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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마리는 학교에서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녀석에게 내 시간표를 알려주고는 각 수업의 교수들에게 병원 입원 사실을 알려 공결로 인정 가능한지에 대해서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마리는 수첩을 꺼내서 메모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거나 연락할 곳 있으세요?"
유진이나 선영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제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이다. 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선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유진을 아끼는 마음은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존중하기로 했고,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유진에게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내 대답을 들은 마리가 종이 가방에서 어떤 인형 하나를 꺼내더니 침대 옆 창틀에 두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인데... 기억이 잘 안 났다.
"뭐야, 이 못생긴 인형은?"
"선배님 생일 선물이라꼬예... 어제 누가 주던데예?"
마리가 리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구지? 나한테 이런 인형을 선물할 사람은? 아무리 궁리 해봐도 누군지 모르겠다. 아마 리사나 마리가 어제 나에게 선물을 못 줬다고 급하게 고른 건가 싶었다.
"고맙다. 마리야."
마리는 내 인사를 받고도 별 대답 없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의자로 가서 앉았다. 잡지를 하나 붙잡고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예린은 소파에 앉았다. 리사가 사과를 가져오더니 깎기 시작했다.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담겨진 사과를 하나 집어먹었다.
사과를 집다가 리사와 얼굴을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았다. 리사는 내 시선을 눈치 채더니 눈을 조용히 아래로 깔았다. 새삼 부끄러워졌다. 나도 시선을 돌렸다.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리사의 붉은 입술이 여전히 시야에 어른거렸다. 저 예쁜 입술로 날 "오빠"라고 불렀던 게 생각나 다시 한 번 두근거렸다. 저런 동생 하나 있으면 진짜 맨날 업고 다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에다가 설레는 감정까지 겹쳐 될 수 있으면 리사 얼굴을 정면으로 안 보도록 노력하면서 마리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나중에 학생증 줄 테니까 내가 말한 책들 좀 빌려다 줄 수 있어?"
"야아."
"조별 발표 수업 준비 같이 못 해서 어떡하냐."
"일이 일케 됐는데 우짭니까.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지예."
"자료 정리할 거나 레포트 써야 할 거 있으면 나한테 가져와. 앉아서 할 수 있는 건 다 내가 맡을게."
"알겠어라."
그 외에도 나머지 교양 수업들에 대한 당부를 일일이 전했다. 마리도 처음에는 그냥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다이어리를 가져오더니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교양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전공 수업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양 교수님한테 갈 때는 여기서 진단서 끊어가. 워낙 깐깐한 분이라 말로만 해서는 공결처리 안 해줄 거야. 그리고 또....."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참 듣던 마리가 결국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후아. 선배님은 일케 수업 하나하나에 다 신경씁니꺼? 교수님들 성향까지도예?"
"......당연한 거 아냐, 인마?"
"피곤해서 우째 삽니까. 그래가꼬."
"전액 장학금 받는 게 쉬운 줄 알아? 이번 주랑 다음 주가 난 고비라고. 담달에는 교생실습도 가야되는데 이래가지고 나갈 수 있을런지나 모르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리사가 "저, 오빠?" 하면서 끼어들었다.
"주제 넘는 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교생 실습은 포기하셔야 될 것 같아요. 아까 의사한테도 들었지만, 오빠 상태가 심해서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나중에 습관성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교생실습은 아무래도 많이 움직이셔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리사 이야기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생 실습을 이번에 놓치면 내년에 졸업생 신분으로 다시 신청해서 나가야 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목발을 짚은 채로 교생을 나간다? 그것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일단은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할게. 너무 걱정 마."
리사를 안심시키고 다시 마리 쪽을 쳐다봤다. 녀석이 마치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세로로 뜬 그 시선은 나와 자기 언니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선배님이 와 우린 언니에게 말을 놓는데예?"
"어? 어....... 그게 말야."
내가 대답을 잘 못 하고 버벅이고 있으려니 리사가 대신 답했다.
"내가 오빠한테 편하게 불러 달라고 했어."
"오빠아? 오.빠.아앙?"
마리가 과도하게 입을 씰룩거리며 특정 단어를 강조했다.
"왜? 무슨 문제 있니?"
리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자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가리키며,
"내도 이자부터 오빠라고 부를 끼다! 안 그래도 내도 전부터 오빠야라고 부르고 싶다 안 카나!"
라고 선언했다. 여태까지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예린도 한쪽 손을 스윽 들더니 그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 그러면 저도..... 어차피 제가 한석 오빠보다는 한 살 어리니..."
그러자 리사가 느긋하게 말했다.
