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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망상에 빠져 있다가 리사가 던진 말에 화들짝 놀랐다. 두 팔로 몸을 가렸다. 아, 그런가. 나부터 벗어야 하는 거였나?
"나부터 벗어야 돼?"
"무슨 말씀이세요?"
리사는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내 곁으로 왔다.
"오빠는 샤워를 못하실테니 당분간 제가 닦아드릴게요."
아아.... 그런 이야기였구나. 약간 실망했다. 그런 게 아니었군. 리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복 상의를 벗었다. 리사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어찌나 온도를 잘 맞춰서 적셔 왔는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좋은 감촉이었다.
등 뒤에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겉으로 볼 때는 그냥 말라 보였는데 지금 보니 꽤나 근육질이네요."
"그...그래?"
"운동 많이 하세요?"
"공부만 하면 아무래도 몸이 처지니까... 이것저것 하고 있어."
리사는 감탄하며 내 등을 이곳저곳 만졌다. 수건이 아닌 손가락이 와서 닿는 감촉이 꽤 미묘했다. 등을 만질 뿐인데도, 바지 앞섬이 조금씩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리사는 착실하게 등과 옆구리 등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돌아보세요."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했다. 그러자 리사는 얼굴까지도 닦아주었다. 마치 중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보살핌을 받는다는 건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꼼꼼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열심히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에 야릇한 망상에 푹 빠져 있던 게 부끄럽기도 했다.
리사는 닦아주기를 다 마치고 수건과 대야를 치웠다.
"그럼, 불 끌게요."
"응."
침대에 누웠다. 리사가 일어나 병실의 불을 껐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리사가 보조 침대를 빼고 있는 건가 싶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조 침대에서 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다음 행동에 나는 기겁하여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리.... 리사야."
"왜요?"
"아, 아니. 그게 말야...."
리사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오른쪽 다리 하나를 올리고 있느라 아무리 내 몸이 반절 정도만 침대에 올려져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병원 침대가 더블베드마냥 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좁은 그 공간에서 아무래도 리사와 나는 밀착할 수밖에 없다.
리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 팔 한쪽을 꼭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그러다 보니 뭉클하고도 묵직한 무언가가 내 몸 쪽으로 가득 밀려왔다.
"조....좁지 않을까?"
"적당한데요?"
"그... 그래?"
방금 샤워를 마친 여자의 머리카락 향기는 남자를 혼미하게 하는 미약과도 같다. 그런 게 바로 턱 밑에 있다고! 라이브로! 생생하게!
"전 병원 침대가 참 싫었어요."
내 몸에 바짝 달라붙어 자신의 브래지어 컵사이즈를 직접 재달라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는 이 아가씨는 약간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지금 내 아래쪽에서는 남성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혈관의 활발한 운동, 생식활동의 전초운동에 해당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팽창하는 부분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말을 하려다 소리가 조금 샜다.
그러나 리사는 내 목소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꽤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병원은 사람이 죽는 곳이잖아요."
"어? 어....."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녀는 병원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니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더 이상 세상에 남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을 터였다. 괜히 나까지 우울해졌다. 우리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리사가 조금 더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건 또 왜?"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바짝 누울 수도 있으니까요."
"리... 리사야. 그 말은...."
고개를 젖혀 날 바라보는 리사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기엔 그녀와 나, 둘뿐이다.그녀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나라는 건 아무리 멍청하고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수 있었다.
살짝 눈을 감는 그녀. 자세가 편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내 쪽으로 바싹 당겼다. 이제 그녀와 나의 입술은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놓였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도 먹음직스럽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리사의 입술 위로 나의 것을 겹쳐 보았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 그리고 혀와 혀의 무도회.
이미 한 번 마주했던 그 접촉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싹 닿은 몸을 조금씩 더듬어 한참을 어루만졌다. 키스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입술이 딱 떨어지자마자 리사는 생긋 웃으며 내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리사는 그렇게 하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봐서 정말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리사가 원망스럽다. 너 같으면 안녕히 잠이 오겠니!!! 우우....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넌 잠이 오냐구!!!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라고 깨울 건가. "저기, 지금부터 이상한 짓 시작하지 않겠어요?"라고 물어볼 텐가. 주인집 아가씨의 머리를 어깨에 얹고 밤을 홀딱 세운 양치기의 심정으로 혼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그 양치기도 분명 꼴린 자지를 달래느라 무던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다음 날, 새벽에 리사가 먼저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옷을 찾아 입는 그녀를 보면서 멋쩍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네, 오빠."
옷을 다 입은 리사가 웃으며 내게 다가와 살짝 입을 맞췄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다.
"저 좀 씻을게요."
"그래."
리사는 수건을 챙겨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줍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괜스레 나까지 부끄러워졌다. 솔직히 여자와 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리사와는 같이 잠을 잔 거지 우리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아침은 알몸으로 몸을 섞은 후보다도 더 부끄러웠다. 온몸이 간질간질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아직 본격적인 아침이 시작되기 전이라 차도에 차도 별로 없었다.
