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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이전에 들었던 예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리사는 마리가 방 잡고 정착할 때까지만 서울에 있을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의 복귀는 늦어졌고 (이 부분에서 예린이 날 힐끔 쳐다보았고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든 나는 예린을 뒤에서 끌어안아 주었다.) 금방 부산으로 복귀하겠다던 그녀의 약속은 점차 뒤로 미루어졌다.
리사는 처리해야 할 각종 일들에 대해 전화로 보고를 받고 그에 맞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조직의 핵심 브레인인 그녀가 부산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직 내에서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때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곳이 바로 칠성이라는 곳과 태무라는 조직이다. 다른 곳도 얌전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두 조직이 가장 눈에 띄게 거동하며 백당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아, 여기서 백당이라는 이름은 리사네 조직의 이름이자 리사 아버지의 호라고 했다. 처음 들어 보는 데도 어쩐지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그런 주먹 세계와 전혀 인연이 없는 나도 알 정도의 이름이면 정말 많이 알려진 대단한 조직인 건가 싶었다.
최근 들어 백당에서 운영하는 기업들의 자금 흐름이 둔해지고 이에 따라 여러 사업이 삐걱대고 있기에 누구보다 리사의 지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이렇게 조직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고 리사의 부재는 더욱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결국 참다못한 수장의 명령에 따라 부장급인 태호가 움직였다.
"아버님은 리사 아가씨에게 부산으로 돌아오라고 여러 번 권고를 하셨습니다. 사람도 보내셨고....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피우시더군요. 그래서 아버님은 리사 아가씨가 서울에 있겠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찾으셨지요."
태호의 시선이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좀 쑥스러워서 헛기침을 했다. 그들은 나와 쌍둥이 자매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순 없었다. 태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죽이지만 말고 최대한 신속하게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직접 시키신 일이니 밑에 있는 애들 시키기도 뭣하고... 제가 직접 나섰습니다. 급히 움직이다 보니 다른 조직에게 뒤를 밟히는 줄 몰랐군요. 제 실책입니다."
태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전에 예린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녀도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예."
"너도 그렇고 예린이도 그렇고... 왜 다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너랑 예린이랑 남매야? 리사하고도 상관있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렇죠."
"그건 또 뭔 소리래."
태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바깥의 기색을 살폈다. 나도 귀를 기울였다. 무어라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좀 들리긴 했지만, 쓸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저희 내부의 이야기이긴 한데.... 형님에게라면, 뭐 말해도 무방하겠죠."
예린을 들먹이며 겁박을 준 게 유효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제 날 형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만년 외동아들로 자랐는데 난데없이 동생이 생기고 나니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버님이 직접 키우시고 길러낸 저희는 그분을 아버님이라 호칭합니다. 조직의 다른 분들은 큰형님이나 오야붕이라고 부르지만, ... 특별히 저희에게만 허락된 호칭이죠."
"직접 키우고 길러냈다?"
"말 그대로입니다. 부산에서 버려진 아이들이나 미혼모의 자녀들이 몸을 의탁하는 시설이 있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시설이죠. 그곳 출신 중에서 소질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님이 직접 훈육하고 길러내십니다. 교관님께 따로 교육도 받죠."
예린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세한 뒷배경까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리사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호칭한다고 했을 뿐이다. "사람"을 공급하는 일도 한다고 했는데 그게 이 정도의 스케일 일 줄은 몰랐다. 그녀의 별명과 교관 이야기도 아주 우연하게 듣게 된 일이었다. 예린은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할지언정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털어놓지 않았다. 태호는 자신들의 "형제"가 자신과 예린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라고 했다.
"예린 누님이 가장 에이스고.... 그다음이 저입니다."
녀석은 덩치에 맞지 않게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우, 징그러.
"그럼 세컨드 에이스씨. 나를 저기까지 올려줄 수 있겠어?"
내가 가리킨 것은 약 3미터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환풍기였다. 천장에 콘센트가 있었지만, 플러그가 빠져 있어서 돌고 있지는 않았다. 태호는 내 키를 가늠해보더니 그 벽 아래로 가서 섰다. 비록 기운 빠지고 지친 몸이긴 하지만 나를 받쳐주는 데는 무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라가서 어쩌시게요?"
"아까 창고를 뒤지다가 이런 걸 주워서 말이야."
내가 내민 것은 짧고 굵은 철사였다. 손으로 구부리려고 했는데 조금 굵은 편이라 곤란하다. 태호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좀 한심스럽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설마 그걸로 누굴 찌르기라도 하시려구요? 택도 없습니다."
"누가 찌른데? 일단 환풍구로 나갈 수는 있겠지?"
"저라면 어렵지만... 형님 덩치라면 가능하겠죠. 그런데 나가더라도 금방 잡힐 겁니다. 바깥은 불빛이 밝아서..."
"나도 알아. 일단 저거부터 떼 보자."
일단 태호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환풍기를 떼어냈다. 적어도 몇 년은 청소 없이 묵혀둔 먼지가 삽시간에 나에게 쏟아지긴 했지만, 환풍기를 떼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꽤 낡아있었기 때문이다. 벽이랑 붙어 있는 부분의 시멘트가 다 닳아빠져 낡아있었다. 환풍기를 가지고 일단 내려왔다.
"좋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환풍기의 한쪽 모서리를 이용해서 가지고 있던 철사를 구부렸다. 한 번 더 구부려서 U자형으로 만들었다. 양말 한 짝을 벗어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시 태호를 딛고 올라가 환풍구에 매달렸다. 좀 끙끙거리기는 했지만, 간신히 몸을 반쯤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창고 입구와는 반대편에 나 있는 곳이라 이쪽으로 나가도 바로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뒤집었다. 벽에 반만 걸쳐진 몸이 다소 괴롭긴 했지만, 동작은 신속할 필요가 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형님."
