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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예린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리사 쪽을 한번 쳐다봤다. 아직 아이스크림을 다 먹지 못한 리사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겠네요. 저희는 여기서 응원할게요."
내가 고등학생들 쪽으로 다가가 협상을 벌였다. 3대 3으로 반코트를 하던 녀석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각 팀에서 한 명씩 쉬겠다며 빠졌다. 나는 팔을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가고 예린은 안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갔다. 예린은 재킷을 벗었다.
가위바위보로 선공을 정하고 30점 내기게임을 시작했다. 기본 득점 2점으로 하고, 외곽 슛은 3점으로 정했다. 우리 팀의 선공이었다. 내 손에서 우리의 공격이 시작됐다.
"일단 천천히!"
드리블을 유지한 채로 바깥에서부터 안쪽을 살폈다. 원래 있던 고등학생 녀석들끼리는 맨투맨 마크가 붙었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전력을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예린이 내 쪽으로 왔다. 슛이야 방금 보았는데 수비 실력은 어떨까 궁금했다.
자랑 좀 하자면,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농구를 할 때에 과감한 돌파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바로 이 몸이다. 커버하는 예린을 등지고 외곽으로 서서히 돌다가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예린을 힐끔 살폈다. 안정적인 낮은 자세에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모범적인 마크. 쉽게 파고들기 어렵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농구 같이 격렬한 게임을 하면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니. 안경을 끼고 경기하는 사람은 봤어도,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 일단 몸으로 밀어붙이고 안으로 도는 척을 하다가 바깥쪽에 있는 팀원에게 패스했다. 예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사이에 돌아 들어가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림 바로 아래에서 손을 들고 외쳤다.
"여기!"
내 신호를 알아챈 팀원이 바깥쪽에서 내게 공을 던졌다. 높게 들어오는 패스. 점프해서 낚아채고 땅에 닿자마자 재차 점프하여 슛을 했다. 백보드를 맞고 들어간다.
"선배님! 파이팅!"
내 쪽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며 응원하는 마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린 팀의 공격이 시작됐다. 내 담당은 역시 예린. 드리블이 나쁘지 않았다. 안쪽을 향해 무리하게 돌파하려고 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 파고 들다가 외곽으로 공을 돌렸다. 한 명이 노마크가 되어서 그쪽에 신경이 팔린 순간 예린에게 공이 돌아갔고 순간적으로 내가 예린을 놓쳤다. 그녀가 가볍게 슛을 던졌다. 역시나 클린샷. 게다가 3점 라인 바깥이었다.
"언니! 파이팅!! 이기고 있어!"
이번에는 리사가 외치며 예린을 응원했다. 호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무래도 내 응원단은 마리이고 예린 응원 담당은 리사로 정해진 것 같다. 여자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불타올랐다.
그 이후로 경기는 주로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에어리어 안쪽으로 파고들어가려는 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막으려는 예린의 마크, 외곽에서 기회를 잡아 슛을 던지려는 예린의 찬스 노리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나의 움직임이 번갈아 펼쳐졌다.
점수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예린이라고 무조건 3점만 노리는 건 아니었다. 자기편에 볼 돌리는 것도 꽤나 정교했고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레이업도 시도했다. 고등학생들에게 공을 돌리는 동안에도 예린과 나의 몸싸움은 치열했다. 특히나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할 때는 거의 등짝을 비비다시피 하여 뛰어올랐고 에어볼 다툼은 싸움을 방불케 했다. 점프슛을 막으려 들 때는 공중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적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대가 여자라는 점 때문에 몸을 붙이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게임이 격화되면서 붙어보니 이건 뭐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봐주기는커녕 전력으로 부딪히지 않으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파워였다. 키는 나보다 좀 작을지 몰라도 점프력이나 몰아붙이는 힘은 남자 그 이상이었다.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후아...후아...후아...."
가볍게 한 판 뛰려고 했었는데... 이게 어딜 봐서 대체 가볍게 인지 모르겠다. 땀이 장난 아니게 흘렀다. 등에 달라붙는 셔츠의 느낌이 꽤나 거추장스러웠다. 아웃볼이 된 사이에 웃통을 벗어버렸다. 고등학생들 녀석들도 한 놈을 빼고는 다들 이미 웃통을 벗어버린 후였다. 봄 날씨치고는 맨살에 닿는 햇살이 꽤나 뜨거웠다.
예린을 힐끔 쳐다봤다. 물론 그녀도 재킷은 벗어놓은 터지만 그렇다고 안에 입은 드레스셔츠까지 벗지는 못했다. 예린도 꽤나 땀이 날 텐데 선글라스도 여전했다.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더울 지경이었다.
"꺄아- 선배님!! 파이팅!"
마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코트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멈춰 서서 구경하고 있을 정도로 게임이 재미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꽤나 잘 해주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예린과 나의 경쟁이 치열했다. 몸싸움에서는 내가 좀 더 낫고 슛 쪽에서는 예린이 앞서고 있었다.
다만 내가 웃통을 까고 나니 예린이 좀 당황하는 눈치였다. 몸싸움에서 될 수 있으면 안 붙으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왠지 치트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시합은 시합이다. 손오공도 웃통 까면 전투력이 올라가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새 점수는 26대 27.
30점을 먼저 내는 쪽이 승리. 우리 쪽은 아직 4점이 남았고 저기는 3점슛 한번이면 끝날 점수였다. 샤프 슈터가 있는 저쪽에서라면 단번에 끝내버릴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골을 무조건 넣고 다음 것을 막은 다음에 또 넣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마음이 급했다.
