽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왜 그러시죠, 아주머니?"

"너 방금 나한테 뭐라고....."

"글쎄요. 전 기억이 안 나는데요? 혹시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는 분 있나요?"

한석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아무도 못 들은 소리를 아주머니 혼자 들으셨나 보군요. 아드님이 감방 간다니까 놀라서 이젠 환청도 들리시나 봅니다."

"뭐... 뭐라고? 나한테....?"

"제가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저한테 폭언을 들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시면, 저기 계시는 변호사님과 상의하세요. 저는 일단 나가겠습니다."

하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한석과 은미가 출장소를 나서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꽁꽁 얼어붙어 있던 가람 모친의 발악이 재개되었다. 이번엔 경찰이 나서서 아들 경력에 빨간 줄 가게 생겼으니 조용히 하라 일러주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분루를 삼켰지만, 상대방은 변호사를 내세워 조목조목 그녀 아들을 몰아세우는 중이었고,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이번 사건 가해자이자 자신의 모친이 너무도 창피한 가람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뒤늦은 후회를 곱씹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그는 하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변호사님,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반성하고 있어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

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경찰이 작성하는 조서에 몇 마디 더 첨언하여 내용을 수정하도록 했다. 조서 내용에 하영이 동의하자 경찰은 이번에는 가람에게 내밀었다. 난생 처음 보는 종이에 자신에 대한 죄상이 엄격한 단어로 나열되어 있는 걸 본 가람은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게 뭐죠?"

경찰이 설명했다.

"당신이 이런저런 짓을 해서 피해자에게 이런저런 피해를 끼쳤으며, 그걸 경찰이 이렇게 저렇게 조사했고, 피해자는 합의 없이 처벌을 원하고 있으니 검사님, 수사해서 이 사람에게 법에서 정한대로 벌을 주십시오~ 라는 내용입니다. 잘 읽어보고 그 밑에 지장 찍으세요."

가람의 모친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난생 처음 보는 문서와 모친의 울음소리 덕분에 가람은 넋이 나가 버렸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하영을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덥썩 엎드려 발을 붙잡았다.

"변호사님! 저 정말! 반성하고! 또, 그게 그러니까..."

그러나 하영의 대답은 짧았다.

"놔."

너무 짧고 단정적이었던지라 가람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영은 냉정한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한 성격이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전여친이 되었든, 지나가는 변호사가 되었든,타인의 신체를 허락없이 만지면 안 된다. 그게 현대인의 상식이지. 네 손이 닿음으로 해서 난 지금 몹시 불쾌함을 느끼고 있고, 지금 당장 놓지 않으면 이 손의 주인 역시 고소하겠어."

고소라는 말에 가람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경찰이 내민 조서에 지장도 찍었다. 그리고 여전히 통곡중인 모친을 모시고 출장소를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아무리 집적거려도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던 은미였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아무리 그렇게 만져대도 아무런 뒤탈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은 사정이 달랐고, 그는 이런 변화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감히 신고한 은미와 재수없게 여자 변호사까지 데리고 나타난 한석이라는 인간이 증오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한석은 지상으로 올라가 길 한 편에 세워둔 은색 차로 가서 은미를 조수석에 태우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은미는 안전벨트를 매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버클이 홀더에 제대로 끼워지지 않고 몇 번이나 덜컥거렸다.

"은미야, 잠깐만."

한석은 몸을 돌려 은미의 벨트를 채워주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은미의 앞을 오가면서 어쩔 수 없이 가슴 부분을 손등으로 스칠 뻔했다. 그러자 한석은 조심스럽게 팔을 높이 들어 닿지 않도록 주의했다. 은미의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안도와 아쉬움이 그녀 안에서 오가고 있었다. 차가 출발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은미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한석은 아직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은미를 돌아보았다.

"많이... 놀랐지?"

그의 말투는 정말 걱정이 가득했다. 은미는 그의 말투에 다시 한 번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조금요."

"휴우. 정말 미안하다... 저런 놈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남자의 수치야. 남자로서, 내가 사과할게."

고개를 푹 숙이는 한석을 향해 은미가 손을 내저었다.

