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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이제 봄이건만, 꽃피는 봄이라는 춘삼월이건만... 지금 이 병실에서만 살얼음이 착 퍼지는 느낌이 든다. 진원지는 리사였고 그 얼음에 갇힌 사람은 마리와 나, 예린이었다. 리사의 웬만한 말에도 꿈쩍 않는 마리지만 지금의 분위기만큼은 아무리 마리라도 이겨낼 재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자코 언니가 시키는 대로 짐을 풀고는 반찬통이나 그릇 등을 꺼내어 테이블에 차렸다.
그러고 나서 모두 모여 아침을 먹었다. 리사는 병원 밥은 맛이 없을 테니 앞으로 자신이 매 끼니마다 밥을 차려오겠다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그러실 필요 없다고,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왜 하느냐고 했겠지만, 극저온의 레벨로 쫄아있는 나는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적으로 밥을 퍼서 입에 가져갔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얼마 안 있어서 간호사가 찾아왔다.
"검사 하고, 진료 들어가실게요."
다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전 동안 엑스레이를 한 번 더 찍고 링거를 꽂고 붕대를 감고 석고로 대는 등의 진료를 받았다. 리사가 내 곁에서 부축은 물론이고 휠체어 미는 것도 그녀가 계속 도와주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따라오려고 하기에 간신히 뜯어말렸다. 병원 옆에 있는 의료기기 판매점에서 목발까지 사가지고 병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갔나 보네요?"
"네."
내가 침대에 눕자 리사가 링거를 옮겨 달았다. 링거 튜브에 달려있는 수액조절기를 만지작거리는 게 꽤나 익숙해 보인다.
"혹시 간호 공부 같은 거 하셨어요?"
"제가요?"
리사가 살짝 웃으면서 의자를 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럴 리가요. 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데요."
"아, 그래요?"
"후후.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요. 일 년 중에 따뜻한 때를 빼고는 병실에서만 내내 지냈어요."
"아아...."
병실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링거를 다루는 거나 하는 게 굉장히 능숙하다고만 생각했지 그럴 줄은 몰랐다. 하긴 병원에서 오래 지냈다고 한다면 그런 게 익숙할 만도 하겠다. 어제 병원에서 보여준 신경질적인 모습도 어쩌면 그녀의 아픈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닐까 싶었다. 리사는 천천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낳자마자 일찍 돌아가신 엄마 닮아서 그런 것 같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특별히 큰 병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구요. 그냥 몸이 약해서 계속 잔병치레하고 외부 활동은 많이 못 하고 그랬죠."
전혀 몰랐다. 물론 마리와 같은 나이일 텐데도 대학을 안 가는 거는 그냥 진학을 안 했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아예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니. 몸이 굉장히 안 좋았나 보다.
"그럼... 어떻게 지냈어요?"
"그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지냈는데요, 그것 때문에 바깥에 대한 환상이 정말 많았어요. 나중에 몸 좋아지면 해보고 싶은 걸 목록으로 적어보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도 집에 가면 어딘가에 노트가 있을 거예요. 1번부터 200번까지 번호를 붙여놓은...."
"그렇게나 많나요?"
"후후후. 한석 씨도 만약 침대에만 몇 달 동안 있어야 한다면 좀이 쑤셔서 못 견뎠을 걸요? 지금 못 하는 거, 나중에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막~ 왔다 갔다 할 거예요. 저절로. 저는 그런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전 같으면 별로 이해가 안 갔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제 입원하고 이제 겨우 만 하루가 될까 말까한 정도인데도 불편하고 짜증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앞으로 이런 생활을 일주일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했다. 하물며 몇 달, 몇 년이라야.... 휴우.
조용하고 차분한 듯 하면서도 불 같은 모습을 살짝 감추고 있는 리사의 성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예전 드라마 중에서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혹시 보셨어요?"
"아뇨. 전 TV를 별로 안 좋아해서...."
"저런,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걸 안 보셨단 말이에요?"
리사는 그때부터 홍학표가 멋있다느니 박철이 귀엽다느니 하는 내가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한참 동안이나 했다. 딱히 내용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몹시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는 리사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적당히 대답도 해가면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리사는 극중에서 시한부 인생 환자가 등장한 에피소드를 설명했다.
"거기서 최진실이 승미라는 여대생으로 나와요. 홍학표랑 싸우기도 하고 연애하기도 하고, 그런 발랄한 여자애인데요... 나중에는 비밀이 밝혀져요. 진짜 대학생도 아니었고, 사실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요. 솔직히 그 이야기는 좀 별로였어요. 전 그런 내용이 남 같지가 않아서 혼자 병실에서 정말 펑펑 울면서 봤거든요."