"저야 아까부터 오빠라고 불렀으니 상관없어요."
난데없는 "오빠 부르기 입후보 대회"가 펼쳐졌다. 뭔 난리다냐. 이건 도대체.
결국 정리 끝에 셋 다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기로 하고, 나도 세 명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여태 살아오면서 내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못했는데, 자기들에게 따박따박 존칭을 쓰는 내가, 그녀들이 보기에는 퍽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서울 남자들은 다 그런 줄 알았어예."
"....나 고향은 전라도인데? 우리 엄마 봤잖아."
"엄마야. 글면 선배가, 아니, 오빠가 쓰는 말투가 그게 전라도 사투리인교?"
"어...그렇긴 한데, 어렸을 때부터 타지에서 학교 다녀서 사투리는 잘 안 쓰기도 하고...."
마리는 내 말투 따라하면서 서울말 배우려고 했던 거 다 헛방이라며 투덜거렸다. 뭔가 기분 나쁜데, 이 녀석...
아무튼 그렇게 병실에 둘러앉아 시답잖은 대화를 계속 나누다가 저녁이 지났다. 늦게야 예린과 마리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부터 리사가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내가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거듭 말했지만, 그래도 나를 혼자 둘 수 없으니 굳이 남겠다는 리사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마리야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야 했고 예린에게는 내가 따로 조용히 부탁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리사와 마리가 잠시 없는 틈을 타서 난 예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두었다.
"예린 씨...."
이렇게 부르자 예린이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아니라는 포즈를 취했다. 별수 없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불러주기로 했다.
"아, 아니. 예린아. 그러니까 마리 학교 다니는 것 좀 지켜봐줄 수 있어? 당분간 말야."
"무슨 일이라도?"
"그냥 노파심에서이긴 한데...."
이틀 전, 금요일 수업에서의 마레기 행동이 영 눈에 밟혔다. 게다가 그 날 마리에게 했다는 소리도 그렇고....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사고를 치고도 남을 인간이기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제쳐두고 품행이 좋지 않은 녀석이 마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내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지만, 다리가 이 모양이라 별 수 없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 오빠."
......꼭 너까지 그 호칭으로 날 불러야겠니. 아니, 기왕 부르려면 리사처럼 애교 있게 하든가 마리처럼 씩씩하게 부르든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부르면 어쩐지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거참.
마리와 예린이 돌아가고 나니 병실에는 리사와 나만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다들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둘만 밀폐된 공간 안에 남고 나니 새삼 아까 낮의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스레 리사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는 테이블과 소파에 놓인 것들을 정리하더니 내게 말했다.
"그럼 저 먼저 샤워할게요."
"샤......샤워?"
"네."
그러더니 병실에 딸려있는 욕실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그래. 특실에는 욕실에 별도로 딸려 있어서 샤워도 가능하구나! 그렇구나!
곧이어 들리는 물소리가 내 가슴의 두근거림을 한층 더 격하게 만들었다. 리사가 이렇게나 적극적인 여성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싫기는커녕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게다가 예린이가 했던 그 이상한 말도 있고 아까 낮의 행동으로 보아 리사도 결코 나에 대해 가벼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은 끄는 게 좋겠지? 다리가 이 모양이니 체위는 좀 불편하겠지만, 리사가 협조해준다면 그다지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리모컨으로 TV는 껐다. 불을 끄러 가고 싶지만 되도록 움직이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터라 침대에서 내려갈 수도 없었다. 다리라도 내릴라 치면 리사가 대번에 뭐라고 하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대신, 침을 삼켰다. 시계를 봤다. 아까 간호사가 한 번 다녀가서 수액을 바꿔주고 갔으니 또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는 사이 물소리가 뚝 멎었다.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제 곧 욕실 문이 열리고 섹시한 모습의 리사가 나타나 내게 다가오겠지....
"어라?"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편하디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리사가 욕실에서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눌러 짜며 말이다. 어라, 왜 알몸이 아닌 거지. 아니, 아니, 알몸이 아니라면 최소한 수건만 두르고 나온다던가.....
화가 났다!
거 왜 그런 복장 있잖는가! 바로 어른들의 즐거운 놀이에 돌입하기 편한 그런 복장! 그런 것도 아니라면 간호사 복장이라도 하고 나오든가! 물론 그냥 평범한 간호사 복장 말고 치마는 좀 많이 짧고 가슴은 많이 파인 걸로! 아래는 망사로 된 밴드 스타킹에 가터벨트 신어주고!!!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데, 리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오빠, 벗으세요."
"........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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