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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침대 위에는 유진이가 반쯤 벌거벗고 있었다. 문을 연 나는 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상태로 약 2초간 멈춰 있었다.
"흐음. 미...미안!"
황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분홍색 브래지어에 담긴 실팍한 살덩어리 위쪽까지 똑똑히 봐 버린 후다. 그러나 방문 너머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에는 나를 책망하거나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저씨.... 좀 도와줘요."
"뭐?"
"등에 손이... 안 닿아요...."
"그래도 내가 어떻게..."
"빨리요,....."
"그럼... 지금 들어간다?"
여전히 죽어가는 목소리다. 다시 한 번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젖은 티셔츠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유진이 있었다.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상체가 몹시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애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일단 곁으로 다가갔다.
"티....하나.... 벗는데....힘..... 다 썼어....요."
"원래 젖은 거 벗는 건 좀 그렇지. 돌아봐봐."
침대에 나란히 앉아 녀석의 몸을 돌려 등을 대했다. 땀이 흥건한 등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브래지어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등만 닦아 내려갔다. 그런데 유진이가 팔을 뒤로 돌리더니 후크를 풀었다.
"에에....!"
브래지어라도 하고 있다면... 그래, 그 뭐시다냐,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 등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이러면 경우가 완전히 달라졌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것도... 다.... ..젖었네요..."
"그...... 그러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애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 아닌가. 앙증맞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 브래지어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유진의 등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앞 쪽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경이 펼쳐져 있겠지.
으으.. 상상은 하지 말자. 상상은. 이 녀석은 지금 아프다고. 수건으로 등 전체를 깨끗이 닦았다. 어깨와 옆구리를 닦을 때는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아래는 파자마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고무줄로 된 부분이 조금 내려가 있어서 녀석의 분홍색 팬티가 살짝 엿보였다.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어서 서둘러 마무리하고 일어난다.
"자, 등은 다 닦았으니까... 앞은 네가 닦으렴."
등을 다 닦고 나서 일어나려는데.... 세상에나.
"잠깐만요."
내게 등을 보이고 있던 유진이가 몸을 돌린다. 이...인마! 너 지금 위에 아무것도 안 입은 상태란 말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그쪽을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유진은 태연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마저.... 닦아주세요......"
"그....그게....."
"왜요? .. 설마... 아픈 사람을 상대로 흥분을 하는 거예요?"
"그럴 리 없잖아. 이 바보야."
이 녀석 정말 아픈거 맞나. 이럴 때만 말투가 아주 또박또박 이다. 물론 꾀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몸의 열이나 땀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흠흠. 알았어. 빨리 닦아줄게."
"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아 녀석의 앞부분을 닦기 시작했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여자의 알몸은 남자로 하여금 달아오르게 만드는 묘약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평소보다도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지만 두 뺨만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만히 감고 있는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녀석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해요... 지금 감상하는 거예요?"
"아, 아냐!"
얼굴 아래쪽으로는 안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안 보고 닦으려니 더 이상했다. 제대로 시선을 몸에 두고 수건으로 녀석의 몸 전체를 닦아주었다. 작은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둥근 유방도, 그 위에 살짝 얹어놓은 듯한 분홍빛 유륜과 유두도.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따라 들락날락 하고 있는 뽀얀 뱃살 부분도 남김없이 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만큼 빨리 뇌리에서 지워야만 했다. 오래 보고 있으면 나까지 열이 옮아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수건 너머라고는 하지만 살결을 따라 움직이는 내 손에 와 닿는 그 느낌이....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다.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내 말초감각 하나하나를 일깨웠다. 여자 알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왜 이럴까.
새삼 내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혹시 거칠어지진 않았을까. 이런 걸 가리켜서 속된 말로 "차려놓은 밥상"이라고 한다지. 아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망발을...
그러나 아주 야한 영상을 가리켜 "살색 영상"이라고 표현하듯이 지금 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살색 몸. 여리디 여린 살색 몸. 분명 몸이 좋지 않아 흘리고 있는 땀마저도 마치 그런 은밀하고도 거친 행위 후에 몸에서 흐르는 땀을 연상시키는 아찔한 광경이었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애써 억눌러가며 기계적으로 녀석의 몸을 닦아냈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유진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온 신경이 거기에 쏠리다 보니 난 어느 새 주변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도.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오는 소리도.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또한 듣고야 말았다.
"지....지....금......... 뭐 하고 계신 거죠? 최. 한. 석. 씨?"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에 웬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라 선영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그녀는 뚜벅뚜벅 그대로 내게 걸어오더니 손을 높이 들었다.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 손을 힘껏 휘둘렀다.
찰싹-
손바닥이 아니라 숫제 주먹으로 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얼얼한 충격이었다. 내 얼굴이 홱 돌아갔다.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사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다. 손목을 잡아 나를 때리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맞는 것이, 어쩌면 더 속이 편할 거란 걸 알았던 걸까.
유진이 당황하여 선영을 향해 일어서려고 했다.
"언니! 그게 아니라!!"
"넌 그냥 있어."
"언니!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악을 썼지만, 선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을 밀어냈고, 대신 내 멱살을 잡더니 들어 올렸다. 바싹 마주한 얼굴과 그 눈동자는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말해!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짓이야!!!"
"선영 씨. 여기에는 오해가...."
다급히 변명을 해봤지만, 생으로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날 다그치는 선영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오해? 지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뭔 놈의 오해야!!!"
물론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긴 했다.
여기는 어린 여자애 혼자 있는 집이고, 난 원래 여기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누가 초대한 것도 아닌데, 잠긴 문을 혼자 열고 들어왔다. 비록 상반신뿐이라고는 하지만 알몸으로 된 여자를 마주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이것이 음란한 상황으로 돌입하기 직전인지 그렇지 않으면 돌입하고 난 후 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맹세코 나는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야 어땠는지 몰라도.
"언니! 그게 아니라니까!!"
옷도 채 입지 못한 유진이가 선영에게 달려들어 해명하려고 하였지만, 선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틀어쥔 멱살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자가 대체 뭘 먹고 평소에 단련을 하시기에 이렇게 힘이 좋냐. 선영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애초에 당신에게 맨 처음 경고했잖아! 그리고 당신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고! 그런데 이게 대체!"
보고야 말았다. 나에게 악을 쓰며 외치는 여자의 눈가에 맺힌 이슬방울을. 맞고 혼나는 건 나인데, 어째서 그녀가 우는 걸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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