"아, 예에...."
병실에 홀로 앉아 TV를 보며 울고 있는 리사를 상상해보았다. 잘 상상은 안 가지만, 병원에 들어오면서부터 인상이 안 좋아진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대학 가면 다 저렇게 즐겁게 지낼까 싶어서 대학 공부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안 되겠더라구요. 검정고시도 조금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그랬죠."
"저런."
"그래서 그때 리스트에 하나 추가했었죠. 유호정이 그랬던 것처럼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하고 싶다고요."
"그러셨군요."
"아쉽게도 지금 여기가 캠퍼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곁에는 멋진 남자 대학생이 있으니 소원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에. 그러셨구나.... 네엣?"
별생각 없이 응대하고 있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홱 쳐들었다.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여배우 같았다.
"도와주실 수 있죠?"
"리사 씨....."
그러자 리사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전 좀 불만이에요. 마리한테는 맨날 편하게 말하면서 쌍둥이인 저한테는 왜 그런 어색한 호칭을 붙이세요? 한석 씨보다 어린 사람한테 그렇게 일일이 존대하는 거 귀찮지 않으세요?"
"그....그게... 습관이라."
"저한테 말 놓으세요."
리사의 말투는 숫제 명령조였다. 난감해진 나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리사를 쳐다보았다.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리사야."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빠."
오빠.
크윽.
복학생 선배들이 신입생 여학우들에게 선배라는 호칭 대신 기어이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는 그 심정이 대번에 이해되었다. 나를 보며 환히 웃는 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온몸의 나쁜 기운이 대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확 달아올라 버린 내 얼굴이 들키지 않으려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까. 저 평범한 칭호가 이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다. 나도 모르게 좀 떨리고 더듬거렸지만, 리사가 원할 것이 분명한 대사를 천천히 읊어보았다.
"우리, 키....키스할까?"
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겹쳐보았다. 버드 키스라고 하던가. 제대로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조차 모를 짧디 짧은 키스를 끝내고 조심스레 몸을 뒤로 빼려는데 어느 샌가 리사의 두 손이 내 목을 끌어안고 그대로 안겨왔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깊숙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조금 입술을 벌려보았다. 안쪽에 있던 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짜릿한 감촉이 혀끝에서 온몸을 향해 퍼졌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끝이라는 것은 입맞춤을 기점으로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거고 시작이라는 것은 거기서부터 무언가 더 바라는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로맨스 영화의 끝은 두 사람의 키스지만 남자들이 좋아라 하는 영상은 키스부터 시작이다. 리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가슴은 방망이로 두드리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바로 이 자리에서 예린과 키스를 나누고 몸을 더듬었다. 그로부터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나란 놈은 대체 왜 이렇게 몸이 가벼운 걸까 잠시 고민도 해보았지만, 입술로부터 전해지는 짜릿한 기분이 모든 생각을 지워버렸다.
몸은 점차 본능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제 마음대로 움직였다. 손을 뻗어 리사의 블라우스 위를 더듬었다. 잘록한 허리를 손끝으로 느껴보았다. 더욱더 격렬해지는 키스에 발맞추어 손의 움직임도 과감성을 더했다. 허리를 벗어나 배를 거쳐 그 위에 있는 언덕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이제 조금만, 아주 조금만 키스가 더 이어진다면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닿으리라.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히 떨어졌다. 우리 두 사람이 있는 병실 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위생모를 쓴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나요? 넣어드려요?"
그러자 리사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는 따로 싸왔어요. 수고하세요."
아주머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얼굴도 리사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겠지.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을 더듬거려 찾았고 리사는 점심을 차리겠다며 냉장고 쪽으로 갔다. 장학퀴즈 월장원전의 학교별 응원전을 들으며 우리 둘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고 있으려니까 마리와 예린이 돌아왔다. 학교 사물함에 두고 온 내 책들을 가지러 갔다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마리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묘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암것도 아니라예. 입술이나 닦으시져."
"이...입술?"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뭐라도 묻었나?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이야? 황급히 손등으로 입을 훔쳐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마리는 약간 시큰둥한 표정으로 침대 곁에 책들을 올려놓았다.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어...어떻게 알았어?"
말을 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이거 완전히 인정하는 꼴이잖아! 그러자 마리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는 아는 수가 있다고만 대답했다. 혹시 리사가 그 사이에 마리에게 연락이라도 한 건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나와 열렬히 키스를 나눈 그녀는 새침한 표정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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