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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내 한때 어떤 두 자매에게 동시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녀들도 나를 사랑했고...... 뜨거운 마음으로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들은 서로 자신이 나의 유일한 아내이길 원했지. 난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선택되지 못한 그녀는 나를 맹렬하게 비난했지."
"......"
"마리와 리사, 그리고 심지어 예린에게까지 자네 이야기를 듣고 난 화가 나기보단 기가 막혔지. 이것은 대체 뭘까. 만약 신이라는 절대자가 있다면 그가 나를 굽어 살피고 있다가 내 지난 시절의 과오를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꼴이 아닐까 싶었어. 천벌이라면 천벌이겠지.... "
그가 내게 화내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 이전에 놀랍고도 신기했다. 사람이 살면서 두 상대와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두 사람이 자매지간인 게 또 흔한 일인가. 만약 리사와 마리가 그런 신비한 힘으로 엮이지 않고,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빴더라면 그 둘이 나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내가 위안을 얻는 건 그래도 내 착한 딸내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고 있다는 점일세. 그래서 화가 나기보단 신기하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자네가 보고 싶었던 걸세. 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고. 상상도 안 되더군. 얼마나 미남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기에.... 그런데 막상...."
그는 말을 줄이는 것만으로 내가 그렇게까지 꽃미남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손쉽게 표현했다. 분하지만... 사실인걸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자네 그거 알고 있나? 지금이야 한때의 불같은 감정이니, 그리고 여태껏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자매들끼리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중에도.... 평생 동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장담할 수 있나?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네. 내 것이라 믿었던 걸 남에게 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네. 그것이 마음이 되었건, 물건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렇게 먼 미래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럴 테지."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사실 그렇다. 비록 나와 두 자매, 그리고 예린까지 포함하면 세 명의 여자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상담하거나 의논한 적 없었다. 이야기만 꺼내도 누구나 미쳤다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그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엔, 나와 같은 고민을 이미 수십 년 전에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내놓는 지적은 지금의 관계가 이상하다거나 윤리,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않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가 지금 당장은 그럴듯해 보여도 미래가 있느냐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먹 쓰는 뒷골목의 세계라서 법도 질서도 없고 그저 힘센 놈이 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네. 왕이면 아무렇게나, 아무 짓이나 다 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 그렇지만 여기도 엄연히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이 어울려 사는 곳일세. 범인들이 못할 행동을 했다고 해서 자네를 비난할 수 없는 건 오직 내 처지 때문이야.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젊은 날 과오가 있기에 자네를 나무랄 수는 없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야. 그렇다고 딸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딸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네."
딸의 미래. 리사의 미래, 마리의 미래, 예린의 미래. 거기에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걸까. 사실 나도 궁금하다. 답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미래는 그저 멀고도 먼 아득함일 뿐, 결코 그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의 선택이 부디 한 아이에게 정착될 수 있기를... 그리고 남은 두 아이가 그것을 받아들여주기만을 바랄 뿐이네. 일단 자네와 내 딸들의 관계는 그렇게 정리하고 싶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앉기 직전까지 최소한 뺨, 아니 뺨이나 죽빵이 문제가 아니라 멍석말이 정도는 당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자식이 없어서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아버지가 딸 생각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내가 한 행위들이 그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간 이 시점에서 그가 나를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가 한 짓들을 인정하면서 그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 조언했다. 그가 지나치게 대인배거나 아니면 내가 한 일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적할 엄두가 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다시 술잔이 오갔고, 그는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고향은 어딘가?"
딸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고향이.... 일단은 전라도 화순입니다."
"일단은?"
"예, 그게 저희 어머니가 저를 낳기는 부산에서 낳으셨는데요... 태어나고 곧바로 화순으로 가서 거기서 계속 자랐기 때문에 고향은 화순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부산이라 아예 인연이 없는 게 아니로군. 화순이라... 화순....."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마당에는 잘 꾸며진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가장자리에는 돌로 만든 계곡 모형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감춰진 펌프가 계곡 위로 물을 퍼 올렸고, 그렇게 위로 올라간 물은 마치 폭포처럼 돌 위에서 아래로 물줄기를 형성했다.
"화순이면 혹시 백당 폭포라고 아는가?"
그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백당! 그래, 백당이다! 내가 왜 그 이름을 까먹고 있었을까.
