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90화 (39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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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밤이 되기 전에, 우리는 부산을 완전히 떠났다. 리사가 부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서울로 돌아갈 순 없었다.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아버지 - 또한 나의 아버지로부터 피해야 했지만, 그런 동시에 리사 역시 몸을 숨겨야 했다. 백당의 비밀을 아는 그녀를 노리는 사람은 많았다. 여태껏 그녀가 안전했던 건, 노리는 사람보다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었다.

다행히 리사는 모든 일에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 중 무기명으로 된 일부를 빼돌려 우리가 쓸 수 있게 했다.

도피 생활 첫 해는 울산에서 보냈다. 약 반 년 정도 거기서 살았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으로 시작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백당은 물론 백당의 적대 조직들에게도 꼬리를 잡히지 않아야 했기에 외출도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신분을 세탁할 준비는 추진해야 했다.

이런 방면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리사는 내게 걱정 말라며 열정적으로 준비했다. 그때 리사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서 말이다. 신분을 숨길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춰지고, 울산을 떠나기 직전, 리사는 유산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갈 때 이미 3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고 했다.

여러 가지로 조심했어야 하는 때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우리를 숨기기 위해 사방으로 노력을 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늦은 가을, 하혈이 시작되고 병원에 실려 가서야 그녀는 자신이 임신 중이었다는 걸 실토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면 그녀를 부산으로 돌려보낼까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더 미안했지만, 리사는 훨씬 더 큰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작은 병원, 좁은 병실에서 그 날 우리는 서로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 직후, 가짜 신분을 가지고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떠났다.

오지에 정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귀향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포장되곤 하지만, 시골 생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나 자신이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도시에서 보낸 터라 시골 물이 너무 빠졌다. 다시 손에 흙을 묻히는 건 꽤 난이도가 있는 일이었다.

나무를 베어와 버섯 포자를 심고 개집을 지어 개를 기르면서 완연한 시골집의 풍모를 갖추는 데는 거의 일 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자연의 품 안에서 리사의 몸이 예전만큼 건강하게 회복되는 시간도 그만큼 걸렸다.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이 오고 가는 강원도의 삶은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육체노동은 차라리 쉬웠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는 생활이 더 어려웠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곤 하지만, 아예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이 살 순 없었다. 버섯 재배도 그렇고 하다못해 개장수에게 개를 넘기는 일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읍내에도 종종 나가야 했다. 그때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적응을 못해 초반에 애를 먹었다. 이곳에서 내 이름은 "최영수"였고 리사의 이름은 "김희지"였다.

그렇게 3년이 더 지났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또 눈이 왔다. 강원도에서 지내며 세 번째로 맞이하는 겨울이지만, 여전히 눈에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가을에 싸리를 베어 만들어 놓은 빗자루를 들어다가 개집 위에 쌓인 눈을 쓸어냈다. 이제 눈이 오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못 되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쌓였다. 눈이 쌓여봤자 얼마나 무겁겠냐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개집이 무너져 버렸던 작년을 생각하면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축사 안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녀석들이 내가 나타나자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꼬리를 흔드는 놈, 꼬리가 아니라 숫제 허리를 흔드는 놈, 철망 꼭대기까지 펄쩍펄쩍 뛰는 놈,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옆에 있는 놈을 무는 놈까지....

저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해피는 미리 분리시켜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 개집의 옆에 따로 놓여 있는 커다란 개집으로 다가갔다. 빗자루로 지붕을 쓸어냈더니 안쪽에서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게 들렸다.

"워워, 인마. 니 주인이다, 주인. 니 새끼 안 건드릴 테니까 가만있어."

밥그릇이 비어져 있는 걸로 보아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쪽을 힐끔 들여다보니 꼬물꼬물 거리는 것들이 어미의 품 안에 잘 갈무리 된 게 보였다. 해피가 일주일 전에 낳은 새끼는 모두 여덟 마리로 추정한다. 추정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해피가 새끼 낳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하도 날 경계하는 통에 제대로 가까이에서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개를 키우지만, 해피는 유독 날 따랐던 개다. 그랬던 녀석이 새끼를 낳더니 완전히 돌변해서 밥 주려고 다가간 나를 물기까지 했다. 이해는 하지만, 괘씸했다. 그래서 밥그릇에 사료를 듬뿍 담아주고 눈을 마저 치웠다. 그리고 창고에서 지푸라기로 엮은 거적을 가져다 개집 위에 더 얹었다. 녀석을 위해서 일련의 행동을 해주고 있는데 이놈은 계속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더 미적거리다간 또 물릴 것 같아 얼른 물러났다. 작년 겨울에 자기 새끼들 전부를 데려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참고로 그때 나눠준 개 대신 받은 쌀과 과일은 이번 겨울을 나는데 참 요긴하게 쓰였다.

