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74화 (37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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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바닥에 알몸의 리사가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단 황급히 욕실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덮으며 물었다. 리사는 떨리는 손으로 내게 매달렸다.

"왜 그래? 바퀴벌레 큰 놈이라도 나타난 거야?"

"그...그게...아니......"

그러면서도 리사의 눈동자는 꽤나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다. 손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기에 엉겁결에 마주 앉아주었다.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일단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로 데려갔다. 이불로 그녀를 감싸준다. 눈부시게 하얀 나신이 이불로 덮이는 게 못내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 그런 이상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 바퀴벌레야, 아님 거미?"

"아....마리야....."

마리? 갑자기 마리는 왜 찾는 거지? 마리가 바퀴벌레를 잘 잡나? 한참 동안 리사는 숨을 가다듬으며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손으로는 내 팔을 꼭 쥐고 있어서 떨어질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자 조금씩 안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하더니 이불을 감싸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전화 좀 쓸게요."

"응."

리사는 전화기로 다가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예요......."

전화를 건 상대는 예린인 모양이었다. 리사는 이야기를 하기보단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예,.......그랬군요....... 알았어요.........잘 돌봐주세요........ 아뇨. 괜찮아요........언니는요?"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수화기를 가리고 뭔가 작은 소리로 한참이나 통화했다. 가끔 내 쪽을 힐끔거리기는 하는데 무어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긴 통화였다.

"...그건 알아서 해주세요. 네. 그럼, 이만."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리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숨을 쉬더니 침대로 돌아와 내 곁에 앉았다. 이불은 여전히 둘둘 말고 있는 채로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영문을 몰라 답답한 내가 물어 보았다.

"저기, 괜찮다면 이젠 사정을 좀 들을 수 있을까? 난 니가 욕실에서 대왕 바퀴벌레라도 본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말야. 마리 이야기는 뭐고, 갑자기 예린한테 전화는 왜 걸었어?"

"그러니까...."

어지간한 일에 평정을 잃지 않던 리사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날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좀 터무니없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오빠를 믿고 말씀 드릴게요."

"응."

날 믿고? 무슨 비밀 이야기길래 그런 걸까. 나 역시 그녀를 믿고 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망설이던 리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끔 해외토픽 같은 데서 그런 뉴스 나오는 거 본 적 있죠? 아니면 책에서든지요. 쌍둥이들 사이에 일어난 뭔가 신기한 일들. 가령 어떤 쌍둥이들은 어렸을 때 헤어져서 서로를 모르고 자랐는데도, 나중에 보니 같은 직업에 배우자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 만난다는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큰 상처를 입었더니 같은 자리에 상처를 입었다든가."

"그런 이야기라면, 본 적 있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였던가. 암튼 뭔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잔뜩 모아놓은 이야기 책 같은데서 본 기억이 났다. 쌍둥이 사이에는 뭔가 기묘한, 그러나 과학으로 판명되지 않는 연결고리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

리사는 손을 들어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그러니까 마리와 저는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막상 같이 자라지는 않았어요. 어머니는 편찮으시고, 아버지는 하시던 일이 자리를 잡지 않았었기 때문에... 마리는 경북 어딘가에 있는 먼 친척집에 맡겨 할머니 밑에서 자랐구요, 전 아버지와 함께 있기는 했지만, 주로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죠."

리사가 병원에서 주로 지냈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마리는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데 비해, 리사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내막이 있는지는 몰랐다.

"연락을 종종 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몰랐죠. 가끔 상태가 좋아지면 병원에서 나와 집에서 지낼 수 있었는데, 그때 마리가 집에 오면 만날 수 있었어요. 자주 보지 못했음에도 저희는 항상 친했어요. 쌍둥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었죠. 그러다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게 된 건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된 마리가 병원에 있는 저한테 놀러 오면서부터에요. 그리고 고등학교 무렵에는 제가 많이 회복되어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구요. 그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던 저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남들에게 말하기는 좀 이상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도 있고 해서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지요."

"그게... 뭔데?"

리사는 한참이나 꾸물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했다.

