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64화 (364/471)

0364 / 0471 ----------------------------------------------

Route 3

다음 날 아침,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쿵쾅쿵쾅하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잠에서 덜 깬 나는 비몽사몽 와중에 외쳤다.

"누구세요!"

"저에요, 리사!"

그래, 리사구나. 아침부터 듣기에 참 맑고 경쾌하며 아름다운 목소리이긴 하지만... 오늘은 늦잠 자도 되는 토요일 아닙니까! 한창 잘 자고 있었는데.... 그렇게 문을 두드려 대다니.... 난폭하기도 해라.

"아침 드세요!"

난폭하다는 말 취소. 어찌 사람 된 도리로 밥 주는 사람에게 험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꿀맛 같은 단잠에서 깨어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세를 많이 진 리사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비척비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 팔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머리 하나가 팔을 놔주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눈을 비비고 면면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정신이 조금 돌자 그제야 사태가 파악됐다.

"마리?"

녀석은 내 팔 하나를 끌어안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면서 뭔가에 눌렸다는 기분은 들었는데, 그게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리사 목소리에 한층 더 당황해버렸다. 리사와 얼굴이 똑같은 녀석은 지금 여기 누워있고, 여기 누워있는 마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리사는 밖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당황해서 현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리...리사 씨! 그게, 제가, 지금!!"

"아직 잠이 덜 깨셨군요."

"아니, 일어나긴 했는데 얘가 안 일어났.......아니, 그게 아니라!"

"천천히 씻고 옷 입고 나오세요. 저희가 기다릴게요."

저희...라고 하면 리사와 예린, 둘을 전부 말하는 건가? 한 놈은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이 녀석은 대체 언제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온 거야? 혹시나 싶어서 이불을 들춰봤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웃통을 벗고 자고 있기는 했지만,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 마리는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몹시 아쉽게도 별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으아아아아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쉽기는 뭐가 아쉬워!! 머리를 흔들어 요상한 생각을 빨리 털어내 버렸다. 마리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팔을 빼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마리를 깨워야 되나 어쩌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을 깨워서 같이 리사네 집으로 간다는 건 지난밤에 동침했다는 걸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치미를 뚝 떼고 혼자 갔다. 앞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안에 들어가자 잔칫집 밥상이 놓여 있었다.

"이게 웬 진수성찬입니까?"

"한석 씨 오늘 생일이잖아요. 제가 새벽부터 준비했어요."

리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미역국이 놓여 있었다. 잡채나 다른 것도 그렇고 거참... 다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인데 아침부터 이렇게나 차려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음... 어제부터 리사 씨에게 너무 신세만 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는데요."

"자꾸 신세라고 하시니까 좀 서운하네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리사가 수저를 내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정말 말 그대로 어여쁜 새색시 같았다. 이 자리에 예린만 없다면 콱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근데 마리는 아직 안 일어났나 봐요? 깨워서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푸홧!-"

미역국을 한 입 떠먹으려다가 체할 뻔했다. 숟가락을 손에 들고 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생글거리는 표정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리사는 날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마리가 그쪽에서 자지 않았나요? 걔가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편이라 흔들어 깨우셔야 돼요."

"그....그.....게 그러니까요......"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리사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깨울까 하다가 아직 옷도 다 입지 못하고 둘 다 알몸으로 있으면 서로 난감할 것 같아서 그냥 안 들어갔는데."

"아뇨! 저희는 옷을 모두 다 입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옷을 입고 하셨어요? 꽤나 매니악하시네요."

지금 리사가....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매니악한 건 내가 아니라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그쪽 같은데? 대체 나랑 마리랑 어젯밤에 무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니구요... 그냥 그게 그러니까.....저흰 잠만 잤어요! 진짜예요!"

"에이. 젊은 남녀가 한 침대에서 몸을 맞부딪히고 있는데, 그게 쉽나요?"

"아뇨! 진짜 쉬웠습니다! 전 그냥 술 취해서 먼저 잤고요! 마리가 대체 언제 제 침대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머, 술김에 그러셨구나. 알았어요. 뭘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그러세요. 살다보면 누구나 그럴 수도 있죠. 마리는 제가 깨워올게요."

리사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사뿐하게 걸어 나가는 저 뒷모습을 보면서 덜덜 떨었다. 분명히 나보다 어린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는 어쩐지 꼼짝을 못 하겠다.

상 건너편에 앉아있는 예린은 단 한마디도 안 하고 밥만 묵묵히 먹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이 뻘쭘함과 당황스러움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나 문밖에서 쌍둥이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졸려 죽갔는데.... 내 이따 묵으면 안 되나?"

"안 돼. 차려놨을 때 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어."

"히잉."

잠에서 아직 덜 깬 모양으로 뒤통수를 북북 긁으면서 나타난 마리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리사가 밥그릇과 수저를 챙겨주었다. 내 앞에 놓인 밥그릇에 담긴 밥은 실로 거대했다. 높이가 어째 다른 이의 두 배는 되는 거 같다.

"리사 씨, 왜 이렇게 많이...."

"어머, 어젯밤에 이런저런 수고 많이 하셨을 텐데 많이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여전히 생글거리며 특히나 "많이"에 악센트를 두는 리사에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생일이시잖아요."

계속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는 리사를 상대로 도저히 눈싸움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거두고 고개 처박고 밥만 먹기로 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데이."

"감사합니다."

자리가 바늘방석이라는 것만 차치한다면 생일 날 아침에 이만한 대접이라니, 나는야 정말 행복한 녀석이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 엄마가 차려온 음식보다도 더 맛있었다고나 할까. 이래서 아들놈은 키워봐야 다 헛방이라는 건가 보다. 다만 끊임없이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리사의 행동이 꽤나 부담스러울 따름...

맛은 있었지만, 거북하기 그지없는 식사를 간신히 마쳤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배가 부른 걸로 보아 전부 위장에 들어가긴 잘 들어간 모양이었다. 리사는 후식으로 쿠키를 꺼내오고, 예린이 커피를 끓였다. 리사가 커피 잔을 건네며 물었다.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에... 딱히 없었는데요. 학교 가서 공부나 할까 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이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저 미소천사 리사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죽겠다. 원래 웃는 인상이기는 하지만, 지금 저 웃음은 뭐랄까.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놓고, 툭툭 건드리면서 웃는 그런 미소 같다.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쥐구멍을 찾고 싶은 건 확실하니까.

옆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마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너는 대체 왜 자기 집 두고 남의 집에서, 그것도 남의 침대에 기어들어가 자고 있냐고...

그러나 리사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모범생이시네요. 저희는 어디 놀러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순수하게 감탄을 표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한데 어째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리사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전에 마리가 여기에서 신세 지는 동안 남산에 다녀왔다고 하더라구요. 얘기 들어 보니 재미있을 것 같던데 같이 안 가시겠어요? 일정도 딱히 없으시다면서요?"

"그....그럴까요?"

거절을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라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여자들이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일단 나는 집에 돌아가 있었다. 어제의 흔적, 그러니까 먹다 남은 치킨과 빈 술병들을 치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와 썸씽은 없었던 게 확실했다.

아마도 내가 먼저 침대에서 잠이 들고 나서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가 마리가 기어들어와 같이 잠만 잤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남녀가 "같이 잤다"라는 게 단순한 sleep이 아니라 또 다른 s로 시작하는 단어로도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점에서 리사의 오해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차라리 진짜 하고서라도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 모르겠는데,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오해를 받아버리니 너무 억울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