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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80화 (38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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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야리꼬리한 생각을 방해한 사람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였다. 순간 예린인 줄 알았다. 성별도 다르고 체격도 다른데 예린으로 착각한 이유는 늘 그녀가 입는 것과 같은 까만 정장을 차려 입었기 때문이다. 새까만 선글라스도 그렇고.

그렇지만 예린은 오늘 리사와 함께 볼 일이 있다고 아침에 어딜 갔으니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다짜고짜 이름을 확인하는 남자의 기색은 자못 흉흉했기에, 살짝 긴장했다.

"그렇습니다만...."

"전 이런 사람입니다만, 잠시 이야기 괜찮을까요?"

남자가 내민 명함은 예전에 예린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종류였다. 경남산업개발이라는 사명 아래 박태호 부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껏해야 서른이 좀 넘었을까? 아니다. 목소리 때문에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니 선글라스 때문에 가늠은 쉽지 않지만, 말투나 머리 스타일을 볼 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20대 초중반쯤 되었을려나?

그러고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린 예린도 무슨 부장인가 그랬다. 이 회사는 대체 뭐 하는 회사기에 부장들이 왜 이렇게 젊어?

"박 부장님?"

"님 자는 안 붙이셔도 됩니다. 박 부장이라고만 불러 주십시오."

"아, 그래도 저기...."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내게 몹시 깍듯했다. 그 사람은 서 있는데 계속 앉아있기도 뭣해서 일어났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한테....?"

"아가씨들 문제로 여쭐 게 있어서요.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시간이야 뭐...."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았다. 애매했다.

"좀 있으면 마리가 나올 텐데요."

마리가 나오면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공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박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마리 아가씨는 절 싫어해서..... 될 수 있으면 눈에 안 띄려고 했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그 성격 좋은 마리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이기에 그럴까. 예린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마리와도 사이가 좋아야 하는 거 아닐까? 뭔가 이상했다.

"그러면 연락을 좀 남기고 갈게요. 마리가 그냥 나와서 저 없는 거 보면 실망할 테니까요."

"으음."

과사에다 말을 남겨야 하나 아니면 예린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박 부장이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키가 큰 편이지만 이 사람은 더 컸다. 못해도 190은 훌쩍 넘었고, 어깨 넓이가 보통 사람의 두 배에 가까웠다. 연구실에 있는 학술서적 가득 꽂힌 마호가니 책장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짝 붙으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좋게 말할 때 빨리 따라오지? 험한 꼴 보기 전에?"

지금까지의 말투와는 전혀 다르게 으르렁거리는 말투에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강력한 충격이 배에 느껴졌다. 아직 그래본 적은 없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배에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허억!"

"애먹이게 하고 있어. 짜식이...."

의식이 멀어졌다. 주변이 온통 섞이며 정신이 없었다. 공대건물, 하늘이 보이더니 그대로 모두 까매졌다.

*

덜컹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공대 앞에 있을 때는 한낮이었는데, 지금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억지로 비집어 뜨고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가 가늠해 보았다. 달리고 있는 어떤 차 안이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은 테이프로 봉해져 이미 있었고 손과 발도 무언가로 꽁꽁 싸매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마치 짐짝처럼 뒷자리에서 구르고 있었다.

"읍읍!!!"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나오는 건 이 정도가 최선이다. 조수석에 앉은 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박 부장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놈이다. 날 이렇게 만든 원흉! 나쁜 놈!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가려져 있어서 불가능했다.

"깼냐? 얌전히 있어."

"읍읍읍!!!"

"맘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회치고 싶은 걸 참아준 거야. 고맙게 생각해."

"읍읍읍읍!!"

"안 닥쳐?!"

무언가 날아와 내 이마를 정통으로 맞췄다. 맞추는 순간 부서지는 걸 보아 무슨 과자나 크래커인 모양이었다. 고작 과자에 맞은 건데도 굉장히 아팠다. 손목 힘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하긴 아까 맞은 배가 아직도 욱신거릴 정도이니....

꼭 맞은 부위가 아파서라기보단 지금 내가 떠들어봐야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것이기에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운전석에 있는 이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박 부장에게 물었다.

"행님아. 던지려면 단디한 걸 던져야지, 저런 걸 던지면 우짭니까? 고마 뒷자리 과자 뿌스레기 천지네."

"단디? 근데 이런 걸 던지면 저 자식이 뒤지잖아."

박 부장이 들어 올린 건 쇠로 된 재떨이였다. 저런 걸 왜 차에 놓고 다니는 거야!

"아하, 맞다. 살려 데려오라 켔지요?"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 녀석이 운전을 하면서 뭐라 궁시렁거렸다. 그런데 녀석의 운전이 험한 건지 아니면 길이 험한 건지 차 전체가 꽤나 쿵쾅거리고 있었다. 굴러다니면서 곳곳에 부딪히고 문대느라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박 부장은 투덜거렸다.

