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1 / 0471 ----------------------------------------------
Route 3
머리가 식었다. 내 잘못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부당한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놓고 말해요."
처음에는 당황해서 멍하니 뺨을 맞고 말았지만, 생각할수록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뗐다. 뺨은 여전히 얼얼했지만, 다른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날 오해하기 이전에, 오해할 상황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자기합리화라고 해도 좋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제대로 돌봐주기는 한 겁니까?"
선영은 움찔했다. 내친 김에 계속 이야기했다.
"애엄마라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아 애를 혼자 두고! 유진이 아낀다고 하는 당신도 애를 혼자 두고! 그래요! 내가 얘 옷 벗으라고 했어요. 땀에 절은 옷 그대로 입고 있으면 열이 더 심해지는데 그럼 그걸 그냥 냅둡니까?"
선영은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기세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다 큰 여자 애의 알몸을 보고 시시덕거리고 있던 걸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시시덕거리고 있었습니까! 닦아주고 있었지!"
"어쨌든 알몸의 애를 더듬고 있었던 건 맞잖아요! 이 변태 같은...."
"변태? 대체 누가.... 애초에 그깟 술집 나가는 거 말고 애나 보고 있었으면 이런 일까지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깟 술집?!"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사나운 선영의 눈꼬리가 더 말려 올라갔다. 워드프로세서에는 Ctrl-Z와 Delete키가 있어, 잘못 쓴 표현을 수정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말에는 그렇게 편리한 장치가 없다. 한 번 던진 말은 그대로 시위를 떠난 날아간 화살이 되어 상대를 쏘아 맞출 뿐이다. 내가 쏜 화살은 선영의 자격지심에 제대로 꽂혀버렸고 안 그래도 열 받아 있던 그녀의 신경을 더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버렸다.
"그깟 술집이라니! 그래, 나나 이 애 엄마나 다 술집 여자야! 니 같은 자지 달린 새끼들에게 알랑방구 뀌고 술 팔고 있다고!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 그걸로 돈 벌어서 살고 있는 게! 죄야? 죄냐구!"
악을 쓰듯 외치는 그녀의 말에는 이미 물기가 섞여 있었다. 내심 미안했지만, 대화의 기세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나 마찬가지여서 물러날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사과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누가 죄랬어요! 일단 있는 애나 잘 보고....."
"누가 애를 보기 싫대? 곁에 있어 주고 싶어도 못 있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니깟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술집은 냅두면 알아서 굴러가는 줄 알아? 다 관리가 필요하고 신경 제대로 안 쓰면 망해버리는 거라고! 그런 거 알기나 해? 아직 사회물도 안 먹어본 새끼가 어딜..."
"새끼? 이 여자가 진짜 말이면 단 줄 알아?"
덩달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내가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는 순간, 침대에 쓰러져 있는 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까지도 열이 펄펄 끓던 녀석이 이제는 완전히 축 늘어져서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다.
"유진아!"
선영이 나를 제치고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 보았지만, 감겨있는 유진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선영은 유진을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유진아, 유진아!"
황급히 겉옷을 벗어 유진을 덮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영에게 외쳤다.
"그러고 있지 말고... 차 가지고 왔죠?"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유진이를 안아 들고 일어서자 선영은 황급히 따라 나섰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밖으로 나가 차를 아파트 앞으로 댔다. 유진이를 안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마자 미친 총알처럼 차가 튀어 나갔다. 평소라면 날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좀 더 빨리 달리라고 마음속으로 주문했다.
다행히도 병원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가까운 응급실로 데려가 수속을 밟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느라 제정신을 못 차리는 선영을 대신해서 내가 녀석의 등록을 대신했다. 급박한 우리들의 마음과는 달리 의사나 간호사들은 꽤나 느긋해 보였다. 유진의 상태를 본 의사는 큰 병이 아니라 몸살이 온데다가 탈수 증세가 겹쳐 기절한 거라고 설명했다.