"착한 아이들은 따라 하지 말아야 할 것."
"네?"
"조금 물러나 있어. 튈지도 몰라."
양말로 철사를 붙잡고 천장에 붙은 콘센트를 향해 조금 밀어 넣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손의 감각만으로 조금씩 더 밀어 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래 지금쯤이면.....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불이 나갔습니다!"
"정전인가?"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전기가 모두 나가버리자 갑자기 닥친 어둠 속에서 녀석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원래 별도의 건물에 전기설비를 할 때 각각 차단기를 설치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대개 이런 옥외에 창고를 막 지을 때는 그런 원칙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차단기 하나에 전선만 물려서 사방에 조명을 임의로 만들어 다는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내가 여기서 쇼트, 그러니까 합선을 시켜버리는 순간 차단기가 떨어져 나가고 이 일대는 암흑 속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물론 순간적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튀어 나간 철사를 잡고 있던 내 손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충분한 수확이었다.
자격증 공부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던 강사님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환풍구에서 몸을 빼어 바깥으로 나왔다. 미리 눈을 감고 있었기에 어둠에 금방 적응했다. 천만다행으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아까 봐둔 컨테이너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거기에는 전화가 있을 것이다.
'제발.....'
컨테이너 뒤에 도착했고, 그늘 속에 숨어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꺼진 조명에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무실 내부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역시 다들 나가고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컨테이너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고, 위에 있는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빠른 속도로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자식들이 옛날 구식 퓨즈로 된 브레이커를 쓴다면 복구에 오래 걸릴 테지만 전자식 브레이커를 쓴다면 스위치만 올리면 바로 불이 들어올 것이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뚜르르르 하는 통화 연결음이 엄청나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조바심에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난 수화기에 대고 빠르게 외쳤다.
"칠성! 물류창고! 회색 봉고! 부산54가에 562......"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발을 확 잡아당겼다. 불시의 기습에 수화기를 놓치고 말았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그 순간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너무 환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 뛰어 들어온 남자는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이 새끼, 아까 그놈 아냐? 이게 어떻게 여기 기어들어왔어?!"
다짜고짜 발길질이다. 복부에 제대로 꽂힌 킥이 속을 아주 제대로 뒤집어놓았다.
"쿠엑....쿨러....억."
날 걷어찬 놈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까도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찢어진 눈은 옆에 있는 뚱뚱한 녀석에게 눈짓했다. 뚱땡이가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배도 아파 죽겠는데 목이 졸리니까 더욱 괴로웠다. 눈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너, 이 새끼. 백당하고는 무슨 관계야. 그리고 우리가 칠성인 건 어떻게 알아?"
백당과 내 사이? 대체 무슨 사이지... 당장 생각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되는 대로 대답했다.
".........그냥. 그렇고 그런....사이랄까?"
"장난해?!"
그는 장난이냐고 물었지만, 내 배에 꽂히는 주먹은 장난이 아니었다. 오늘 온종일 먹은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라면이라도 먹었다면 여기서 내가 뱉은 걸로만 라볶이 요리가 가능했을 거야. 그나저나 칠성이 맞았군. 긴가민가했는데 확인시켜줘서 정말 고마웠다.
"누구한테 전화했어. 말해!"
"........예쁜 천사."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이후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욕, 구석구석 때려주는 구타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내 정체와 백당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 물론 맞을 때마다 비명과 신음을 내느라 그때는 입을 좀 벌리기도 했다. 그건 어떻게 안 되더라.
잠시 후, 아까 태호보다 더 심한 몰골이 되어 창고에 다시 갇혔다. 피떡이 되어 돌아온 나를 보고 태호가 혀를 찼다.
"형님이라도 도망가시지 왜 돌아오신 겁니까."
"난 여기 초행길이란 말이야. 나가도 길을 몰라. 저기 말이야. 혹시 택시 불러주나?"
"으음."
태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곁에 누워있던 성제라는 녀석이 킬킬거렸다. 녀석은 나와 같이 창고에 끌려왔는데 이놈도 몰골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리사 아가씨나 예린 누님 마음에 들었을 법도 한 아재네예. 저 입담 보소. 큭큭큭."
태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 고생을 하고 나가서 뭘 하신 겁니까? 전 또 가시겠다는 줄 알고 올려드렸더니."
"이 형님 나가시는데 동생이 배웅을 안 나와서 말이야. 그래서 다시 들어와 봤어."
다시 성제는 배를 잡고 웃었고 태호는 짜증을 냈다. 이놈은 개그가 안 통하는 놈이구나.
"흰소리 그만하고 말 좀 해보시죠. 나가셔서 뭐했습니까?"
"천사한테 전화 좀 하고 왔어."
"천사요?"
태호는 이놈이 이제 드디어 돌았구나 하는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소란스럽고 왁자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태호는 왔다 갔다 하며 몸을 풀고 있었고 난 성제를 돌봤다.
그대로 한 시간쯤 흘렀을까. 무언가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과 욕설이 뒤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제 쇼타임이다.
태호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날 보며 무언가 묻는 듯한 표정을 보냈다. 난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하는 무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까 내가 뭐라 그랬어. 천사한테 전화했다고 했잖아. 여기 위치를 알려줬지."
녀석은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천사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형님, 혹시 교회 다니는 분이세요?"
난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설명을 일일이 해줘야 알아듣나 보군.
"아니, 교회는 안 다니는데.... 성녀 마리아랑 성녀 엘리사벳을 모시고 다니는 천사가 하나 있어. 그분께 내가 별명을 새로 지어줬지. 푸른 천사라고 말이야."
태호는 5초간 멍해 있다가 겨우 알아들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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