"형! 여기요!"
바깥쪽에서 날 부르는 녀석에게 볼을 돌리고 링 아래쪽을 향해 돌진했다. 수비가 막으려고 하기에 페이크 동작을 넣었다. 왼쪽으로 주춤하다가 쏜살같이 오른쪽으로 턴해서 파고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진로 상에는 예린이 서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꺄!"
"으악!"
내 어깨에 그녀 얼굴이 부딪혔다. 달려 들어가던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예린과 내가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히기 전에 내가 그녀를 끌어안고 굴렀다는 거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진 꼴이 웃기게 되었다. 졸지에 쿠션이 되어 버린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예린은 내 가슴팍에 안긴 채였다. 예린이 내 가슴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괜찮으십니까?"
"아, 뭐..... 그야......"
아스팔트로 된 바닥에 몸을 찧고 굴렀으니 멀쩡할 리가 있나... 온몸이 아팠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보니 예린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두 눈 가득 걱정을 담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없었기에 그녀의 눈을 처음 보았다.
이거 참 사람 미안하게 만드시네...라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바닥에 구르고 있던 선글라스를 주워들었다. 그대로 예린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자신이 선글라스를 벗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챈 그녀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내가 씌워주자 두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거였군. 이제 알았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예?"
쌍둥이 자매가 황급히 달려왔다. 두 사람 다 놀란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똑같은 얼굴이 더욱더 정말 판박이다. 어째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럽고 넘어진 꼴이 창피하기도 해서 벌떡 일어났다. 예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이 정도야 문제없.... 아야야....."
똑바로 서려고 했더니 오른쪽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제대로 짚고 설 수가 없을 정도였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하자 리사가 나를 부축했다.
"왜 그러세요? 많이 아파요?"
"어, 그게..... 좀......."
좀이 아니다. 눈물이 쑥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들 앞이라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잠깐 접질렸나 보죠.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리사의 부축을 받은 채로 벤치 쪽으로 가서 앉았다. 한때 우리 동네의 대표 센터로 군림했던 자존심이 처절히 망가지고 있었다. 역시 구두를 신고 농구를 하는 건 좀 무리였나. 내 양옆에는 마리와 리사가, 앞에는 예린이 서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새가 되어 굉장히 머쓱해졌다.
"농구하다보면 자주 이래요. 잠깐 쉬고 다시 뛰기도 하고 그러죠. 흔한 일이에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내둘렀지만, 리사의 표정은 반쯤 울상이었다. 이런 표정을 할 거라면 차라리 아침처럼 날 놀려먹는 표정이 더 나은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예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내저었다.
"제가 하자고 했잖아요. 예린 씨가 미안할 필요 없어요."
"참말 괜찮은 거지요?"
마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다. 그때 마침 공원 한편에서 웬 아저씨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마리에게 말했다.
"저 아저씨 되게 유명한 사람이야. 가서 구경해봐."
그러나 마리는 가지 않았다. 내 손을 꼭 잡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왼손은 마리가, 오른손은 리사가 꼭 붙들고 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움직일 수나 있나. 어차피 발목도 안 좋고 해서 그냥 편하게 앉아서 쉬기로 했다. 기타 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내 노래 한번 잡숴봐! 내 노래 한번이면~ 귀가 뚫리고~ 키가 커지고~ 얼굴도 잘 생겨지고~"
아저씨의 과장된 동작과 기타 연주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아저씨다.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인마! 넌 아저씨가 서서 노래 부르는데 넌 편하게 앉아서 구경하는 거야?!"
아저씨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사람들이 와하고 웃는 통에 나도 씩하고 웃으며 일어났다. 은은하게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제는 참을 만해졌다.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쌍둥이와 함께 구경꾼 인파에 섞여 들어간다. 마리가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해서 맨 앞으로 나아갔다.
길거리 공연하는 아저씨는 기타를 신 나게 치면서 무언가 빠른 곡을 불렀다. 곧 노래를 끝내더니 자신의 자작곡이었다면서 사람들이 안 따라 부른다고 불평을 했다. 사람들이 또 와하고 웃었다. 이후로도 아저씨의 입담과 노래에 사람들이 박수도 치고 웃고 하였다. 마리도 어느 샌가 그런 사람들에 어울려 아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 역시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내 오른손은 리사가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는 통에 박수를 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저씨의 원맨쇼가 이어졌고 끝 부분에서는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모금을 시작했다. 마리도 돈을 꺼내가지고 앞으로 나갔다. 아저씨가 동전을 가지고 온 꼬마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동안 리사가 내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하면서 귀에 대고 말한다.
"한석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사방이 시끄러웠기에 나 역시 몸을 굽혀 리사의 귀에 대고 말해야 했다.
"그렇다니까요."
그러나 리사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기어이 그녀는 나를 이끌고 다시 벤치로 돌아가더니,
"신발 벗어 보세요."
라고 요구했다. 이 좋은 날씨에 열심히 뛰어 댕기느라 분명히 잘 삭혀졌을 발냄새를 걱정하며 주저했더니 빨리 벗으라며 재촉했다. 별수 없이 벗었다. 내 발을 살피던 리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나...."
나도 깜짝 놀랐다. 발목이 무슨 공처럼 부풀어 있었다. 농구하다 발목 가볍게 접질린 적이야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쩐지 신발이 잘 안 벗겨지더라니. 리사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날 마구 야단쳤다.
"이래놓고도 괜찮다구요?"
할 말이 없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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