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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그렇게 병원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갔다. 병원 생활에 있어서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리사가 미리 말해준 대로 병원 생활이라는 게 별로 즐거운 일도, 재미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깨달았다. 창살이 없다 뿐이지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곁에는 줄곧 리사가 있어주었기에 큰 힘이 되었다. 나의 하루하루에 곳곳에서 함께 한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도 지루해서 일찌감치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그녀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규칙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를 안고 잠들었고, 그 체온이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한 번은 무슨 일이 있어 너스스테이션으로 갔는데 간호사 중 한 명이 "애인분이 안 오고 직접 오셨네요?"라고 물었다. 무심코 "아, 리사는 잠깐 어디 좀 갔어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병실로 돌아오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 혼자 한참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토요일이 되어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퇴원 할 수 있었다. 당분간 목발을 사용해야 하고 일주일에 세 번 물리치료를 받으러 와야 하긴 했지만, 집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몹시 들떠있었다. 리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마리는 출발했대?"
"예, 예린 언니도 함께요."
오늘은 원래 과MT 가는 날이었다. 나도 신청은 했었지만, 다리가 이래서야 갈 수가 없다. 참가비는 이미 냈지만, 깐깐하게 과 살림을 챙기는 진호 선배는 환불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리 다쳐서 못 간다는데!"
"인마! 숙소 예약이랑 술 사는 건 공짜인 줄 알아?"
그래서 결국 나 대신 예린을 보내기로 했다. 진호 선배에게 미리 부탁해두었다. 학과 행사에 외부인이 낀다는 게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공대의 특성상 여자가 추가된다고 하니까 도리어 그쪽에서는 꼭 보내라고 성화였다고 했다.
지난번 내 부탁 이후 예린은 꽤 착실하게 마리의 근처에 항상 있었다. 교내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의 모습은 모르긴 몰라도 꽤 튀었을 게다. 결코 평범한 차림새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 학과 사람들에게 예린은 이제 낯익은 인물이 되어 있었다. 비록 평소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게 분명하지만, 여자가 MT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 거절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마리와 예린은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고, 나와 리사는 병원을 떠났다.
그 싸가지 없는 어떤 술집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리사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거칠고 파워풀하게 운전했다. 애써 에둘러 "잘 한다"라고 표현했지만, 이미 내 손은 안전벨트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리사 운전 잘하네?"
"그런가요?"
리사에게 운전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했더니 웃으며 대답하길 자기네 동네에서 이 정도는 보통이라고 했다. 차선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고 불법 유턴을 감행하는 게 보통이라면 대체 부산이라는 동네는 어느 정도의 헬게이트인지 감이 안 잡혔다. 게다가 리사는 길치 아니었던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우리집에서 20~30분이면 닿을 학교까지 혼자 걸어오는데 1시간이 걸렸던 그녀였다. 그런데도 운전하면서 길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그건 걸어 다닐 때구요, 차는 제가 걸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가?"
걸어가지는 않지만, 본인이 운전하는 건데.... 조금 의아했지만, 금세 집에 도착한 터라 더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갈아입을 옷과 책 뿐이긴 했지만, 양이 좀 많았다. 리사는 병원에서도 살림이 가능할 정도의 짐을 챙겨가지고 왔던 터라 옮기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도우려고 했지만, 리사는 꼼짝 말고 있으라며 엄하게 지시했다. 그녀의 지시 앞에서, 나는 언제나 말 잘 듣는 어린 양이 되어 버리고 만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짐 나르는 것을 구경만 했다. 어쩐지 굉장히 미안했다. 마지막 짐을 내려놓은 리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휴우. 이제 다 끝났네요. 점심 차려드릴게요."
"수고 많이 했는데 점심은 시켜 먹자. 나 짜장면 먹고 싶어."