"저와 마리는 첫 생리를 같이 했어요. 같은 날짜에. 같은 시각에."

"어? 어.... 그러니?"

남자가 듣기에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했다. 그런데 그게 뭐 대단한 건가? 리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리고 그 후로도.... 단 한 번도 서로 따로 한 적이 없이 늘 같은 때에 멘스를 겪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사실 여자들끼리 살다 보면 기간이 비슷해지기도 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고 해요. 그런데 마리와 저는 같이 살았던 게 아닌데도 그랬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이게 뭐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는 거지? 생리 이야기는 듣고 있기 확실히 부끄럽기는 하다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제가 심하게 아프거나 하면 마리도 그 기간에 똑같이 아파서 드러누워 있었구요. 제가 엄청 맛있는 걸 먹고 그 맛에 취해 있으면 먹지 않은 마리도 기분이 좋아지거나 하는 일이 있었죠. 한번은 마리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다가 차에 크게 치여서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도 차에 치인 듯한 고통을 느끼고 마리와 함께 내내 누워 있었죠."

이쯤 되면 확실히 신기하기도 했다. 문득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성룡의 영화가 생각났다.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거기서 성룡이 쌍둥이로 나왔는데 그 설정이 리사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한쪽이 얻어맞으면 다른 쪽도 몸이 반응하던....

"여러 경험을 통해서 저희 쌍둥이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는 점을 확신했어요. 과학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저희 사이에 흐르고 있다고 봐요."

아까 리사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해충구제약을 찾는 게 아니라 전화기를 찾았다. 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린은 지금 마리와 함께 있다. 리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조금 전 일을 결합시켜보니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혹시 아까 네가 욕실에서 쓰러진 것도...?"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마음이 왈칵 밀려왔다.

"마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많이 다쳤어?"

"몸이 다친 건 아니지만요........"

리사는 고개를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마음을 좀 다쳤다고나 할까요. 두려움과 공포, 무서워하는 마음이 갑자기 왈칵 밀려왔어요. 순간적으로 저 역시 그 감정에 놀라 비명을 질렀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오빠가 도와주셨어요."

"내가? 내가 뭘 도와주었는데?"

"오빠가 예린 언니에게 마리를 부탁하셨죠? 결과적으로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대체 무슨 도움이?"

꽤 주저하던 리사는 결국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내가 우려하던 일이 MT에서 터지고 말았다.

"마레기 이 새끼!!!"

리사는 그저 "어떤 선배가 마리를 강제로 덮치려고 했었다"라고만 이야기했지만, 내 직감은 대번에 그 범인이 누군지 말해주고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놈이랑 같은 대학교 학생이라는 게 창피하고, 같은 남자라는 게 어이없고, 같은 종족이라는 게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예린 언니가 일찍 발견해서 제압했다고 하더군요. 술에 취한 마리가 언니와 잠시 떨어져 있는 틈을 노렸던 모양이에요.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마리는 조금 놀란 모양이에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아뇨. 오빠가 미안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오빠가 예린 언니를 붙여두셨기에 이 일을 막으신 거잖아요."

"그런 새끼랑은 애초에 관계를 맺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아....."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차마 리사 얼굴을 못 볼만큼 부끄러웠다.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못 들고 있으려니 리사가 도리어 날 위로했다. 나는 계속 미안하다고 했고 리사는 괜찮다고 거듭 말했다. 내 머리를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팍에 대고 토닥여 주는 리사 덕분에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

"그럼... 아까 네가 놀란 건... 마리도 그만큼 놀랐다는 이야기인 거야?"

"예. 아마도요."

"평상시에도 그런 기분이 모두 일일이 전달 돼?"

"전부는 아니구요. 좀 강렬한 거나 인상적인 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증거와 증인이 확실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사와 난 아주 좋은 분위기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굳이 리사가 거짓으로 마리에게 일어난 일을 꾸밀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정말 그런 나쁜 일이 벌어졌고, 예린이 막았지만, 그 사이에 마리가 느낀 공포는 리사에게 고대로 전달되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손을 뻗어 리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아주는 걸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리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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