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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41화에서 이어집니다.)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어보았는데 한참 신호가 가도 전혀 받지를 않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르긴 몰라도 어제 술을 먹이는 게 아니었다. 곡주는 술이 아니라는 우리 엄마의 엉터리 논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직접 그렇게 당해놓고도 정신 못 차린 거다.
시계를 봤다. 수업시간이 다 되어간다. 프로젝트 수업이라 따로 출결은 안 볼지도 모른다. 3시간짜리 수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3시간 다 쓰지는 않는다. 일단 참석을 했다가 조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따로 빠져나가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무럭무럭 일고 있는 불안감은 빨리 유진에게 가 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주저할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게다가 이따가 시간이 나면 조 모임에 참석하기로 마리와 약속도 해두었다. 마리가 나를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서 공대 쪽을 쳐다봤다. 자랑이라면 자랑이고 고지식하다면 고지식한 거겠지만... 난 여태껏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다. 괜히 수업에 빠졌다가 그게 꼬투리 잡혀서 장학금 심사에서 탈락하는 일 따위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지.....'
발걸음이 선뜻 내딛어 지지 않았다. 왼쪽으로 가면 공대 건물이지만 오른쪽으로 가면 후문 방향이다.
'으아아아아...'
머리통을 박박 긁었다.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다. 생기 없는 유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미 녀석에게 가보기로 마음은 먹었다. 문제는 수업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난 일단 수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유진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대 실험실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수업 시작을 기다렸다. 같은 조원인 두 녀석은 둘 다 3학년이라 내가 조장을 맡았다. 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프로젝트 방향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시간이 되니 조교가 들어와서 출결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아. 들어오길 잘했군.
그때였다.
"아! 늦었습니다!"
출석 체크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실험실 뒷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늦은 주제에 배짱도 좋군...이라는 생각으로 돌아보았다가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저 인간도 이 수업 듣는 거였어?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건 저 쓰레기 같은 놈이 나랑 한 조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교에게 항의라도 해서 조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조는 다들 네 명씩인데 우리 조만 세 명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야. 잘 부탁한다. 존나 모범생 최한석 씨? 너만 믿고 있으면 에이뿔은 문제없겠네. 안 그래?"
재윤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흘리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몹시 기분이 상한 나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전원 다 함께 해야 하는 프로젝트 수업이니까요, 재윤 선배. 착실하게 임해주세요."
"이 새끼. 여전히 재미없게 사는구나? 응?"
"선배처럼 난잡하게 살지 않는 것뿐이죠."
나도 모르게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재윤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히히 웃고 말았다. 3학년인지라 영문을 모르는 나머지 조원들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나와 재윤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보드의 작동 원리를 먼저 규명하고 목표치를 선정합니다. 첫 번째로 제출할 건 이번 학기 내에 여러분이 만들어낼 보드의 사용처, 목적, 그리고 상세한 설명 등을 담은 리포트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해당 리포트를 요약 정리한 OHP를 발표하도록 합니다. OHP 안 하고 프레젠테이션 파일 가져와서 발표 하실 조는 미리 말씀해주시구요."
수업이 시작되고 이번 학기동안 진행될 프로젝트의 도입부에 대한 조교의 설명이 이어졌다. 평가와 직결되는 항목이기 때문에 하나도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였다. 노트에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저 맞은편에 앉아 후배 하나를 붙들고 노닥거리고 있는 인간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
"야, 진짜 꼬시기 쉬운 애들은 예대 애들이 아냐. 문과대 애들 얼마나 어리바리한지 모르지? 걔들이 진짜 공부만 하고 대학 붙어서 들어온 애들이 태반이거든. 특히 기숙사생 애들. 원래 조금이라도 놀 생각 있는 년들은 기숙사 안 들어가. 그러니 기숙사 애들 잘 꼬셔 술 몇 잔 먹이면 바로 골뱅이 되는 거거든. 골뱅이 몰라? 이 새끼, 괜히 모르는 척하지 마, 인마. 푸하하하."
내 옆에 앉은 경태라는 후배 녀석은 내가 하듯 잠자코 조교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고 마레기 옆에 앉은 재민이라는 녀석은 꼼짝없이 마레기의 노가리 까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조교가 밖으로 나가고 조별 토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마레기의 쓸데없는 짓은 여전했다. 토의 참석은 고사하고 괜한 사람까지 제대로 못 하게 막고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결국 한마디 했다.
"선배. 지금부터 역할 분담 할 건데 신경 좀 써주세요."
"니가 다 알아서 해, 인마. 조장은 왜 뽑냐. 그런 거 다 알아서 하라고 뽑는 거 아냐?"
키득거리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주워 삼키는 저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럼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경태랑 재민이는 자료 조사 해오고 제가 발표 준비할 테니까 재윤 선배는 리포트 써 오세요."
"어, 뭐야? 리포트도 조장이 써와. 발표할 사람이니까 미리 준비하는 셈 치면 되겠네."
"그럼 선배는 뭐하게요?"
"나? 요렇게 꼽사리로 있다가 학점 따가는 거지, 뭐. 별거 있나."
저 혼자만 웃기다고 연신 키득거렸다. 3학년 후배들은 내 눈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재윤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잠시 후,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맞다. 니 요새 맨날 옆구리에 여자 끼고 다니더라? 그 뭐더라? 마리인가... 마리아인가. 그 부산 애 말야. 혹시 벌써 땄냐?"
