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88화 (388/471)

0388 / 0471 ----------------------------------------------

Route 3

리사의 아버지는 기분 좋게 외쳤다.

"술 좀 가지고 온나."

"예."

리사가 방으로 들어와 빈 술병을 챙겨서 돌아나갔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어서 나와는 전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예린이는 기타 좀 가지고 오고."

"예."

잠시 후, 리사가 술상에 술병을 올려놓고 물러났고 예린이 가져온 기타는 리사 아버지가 받아들었다. 그는 기타를 끌어안고 음을 조율했다. 퍽 익숙해보였다. 아까부터 그와 내가 나누어 마신 술은 꽤 독한 편이었는데도, 별로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사실 아까부터 많이 어지러웠다. 술에는 어지간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중년 아저씨 하나 술로 못 이기다니... 으으. 술자랑은 당분간 못할 것 같았다.

"백당 폭포에 앉아 애들 엄마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곤 했지. 그녀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었는데 사실 내가 먼저 만난 것도 언니였고... 사람의 인연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제멋대로 흘러가버리지. 우리 세 사람은 처음엔 사이가 좋았지만..."

그는 뒷말을 생략했다. 궁금했다. 한 남자를 두고, 처음엔 사이가 좋았던 자매가 어떻게 사이가 벌어졌을까. 나처럼 양쪽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었던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자매 중 한쪽이 집안과 의절하고 고향을 떠날 정도였다면, 사달이 나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수많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무엇 하나 물어볼 순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팝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일전에 내 생일날 예린이가 불렀던 그 노래다. 제목은 You mean everything to me.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You are an angel from above

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

어느새 리사와 마리, 예린도 방에 들어와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즐기는 그녀들을 보아하니 이런 자리가 자주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예린도 원래는 기타를 잘 못 치는데, 이 노래만 할 수 있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노래니까. 그렇다.

I don`t know how I ever lived before

You are my life my destiny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그날이 다시 생각났다.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 거기에 엄마도 있었다.

If you should ever ever go away

There would be lonely tears to cry

The sun above would never shine again

There would be teardrops in the sky

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엄마는 울었다. 그날 밤, 엄마가 말했다. "당신이 내 모든 것이요."

엄마는 이 노래 제목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뜻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정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었다. 영어라면 아주 질색을 해서, 영화를 보더라도 꼭 한국 영화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대체 이 팝송 제목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누가 이야기해주었단 말인가.

노래가 내 귓가에 들어오면서 가슴의 두근거림이 점점 빨라졌다.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한 미친 생각은 신경을 타고 내 몸 전체로 퍼지면서 서서히 나를 압박했다. 나를 미치게 했다. 뇌 속에서 어떤 단어들과 상황이 조합되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애써 부정했다.

노래는 계속된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두 자매.

집안과 연을 끊었다.

그날 밤, 엄마가 흥얼거렸던 노랫가락이 귓가에 아련하다. 엄마가 말했다.

[내 밑으로... 그러니까 니 태어나기도 전에, 동네에 흘러들어온 웬 놈팡이랑 눈 맞아서 도망간 여동생이 있었어. 동네 챙피하다고 호적에서 아예 파뿌리고 없는 년 취급해서 니가 여태 몰랐던 게지.]

다시 한 번, You mean everything to me.

엄마의 눈물.

엄마가 아는 유일한 팝송.

엄마는 왜 이름조차 거론한 적 없는 동생이 좋아했다는 팝송을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동생이 그리워서? 노래를 듣고 동생이 생각났다? 아니면...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 생각난 걸까? 어쩌면 그건... 엄마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이가 부른 노래가 아니었을까.

언젠가 마리는 내게 말했다. 나를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또 다시, You mean everything to me.

쌍둥이 자매.

마리와 리사를 보고 놀라던 엄마의 얼굴.

엄마는 왜 쌍둥이를 보고 놀랐을까. 쌍둥이가 물론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놀란 이유가 뭘까. 쌍둥이라는 사실이 엄마에게 남다른 의미여서 그런 게 아닐까.