"아오. 저거 연장만 안 싣고 왔으면 그냥 트렁크에 넣는 건데."

"연장 뺄까예?"

"됐어. 어차피 거의 다 왔는데 뭐 하러. 일단 둬."

다 왔다? 낮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면, 대충 어디쯤일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이 잡히진 않지만, 모르긴 몰라도 경남권까지 도달한 건 확실했다. 저들이 쓰던 말투, 걸린 시간을 대충 고려해보면 부산이 목적지인 게 분명했다. 이렇게 납치라는 것도 당해보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 박 부장이란 놈은 날 트렁크에 실으려고 했다. 트렁크는 짐 싣는 곳이지 사람 싣는 곳은 아니잖아. 자세는 불편하지만 그래도 뒷좌석이 더 좋기에 참았다. 이제부터는 아파도 신음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는데도 도로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앞자리에 앉은 녀석들끼리도 지들끼리 뭐가 불만인지 한참 떠들어 대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쫓고 있는 모양이다. 나를 납치해놓고 쫓기고 있다니... 날 구하려는 정의의 기사라도 쫓아오는 건가? 설마 그녀인가?

"이쪽으로 돌면 따돌리려나?"

"글쎄예. 될까예?"

지들끼리 무어라 궁시렁 거리는 데, 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완전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차가 어디 박힌 모양이었다. 운전하던 놈은 벨트를 안 매었는지 그대로 핸들에 얼굴을 들이박아 버렸고 박 부장의 몸도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그의 동작은 상상 이상으로 재빨랐다. 그는 벨트를 벗는 것과 동시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에서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의 함성과 욕설이 들려왔다. 박 부장의 욕설도 들렸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럽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누군가 이 차의 유리를 박살내버렸다.

"읍읍읍!!!"

떨어지는 유리 파편을 피해보려 애썼지만, 덩어리째로 찌그러진 깨진 유리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로 떨어졌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운전석에 앉아있는 놈이 끌려 나가고 곧이어 뒷문도 열리더니 나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공주님 안기로 사뿐히 안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건 너무 아프잖아!

바닥에 굴렀을 때,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들을 보았다. 아까 박 부장과 비슷한 차림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들은 날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놈은?"

"모르겠습니다. 박태호가 직접 싣고 가는 걸로 봐서 중요한 놈 아닐까요?"

"너 같으면 중요한 새끼를 이렇게 둘둘 싸매고 가겄냐?"

"것두 그렇네... 그냥 버릴까요?"

비슷한 복장의 녀석들이 날 둘러싸고 처분을 고심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인물이 날 구하러 온 건 절대로 아니었다. 뭔가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 선량한 시민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마에 상처가 있고 눈이 쫙 찢어진 녀석이 날 보며 인상을 쓰다가 옆에 있는 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실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바닥을 질질 끌려갔다. 봉고차 뒷좌석에 실리기 전까지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박 부장과 아까 운전하던 젊은 놈은 대여섯 명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었다. 날 단 한방에 때려눕힌 박 부장이 저렇게 맞는 게 처음에는 고소했지만, 너무 많이 맞는 게 아닐까 싶어서 좀 불쌍하기도 했다.

봉고차의 문은 거칠게 닫혔고 이내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짐짝 취급인 채로 말이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내가 던져진 곳은 어떤 빈 창고였다. 손발에 묶인 것도 재갈도 풀어주지 않은 채로 던지기에 한참이나 읍읍 거리면서 사정했더니 입은 풀어주었다. 물론 신나게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기! 저 화장실이 좀 가고 싶은데요."

"저기 구석에서 알아서 싸!"

"큰 건데요."

"너, 이 새끼. 죽을래?"

그래도 그곳을 똥숫간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지 다리를 풀어주며 일으켜 주었다. 한 녀석이 날 끌고 간이 화장실로 데려가 주었다. 얼마만인지 모를 배설의 쾌감을 만끽했다. 다시 창고로 끌려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최소한 날 잡아 가둔 놈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알고 싶었다. 주변은 황량했다. 커다란 창고와 작은 창고가 마구 모여 있는, 꽤나 비효율적인 물류창고단지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단지 바깥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날 싣고 온 봉고차가 입구 쪽에 있었고 다른 봉고차도 반대편에 있었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떠들고 있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중에 태호라는 이름이 꽤 여러 번 나왔다. 끌려가면서 접할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그래도 다시 창고에 갇혔다.

"빨리 들어가! 얌전히 있어!"

창고로 들어가 있으려니 얼마 뒤에는 아까 그 박 부장도 들어왔다. 그는 전신에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선글라스도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드러누워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박 부장을 보고 말했다.

"어라? 생각보다 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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