"좀 쉬면 괜찮아 질 겁니다."
라고 말하는 의사 멱살을 잡을 것처럼 달려든 선영은 언제 깨어나냐고 물었다. 의사는 곧 깨어날 거라고 대답하고 돌아갔다. 의사 말대로였다. 유진은 링겔을 맞고 좀 누워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녀석은 눈을 뜨자마자 선영을 찾았다.
"언니...."
"그래, 유진아. 언니 여기 있어."
한시도 유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선영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유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선영에게 말했다.
"선생님.... 뭐라 그러지 마...."
"유진아..."
"내가 닦아 달라고 한 거야.... 응? 그러니까...."
녀석의 입술이 말라있어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눈 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런 소리라니, 녀석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애달팠다. 녀석의 발치에 서 있던 나는 일부러 인상을 쓰며 유진에게 다가가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인마. 그러니까 내가 너보고 닦으라고 했잖아. 괜히 오해 사게...."
녀석은 기운 없는 얼굴에 애써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제 가슴 괜찮지 않았어요?"
"얌마!"
헛소리를 잘하는 걸로 봐서 완전히 다 나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병원 침대에 드러누워있는 녀석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휴 소리만 내뱉고 돌아가기로 했다. 선영이 따라 나왔다. 그녀는 말없이 내 뒤를 따르다가 병실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조용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과는 하지 않겠어요."
응급실 출구 복도에서 선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하아. 바라지도 않아요."
오가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 말을 이었다.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깐 저도 말이 심했구요. 저는 사과하겠습니다."
".....원래 다 그런 거니까요. 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 그렇게 말하니 그쪽은 특별히 잘못 없어요."
어두운 병원 복도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자 선영의 얼굴이 잘 보였다. 그녀의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눈화장도 엉망이었다. 이 여자는 대체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우는 걸까. 손수건이라도 있다면 건네주고 싶지만 요새는 손수건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내가 대체 손수건을 어디서 잃어버렸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선영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날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석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네? 무슨...."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봐도 이 이야기만은 꼭 해야겠어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선영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미안하지만.... 유진이 과외는 그만 둬 주세요."
"뭐라구요?"
선영은 눈가를 닦아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난번 같이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아까 유진이가 깨어나자마자 한 말이 뭔지 들었죠? 바로 한석 씨를 염려하는 거였어요."
"그게 과외를 계속 하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상관있어요."
선영의 눈빛은 결연했다.
"사실 유진이는 성격 탓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성격으로 자라 왔어요. 그런 그 아이가 성인 남자에게 자신의 곁을 허락한다는 게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어요. 유진이는 당신에게 너무 빠져들었어요. 당신을 염려하고 있고... 당신을 너무 생각하고 있다구요."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태 유진이가 내게 보여준 모습에서 어렴풋이 그 기분을 느껴온 게 사실이었다. 솔직히 어제 현관 앞에서의 대화도 그렇고 오늘 집에서의 행동도 그렇고.... 보통 평범한 여고생이 할 만한 행동들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인위적으로 막는다거나 억지로 끊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래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처한 상황이 조금 특수해요. 아버지도 없고.... 다른 형제도 없죠. 당신에게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서.... 그건 걷잡을 수 없을 거예요. 벌써 조금씩 그러고 있기도 하구요."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있기에 선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 이건 우리들의 잘못이긴 한데 ...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더 육체적인 것만 보고 자란 아이라서 아주 조금의 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전 그게 두려워요."
선영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죄책감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거기에 놀아나면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로 잡아줘야 하는 건 어른의 몫이다. 그게 어른의 의무이다.
너무 어른스럽게 굴던 유진에게 휘말려 상대를 성인처럼 대해버린 건,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그다음 순간, 선영이 비통한 목소리로 내어놓는 말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유진이가 유미 언니처럼.... 아니, 나처럼 되는 걸 원치 않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