리사에게 이 조직의 이름을 듣고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을 했으면서도 왜 그 폭포를 떠올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하긴 부산에 있는 조직 이름을 우리 동네에 있는 폭포 이름에 연관시키는 것도 좀 희한하긴 하다.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월산에 있는 그 폭포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게 백당 폭포 이름을 말한 그는 얼굴이 환해졌다.
"옳거니. 잘 아는 군그래. 젊었을 때 거기서 잠시 지낸 적이 있었지. 리사 엄마도 거기서 만났고..."
"백당은 제가 살던 동네 바로 뒤에 있어서 저도 가끔 갔습니다. 예전과 달리 요새는 물이 좀 말랐더라구요."
어렸을 때 몇 번 가보긴 했지만, 물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은 폭포가 길고 높은데다가 아래에 물이 고인 백당소는 깊은 걸로 유명해서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요새 물이 말랐다고는 하나 그래도 깊은 곳은 3미터는 훌쩍 넘긴다고 했다.
"동네 바로 뒤? 그럼 혹시 내당리라고 아는가?"
"저희 집이 바로 내당리입니다만....?"
내 대답을 들은 그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허허. 이런 인연이 있나. 세상 참 좁구만. 내가 지냈던 동네가 바로 거기라네."
깜짝 놀랐다. 정말 신기했다. 내가 서울 올라와 살면서 가끔 고향 이야기를 하게 되면 참 답답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는 타 지방 사람들에게 암만 설명해도 어디인지 감도 못 잡을 정도 조그만 동네인 데다가 첩첩산중에 있는 터라 가는 길 설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네였다.
심지어 같은 전라도 사람에게 설명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 동네다. 그러니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여태 살아오면서 원래 우리 동네 사람 말고 우리 동네 이름을 아는 사람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묘한 부분에서 화젯거리를 찾은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내당리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특이하게 생긴 방앗간이나 고작 다방 하나 있는 다방거리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보니 틀림없는 우리 동네 이야기다. 물론 그가 하는 이야기는 무려 20년 전의 내당리이긴 했지만, 워낙 시골이다 보니 변한 건 별로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마을 모습과 상당히 일치했다.
난데없는 시골 마을 이야기로 대화를 꽃피우던 그는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 혹시 내가 알던 분일지도 모르겠군, 그래."
"........"
"...아, 혹시 지금 안 계신 건가?"
내가 침묵하자 그는 조금 난처해했다. 그러나 정말 난처한 사람은 바로 나다.
"지금....도 아니고, 예전부터 안 계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희 어머니께서 결혼을 하지 않고 저를 가지셨기에...."
"흠... 그런가. 괜한 걸 물어보았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올 이야기였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면 처음엔 화를 냈다. 나중엔 우셨다. 그래서 그 후로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 이름은 최한석. 엄마를 따라 최 씨 가문의 아이로 자란 터였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해서 잊고 살 때도 되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마음먹고 나니, 불편할 것도, 슬플 것도 없었다. 그저 사회 생활하면서 이따금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불편한 게 다였다.
"아닙니다."
"크흠. 한잔 받게."
동네 이야기로 밝아졌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잔을 빙빙 돌려가며 아까 하던 동네 이야기를 마저 했다.
"사실 아까 말한 두 자매를 만난 곳이 거기일세. 아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애들 엄마가 집안과 연을 끊고 떠나왔기에 다시는 그곳을 찾지 못했지. 심지어 아내가 죽고 나서도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어. 분명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데리고 나온 거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러질 못했으니 말이야. 아내의 언니를 볼 낯도 없고...."
나와 리사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보면, 얼추 그의 나이도 역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만났다는 두 자매도 어쩌면 엄마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당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동네 사람이라면 엄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시군요."
술이 몇 순배 더 돌았다. 처음 상에 놓여 있던 술병이 모두 동났다. 리사 아버지는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리사야."
"예."
아주 자연스러운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거기서 다 듣고 있는 거 알고 있다는 듯한 리사 아버지의 부름과 그에 상응하는 리사의 대답은 서로 사전에 맞춰놓은 듯했다. 리사는 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고 다리를 뻗고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마리는 퍼뜩 일어나 정자세를 취했다. 지금 문을 등지고 서서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저 검은 정장은 필시 예린이렷다.
뭐냐. 세 명 전부 이 방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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