"오빠가 왜 사과를 해요. 그러지 마요. 가람이의 잘못이지 남자들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하아... 나 신입생 때도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일 저지른 놈은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피해 입은 동기 하나가 그만두고 다른 친구는 휴학하고 그랬거든. 그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어. 부디 넌 이런 일,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일에 휘둘리지 말고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한석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그녀였지만, 그것은 합당한 분노였고 그녀의 적을 향한 분노였기에 그녀는 딱히 무섭다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더 든든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걱정 마세요. 전 당당하게 살기로 했으니까요."

"그래. 안 그래도 요새 밝아진 모습이라 보기 좋아."

"저...정말요?"

생각치도 못 했던 한석의 칭찬에 그녀는 얼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응. 전에는 좀 주눅이 들어 있다고 할까. 그래보였는데 지금은...."

"지금은요?"

기대감 가득한 그녀의 재촉을 받고 한석은 위아래로 은미를 훑어본다.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고 표정도 좋고..."

그제야 은미는 오늘의 불미스러운 일을 모두 잊고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은미는 말했다.

"고마워요."

"나한테 고마워하지 말고 효진이한테 말해. 난 그저 효진이가 빌려준 차에, 빌려준 변호사를 거기에 데려다 줬을 뿐이야."

"아뇨. 전 오빠한테 고마워하고 있어요."

"응?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은미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그러쥐고 말했다.

"제가....아니, 전 굉장히 컴플렉스를 느끼며 살았거든요. 남들보다 좀 더 그렇고... 시선도 신경 쓰이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몸을 하고 있는 것 때문에 늘 숨죽이고 몸을 감추고 살았어요. 그러다 만났어요. 제가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요.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했어요. 오빠한테 지금 이런 칭찬을 듣는 건 순전히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

"그게 누군데?"

은미는 그제야 한석이 참으로 눈치코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평상시에도 효진이가 둔팅이 한석이, 얼빵이 한석이라고 놀리곤 하는데 이 정도면 가히 만성체질이며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조금 샐쭉해져서 말했다.

"누구겠어요?"

"글쎄?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은미가 보기에 이건 한석이 그녀를 놀리려고 모른 척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에휴. 조금 전에 제가 누구한테 고맙다고 했죠?"

"나한테."

"그럼 그게 누구겠냐구요."

"그게 누구냐고 내가 너한테 물어봤잖아."

"아이, 진짜!"

은미는 한석의 머리를 확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왔다. 거기에 파묻었다.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뭉글뭉글한 것의 정체를 깨달은 한석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와중에 은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느껴져요? 오빠한테 두근거리는 제 가슴이?"

"크.....크게, 커다랗게, 아니, 많이 두근거리고 있구나....."

한석은 상체에 힘을 줘서 파묻힌 가슴골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석을 보니 은미는 조금 답답해졌다.

"만.....만져주세요."

"응?"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말을 하긴 했지만, 워낙 개미소리만하게 말한 터라 한석의 귀에 잘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미는 아까 지하철에서 소리 지른 기운을 박박 긁어모아 한석을 향해 소리쳤다.

"제 가슴을 만져달라구요! 오빠!"

"어억... 그...그래."

한석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은미의 가슴을 덥석 쥐었다.

"아까... 오빠가 제 남자친구라고 해주었을 때... 절 감싸고 그 아줌마에게 대들었을 때.... 정말 두근거려서 혼났어요. 사실 지금도 두근거리고 있고... 카페에서 오빠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고 그랬단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단둘이 차에 있는 것만 해도....하윽...."

한석이 둔팅이이긴 하나 그렇다고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손은 단순히 은미의 가슴을 만지고 있기만 하지 않았다. 가슴이 그려내는 라인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쓰다듬어 보고 단단한 캡 너머 담겨있는 뭉클함의 기원을 찾아 조금씩 압박을 가하면서 주물러 본다. 은미는 자신의 몸이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는 걸 느꼈다. 아주 예전에 가람이에게 억지로 가슴을 보여주고 나서 그가 치근거리며 만졌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사랑받고 있었고 그녀 역시 사랑받고 있었다. 온몸이 짜릿해져 오는 감각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런저런 옷을 입게 된 거나.... 카페에서 그런 유니폼을 갖추게 된 것도...... 오빠에게 카페에서 책을 읽으시라고 한 것도...... 전부 다......"

"은미야...."

"사랑해요. 오빠. 정말로 좋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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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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