"그럴까요, 그럼?"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배달을 시켰다. 짜장면과 볶음밥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했다. 리사는 다시 일어나더니 병원에서 입었던 옷가지를 빨겠다며 한아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비어 있던 집에 쌓인 먼지를 청소한다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말 돕고 싶었지만, 내가 일어서기만 해도 잔소리가 쏟아졌다. 너무 과보호가 아닐까 싶어서 살짝 불만일 정도다. 결국 리사와 내가 차분하게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녀가 차린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일주일 동안 비어 있던 집은 내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깔끔해졌다.
"리사야.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워. 정말이야."
"누구라도 그렇게 할 건데요."
"아냐. 난 모처럼... 뭐랄까. 난 말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표현은 못 하겠는데, 그래. 집에 온 기분이었어."
"집에 왔잖아요?"
"아니. 여기 자취방이 아니라 내 고향 말이야. 엄마가 집에 있고 날 챙겨주고 밥 차려주고.... 그런 집 말이야."
내 이야기를 들은 리사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말은 제가 어머니처럼 보인다는 건가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엄마가 얼마나 활동파냐면 말야, 우리 엄마가 떴다 하면 동네가 들썩인다고!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낼 모레면 오십 다 되어가는 아줌마랑 동급으로 취급하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는 없겠지 싶어 참았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네가 날 보살펴 준 게 편안하고 좋았다고. 그걸 말하고 싶었어."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요."
리사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그녀 특유의 작고 여린 목소리로 조용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오빠도...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돼요."
여운이 길었다. 말은 끝났는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여태 바쁘고 번잡스러워 잊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여긴 내 자취방.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 거기에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채로 마주 앉은 남녀. 시각은 늦은 저녁. 사방은 적막하고 두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다. 병원 그 좁은 침대에서 매일 밤 곁에서 잠들었던 여자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남자에게 남긴 그녀의 마지막 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메시지. 그 메시지가 담고 있는 뜻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손을 뻗었다. 리사의 얼굴에 내 손이 닿았다. 움찔거리거나 놀라지 않았다. 닿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저 가만히 와 닿은 손길에 자신을 맡길 뿐이었다. 이젠 내가 다가갔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결론.
서로의 입술이 겹쳐진다는 것.
지난 일주일간 짧은 키스는 많았다. 밤이면 밤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듯 그녀와 난 입술을 서로 부딪혔다.
그러나 지금의 뉘앙스는 전혀 달랐다. 잠시 붙었다 떨어지는 그런 키스가 아니었다. 숨어있던 욕망이, 입안에 감춰졌던 살덩이가 밖으로 나와 상대에게 얽혀 들어간다. 한데 엉켜 춤을 추었다. 입술을 빨아대고 서로의 안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키스가 다가 아니었다. 손을 뻗어 리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를 내 바로 앞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다리, 그녀의 허리, 그녀의 허벅지, 그녀의 가슴...... 모든 것이 내 손아래 있었다. 손길이 리사의 가슴을 제법 주물렀을 때 리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비틀어 빼냈다. 다소 촉촉해진 입술을 다시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저... 먼저 씻고 올게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까지 진한 키스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그제야 머리를 급하게 회전시켰다. 이번에는 진짜 하는 건가. 설마 또 저래놓고 전처럼 트레이닝복 입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콘돔을 미리 준비해줘야 되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일단 마시던 찻잔과 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불을 껐다. 너무 깜깜하면 좀 그래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두었다. 푸르스름한 그 빛이 방 안을 나름대로 무드있게 만들어주었다. 시각인 한정되니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 후각은 방 안에 머무는 리사의 향기를 맡고 있었다. 청각은 오로지 욕실에서 들리는 소리에만 집중했다.
물소리. 뭔가 문지르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다시 물소리. 무언가 만지고 비비는 소리, 이어지는 물소리.........비명소리, 물소리.
"꺄악!!!"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벌떡 일어나 다리의 불편함도 잊고 욕실 앞으로 달려갔다. 함부로 문을 열지는 못하고 밖에서 리사를 불렀다.
"리사야. 왜 그래?"
"오...오빠....아, 안 돼........"
리사는 혼잣말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러지 마.... 저리 가..."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바퀴벌레라도 나타난 걸까. 그러나 리사의 비명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었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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