"뭐라구요?"
"아직 안 땄으면, 내가 먼저 따도 되냐? 예전에 내가 부산해양대 애들 꼬셔서 존나 해먹었잖아. 그쪽 애들이 질이 참 좋아. 질이."
더는 못 참겠다.
"........그럴 거면 나가세요."
"뭐?"
"나보고 조장이라면서요? 조장의 권한으로, 선배랑은 도저히 한 조 못하겠으니까 나가주세요."
목소리를 올리면 더욱 분통이 터질 것 같아서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여태 이죽거리던 재윤은 표정이 변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못 나가겠다면?"
".........."
"안 나가겠다면? 씹새야. 왜? 너도 니 동기 새끼처럼 나 한대 치게? 엉?"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주시죠."
"말로 하지 말고 한 대 쳐봐, 새끼야. 니놈도 콩밥 먹어볼래? 아니지. 준규 그 새끼는 콩밥이 아니라 짬밥 먹으러 갔구나? 응?"
쾅!
실험 테이블이 저 인간 면상이라고 생각하고 내리쳤다. 사람을 치는 건 예전의 그 술집만으로 족했다. 떠들썩하던 실험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다른 조들도 전부 우릴 보고 있었다. 나는 재윤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선배면 선배답게 행동해주세요. 일단 조교에게는 우리 조는 세 명뿐이라고 이야기해두겠습니다."
"뭐? 이 개새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재윤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뜯어말렸다. 의자와 테이블을 걷어차며 발광하는 마레기를 뒤로하고 실험실에서 나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이 수업을 수강취소 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3학점짜리 전공이고 2학기에 따로 있는 수업도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공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혹시나 싶어 학관으로 가보았지만,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유진이네 아파트로 향했다. 집으로 가서 벨을 눌러도 유진이가 나오질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아.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이네 집 현관은 넘버락 시스템이었다. 전날 유진이를 데려다 주면서 녀석이 누르는 번호를 무심코 봐버리고 말았었다. 외우기도 심플했다. 이 집 전화 번호 뒤의 네 자리였으니까. 번호를 누르니 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아."
집 안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유진이를 불러보았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안처럼 황량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가 유진이 방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하고 나서 문을 살짝 열었다.
"나, 한석인데... 들어간다?"
대답은 없었다. 끙끙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문을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조금 황량했다.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맞은편에 옷장 하나. 그게 전부였다.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벽에 연예인 브로마이드 한 장도 붙여놓을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참 담백한 방안이었다. 방 전체에서 느껴지는 인상이 참으로 녀석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장식이라면 장식일까. 어디서 많이 본 눈만 커다란 인형이 창가에 놓여 있었다. 그 아래 침대에는 유진이가 이불을 둘둘 감싼 채 누워있었다.
"유진아. 자니?"
침대로 다가가 살펴보니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하나 가져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숨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깨어있는 건데 아무 말이 없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어깨를 짚고 살짝 흔들어보았다.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아저....씨?"
"알아보겠냐? 어디가 안 좋아? 속 많이 안 좋아?"
"추워요....."
"춥다고? 감기인가?"
손을 이마에 대보았다. 불덩이 같았다. 어제부터 어쩐지 몸이 뜨겁더라니. 몸살이 분명했다. 이불을 잡아당겼다. 녀석이 이불을 놓지 않아 잠시 끌려왔다.
"춥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안 돼. 너 몸에 열을 내려야 된다고."
"추운데....."
"허이구.... 집에 혹시 해열제나 뭐 그런 거 있어?"
고개를 저었다.
"밥은 먹었어?"
다시 한 번 도리도리.
"빈속에 약 먹기는 좀 그렇고... 일단 뭐라도 좀 먹은 다음에 약 먹자. 그 전에 몸에 열 낮추는 게 우선이야."
그제야 고개를 좀 끄덕였다. 땀에 절은 머리와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온몸이 땀투성이일 거 같았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몇 장 더 가져왔다.
"먹을 거 있나 찾아볼 테니까 넌 그 사이에 옷 갈아입고 있어. 새 옷 입기 전에 수건으로 몸 좀 닦고. 땀 난 채로 있으면 더 안 좋아."
유진은 천천히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으로 가서 뒤져보니 다행히도 밥통에 밥이 좀 있었다. 냄비 하나를 꺼내 밥과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간장을 찾았다. 밥과 물, 간장만 있으면 미음 정도는 쑬 수 있다.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는 놈이지만, 어렸을 때 엄마가 이런 식으로 미음을 만드는 걸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주스 같은 것도 제법 있었다. 주스 하나를 꺼내놓고 다른 걸 살폈다. 식재료도 있는 거 같긴 한데 내가 조리할 만 한 건 없었다. 밥이 어느 정도 풀어지도록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였다. 한참 저어보니 어느 정도 풀어진 것 같아 가스 불을 껐다. 유진을 불러서 먹여야겠다고 생각해 방으로 갔다.
"옷 다 갈아입었어?"
방문을 두드리고 물어보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 들어간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다시 잠들었나, 설마? 행여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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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일을 많이 벌려놓아서, 한동안 <더블데이트>를 쉬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벌인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 탑툰 웹소설 <해피타임> 연재
- 빅툰 사이트에 <해피타임TOON> 스토리 제공
- 레진코믹스 웹소설 <식물소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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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번 루트는 주 3회 이상 연재 예정입니다.
당분간 다시 잘 부탁드립니다.
Route 3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