리사도 언젠가 내게 말했다.

[.......오빠를 처음으로 딱 마주할 때, 왠지 낯설지가 않고 편안한 게 남 같지가 않았어요........]

나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두근거림이 너무 심해서 심장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과호흡 증후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호흡을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숨을 쉴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너무도 많은 생각과 너무도 과한 추정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숨을 쉬는 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인데, 어째서 숨 쉬듯 할 수 없을까.

대체 왜. 왜. 어째서 우리가.

"어....어르신!!!"

내가 외치는 소리에 연주가 뚝 끊어졌다. 리사와 마리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얼굴에 핏기가 없을 테다. 왜냐하면 내 몸의 모든 피가 지금 심장으로 거꾸로 역류하고 있으니까. 자신의 노래가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에 방해를 받은 게 조금 못마땅했는지 리사 아버지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이쪽을 보았다.

그를 보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붕어처럼 한참을 뻐끔거린 후에야 겨우 말을 꺼냈다.

"....하....아.....호...혹시..."

"왜 그런가?"

간신히 쥐어짰다. 내 안의 목소리는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고작 간신히 입을 열어 단어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었다. 마리와의, 리사와의 그 뜨거운 밤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래는 멈추었는데도 여전히 내 귓가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리사 어머님의.... 그러니까 어르신의 부인이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자신의 노래를 끊고 뜬금없이 부인 이름을 묻는 내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최숙희였네만."

최 씨. 왜 하필 최 씨인 거지. 그 좁은 내당리에서 최 씨 집안은 하나뿐이야. 우리 엄마는 그 하나뿐인 최 씨 집안에서 고명딸... 오빠 밖에 없는 막내딸이었다. 나중에는 막내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다 클 때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차마 이것까지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물어봐야 했다. 확인해야 했다.

"....서...설마....희자 돌림의?"

리사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래. 나도 내가 아는 게 이상하다고. 원래는 몰라야 하는데. 어째서 아는 거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이제 마지막, 정말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였다.

"그렇다면.... 그분의 언니 분 성함이....? 그러니까... 리사 어머님...그 분의 언니 되시는 분의 이름은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영희였네. 최영희."

너무 쉬운 대답은 대답이 아니다. 차라리 그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한참을 궁리해야 했다면, 내 기분이 더 나았을까. 그러나 그는 내가 묻자마자 대답했다. 아직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고, 못 잊고 있던 게 틀림없다. 엄마가 잘 따라 부르지도 못하는 팝송의 제목과 그 뜻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십여 년을 넘어선 어떤 기억의 퍼즐이 완성되었다. 잔뜩 엉켜있고, 뒤집어지고, 조각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퍼즐이었지만, 그 틀이 갖춰진 이상 전체적인 그림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퍼즐의 한 조각은 내가 들고 있었다. 거기엔 어린 내 모습이 있었다. 나는 왜 아빠가 없냐고 묻는 내 모습과 그 질문을 듣고 슬퍼하는 엄마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말하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흡이 더 가빠져서 입을 여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외람되지만... 아까 말씀하셨던.... 자매를 둘 다 취했다고 하신 말씀이.... 혹시 그분들 맞습니까? 그렇습니까?"

대놓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지만 해야 했다.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바랐다. 그가 부정하길 바랐다. 그런 일은 없었네. 자네가 무례한 질문을 했군,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가, 이런 대답이 나오길 바랐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제기랄....... 어째서 그는 엄마의 이름을 내게 말하는 걸까. 그가 젊은 시절 품었던 여인이 왜 내 엄마였다고 말하는 걸까. 쌓여있던 생각은 와르르 무너지며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무언가 거대한 해머가 날아와 나를 강타했다. 여기서 엄마 이름이 나오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빠진 호흡, 격렬하게 올라온 취기, 어지러운 머리는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여태 연재하면서 가장 폭발적인 댓글 반응을 지난 화에 보았기에 이번 에피소드는 좀 더 빠르게 연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