마당 전체를 쓸 엄두는 나지 않아 개 축사와 창고까지의 길만 쓸어놓았다. 어차피 한 시간 후면 또 나와서 쓸어야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일단 빗자루를 내려놓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 서서 어깨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한참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사가 날 맞이했다.

"눈 많이 오죠?"

"응. 제법 오네."

리사가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로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한 눈에 보일 만큼 배가 부른 채였다.

"해피는 어때요?"

"건강한 모양이야. 밥그릇은 싹 비웠더라고. 그리고 나는 얼씬도 못하게 해."

"평소에는 오빠 그렇게 좋아하더니."

"그러게. 엄마가 되고 나면 달라지나 보지."

이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리사를 스윽 바라보았다. 한 번 실패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정말 엄마가 되려는 그녀를 말이다. 리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요. 나도 이번에는 해피처럼 순풍순풍 낳을 테니까."

".....개처럼?"

"어머, 내 말이 그렇게 되나?"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녀를 부축하여 소파에 앉게 하고는 태교 음악 CD를 틀었다. 거실 가운데 놓인 조개탄 보일러에 탄을 더 넣었다. 보일러 옆에 놓인 주전자에 담긴 물의 양을 가늠한 다음 보일러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있으면 보글보글 끓어오를 것이고 우리는 따뜻한 국화차를 나눠 마시게 될 것이다. 이 긴 겨울 동안 우리가 내내 그래 왔듯이 말이다.

리사는 지난번 시내에서 받아온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며 다음 주에 들어가게 될 산후조리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 그녀에게, 병원 한 번 가려면 차 몰고 30분 넘게 가야 하는 이 시골보다는 설비가 좋은 시내에서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리사는 내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리사는 몇 곳을 추려놓고 내게 의견을 물었다.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좋은 데는 비싸요."

"그런 데 쓰려고 여태까지 돈 벌었어."

리사는 빙긋 웃더니 다시 카탈로그로 시선을 옮겼다. 물이 적당히 끓은 것 같아 차를 준비하려는데, 리사가 뭔가 들은 모양이었다.

"어머, 오빠. 애들이 짖는데요?"

"글쎄. 왜 그러지?"

리사는 우리가 키우는 개들을 "애들"이라고 불렀다. 새끼라도 낳는 개가 있으면 그 강아지들의 이름을 일일이 짓느라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곤 했다. 어차피 다 크면 팔아버려야 하는 개들에게 그런 잔정을 주지 말라고 여러 번 타일렀지만, 리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도 해피가 낳은 녀석들 이름 짓느라 한참 고민하고 있을 테다.

리사에게 담요를 갖다 주고 창가로 다가갔다. 점점 더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마당 전체가 새하얀 세상이다. 그 가운데 이질적인 무언가, 우뚝 선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뛰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떻게 여길...

"왜 그래요? 누구 왔어요?"

"앉아 있어. 내가 나가볼게."

리사는 창문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현관 옆에 세워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눈발의 소리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마당 입구에 우두커니 선 사람에게 다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나와 키가 비슷한 그녀는 여전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처럼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응. 그러네. 4년만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너무 바빠서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예린은 내 어깨너머 집을 힐끔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었다. 선글라스는 여전했지만, 표정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웃는 예린이라.... 그러나 그 웃음은 낯설었다. 뿐만 아니라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일이 많은가 보지?"

"일도 많고... 드릴 말씀도 많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 드리면 안 될까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반갑지만, 그녀는 어떤 상징이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평탄하게 흘러가리란 기대에 대한 배반.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조금 힘을 주어 밀어냈다. 예린의 힘이라면 내가 밀어내는 정도는 우습게 튕겨내거나 버틸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예린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예린은 눈밭에 난 자국을 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달라지셨네요."

"그래? 어떤 점이?"

"뭐랄까요. 전에는 다소 나약한 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강인해지셨군요."

등 뒤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예린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말을 많이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코트 안에서 신문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건네받았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려는 모양이었다.

"내일 같은 시각에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거절했지만, 예린은 거절을 거절했다.

"그럼 이만."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우산도 쓰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듬직해 보였다. 그런 동시에 꽤 쓸쓸해 보였다. 우산이라도 쥐어줘서 보낼까 싶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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