잠시 후,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온 리사에게 내 상체를 맡겼다. 그녀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다.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TV를 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전에 예약되어 있는 진료에 보호자로 리사가 동행했고, 오후에는 병원 근처에 있는 공원을 함께 산책했다.
저녁에 마리와 예린이 찾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녀들이 돌아가고 나서 리사는 다시 내 침대로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몹시 달아오르게 만들어버리면서 리사는 내게 키스를 해주고 곁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온전히 리사와 함께 흘러갔다. 내가 병원에 있는 건지 꿈결 속에 있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화요일 오전, 전화기를 달라고 했다. 리사가 전화선을 길게 빼어 전화기를 내 옆에 가져다주었다.
"어디 거시게요?"
"엄마한테 좀."
"어머, 여태 말씀 안 드렸어요?"
"걱정끼치기 싫어서 말야."
신호가 갔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밭에 나가신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한창 바쁠 때긴 하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리사가 물었다.
"안 받으세요?"
"응. 나가셨나 보네. 삼촌 집에 전화할까 하다가... 그냥 나중에 다시 하지, 뭐."
"그러시구나."
리사가 전화기를 도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 순간, 전화할 곳이 떠올랐다.
"잠깐, 리사야. 다시 줘봐."
"어디 거실려구요?"
"그게... 저... 그런 데가 있어."
어쩐지 리사에게 선영 이야기를 하는 건 좀 주저되었다. 자기 앞에서 전화하기를 주저하는 내 모습에서 뭔가 눈치를 챈 건지 그녀는 마실 것 좀 사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사가 나간 다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고 나서야 선영이 전화를 받았다. 꽤 졸린 목소리였다. 밤에 일하는 그녀에겐 이른 시각이겠구나 싶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한석."
전화기 너머 침묵이 느껴졌다. 어색했다. 나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유진이한테는 과외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 들었어요."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숨을 쉬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저 죄송하지만요, 그리고 당분간 그쪽 과외는 못 갈 거 같아요. 제가 좀 일이 생겨서요."
"무슨 소리죠, 그게?"
"그게 그러니까요. 제가 일이 있어서 당분간 선영 씨 과외는 못 할 것...."
"제 과외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돈 물어내라고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요. 그래요, 그것도 그만두도록 해요."
"네? 아예 그만두라구요?"
변상이니 뭐니 하면서 계약서까지 쓰고 난리를 쳐놓고 이게 또 뭔 소리지? 유진이 과외는 그만둘지언정 선영의 과외는 계약 때문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래요. 유진이 과외를 그만두기로 하셨으면 굳이 제 과외를 계속 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아. 그럼 당신이 말했던 목표라는 건... 이제 필요 없어요?"
"그건 더 이상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계약서니 뭐니 한 건 대체 뭡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계약서? 그딴 건 그냥 찢어버리세요. 저도 버릴 테니까요."
기가 막혔다.
"아뇨. 잠깐만요. 난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었고 당신의 목표에 대해서 공감했기에 과외를 하기로 한 거였어요. 돈도 돈이지만, 당신의 어려움에 대해서 공감을 했다고요! 그리고 아직 당신이 말한 금액, 그거 채 갚지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쪽이 끝내자고 하면 그냥 끝인가요? 그럼 난 여태까지 뭘 한거죠?"
억울했다. 그녀와 나, 우리 둘이 하던 과이. 물론 시작은 좋지 않았다. 어거지로 들이민 계약서에 억지로 사인하면서 시작한 일이다. 그렇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그녀는 나름대로 좋은 학생이었고, 그 희망은 소박하지만 진정성이 있었다.
그녀의 작은 희망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대접이라니.... 억울한 마음에 한번에 왁하고 쏟아내었지만, 선영의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뭐야. 그러면 그런 터무니없는 청구서가, 진짜라고 생각한 거란 건가요? 최한석 씨. 생각보다 많이 순진하시네요."
"뭐?!"
"아무튼 앞으론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물론 올 필요도 없구요."
전화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내게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이성도 끊어졌다.
"으아아악!!!"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수화기가 바닥에 굴러갔다.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리사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를 집어 들더니 전화기에 올려놓았다. 내게서 전화기를 받아다 제자리에 두더니 내 곁에 앉았다.
"오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냐, 아무것도..."
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큰 소리가 난 것 같던데요."
"조금... 이해 못 갈 소리를 들어서 말야. 하아. 이젠 더 만날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인상을 쓰고 있자니 리사가 내 머리와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 안으로 머리를 맡기게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리사의 가슴 사이로 얼굴을 묻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는 소리다. 좀 부끄럽지만 리사가 워낙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안은 터라 뿌리치거나 물러나기도 뭣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화내지 마세요. 몸에 좋지 않아요."
"휴우. 알았어."
뭉클한 두 언덕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는 건 꽤나 탁월한 진정법이었다. 리사가 그걸 알고 한 건지 모르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다른 부위에 열이 나기 시작해서 문제였다. 이놈아. 자꾸 서지 마라. 널 쓸 수도 없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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