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1 / 0471 ----------------------------------------------
Route 3
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손에 들린 신문을 살폈다. 눈발이 거세어 한 손에 우산을 든 채 신문을 펼치기는 곤란했다. 일단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리사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어... 신문 보라고 말야."
손에 들린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리사는 손에 들린 뜨개질 거리를 내려놓았다. 가을부터 짜던 건데 아직도 무슨 모양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리사 말로는 내 스웨터라고 하는데... 흐음. 그녀는 음식에는 소질이 있어도 뜨개질은 확실히 아니었다.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도 고역이겠네요. 이런 날씨에.... 한 번 줘보세요."
"응? 으음..."
조금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이 건네주었다. 방금 스쳐 지나가듯 본 신문 제호가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는 우리가 도망치듯 떠난 도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리사는 신문을 받아들고 맨 위에 쓰여 있는 걸 확인하더니 작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이 동네까지 이런 신문이 와요? 신기하네...?"
"글쎄. 나도 몰랐는걸?"
"우리가 부산에서 왔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아는 걸까요?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글쎄에..... 어쩌면 리사가 가끔 쓰는 사투리를 들은 사람이 있나 보지."
"흐음. 전 사투리 잘 안 쓰는데... 누가 그걸 알아차렸지?"
예린이 주고 간 신문은 부산지역 일간지였다. 그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부산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예린과 헤어지고 마당을 가로질러 오면서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걸 리사에게 숨겨야 하나. 그냥 마당에 던져버리면 하얀 눈에 뒤덮여 보이지 않게 될 텐데.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리 둘이 핏덩이를 떠나보내고 울며 지새웠던 밤에 세운 원칙이 하나 있었다. 그건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자는 것. 지난 4년 동안 세상을 상대로 거짓 이름을 대긴 했지만, 난 단 한 번도 리사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다. 조금 전 예린의 방문을 숨긴 것이 4년 만에 해보는 첫 거짓말이었다.
간만에 보는 신문에 푹 빠져 있는 리사 곁에 앉았다. 그녀는 기사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고 있었다. 오랜만에 읽는 거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신문이 재미있어?"
"그러게요. 오랜만에 보니까 읽을 만하네요."
그녀는 한 장을 넘기며 말했다.
"우리도 신문이라도 볼까요? 솔직히 TV도 없이 사는 건 좀 너무 하잖아요."
"라디오가 있잖아."
"치잇. 잘 잡히지도 않는 걸요."
산골 마을, 그 마을에서도 변두리에 속한 이 집을 구해 터를 잡으면서 일부러 전화도 놓지 않고 TV도 놓지 않았다. 심지어 요새 개나 소나 다 들고 다닌다는 휴대폰도 만들지 않았다. 누가 말했더라. 심연을 바라보는 자, 심연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마찬가지 이치로, 세상이 우릴 보길 원치 않으니 우리 역시 세상을 등지기로 한 터였다.
리사가 임신을 하고 난 이후에나 겨우 오디오 콤포넌트를 하나 장만했다. 태교용 음악 CD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 산동네에서 라디오를 수신하려면 내장 안테나 정도로는 어림없고, 외부 안테나선을 연결하고 길게 빼어 집 밖, 지붕 위로 올려야 한다.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몰랐다.
주전자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으로 가서 잔 두 개를 준비하고 말린 국화꽃을 담은 후 거실로 나왔다. 찻잔을 테이블에 놓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리사는 신문을 테이블에 놓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 읽은 모양이었다. 국화를 말리면 꽃잎이 오므라들어 작은 알갱이처럼 되는데,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다시 예전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예전 같은,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응?"
"이거... 누가 갖다 줬죠?"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어찌 리사를 속이겠는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잔을 마저 다 채웠다. 찻잔 하나를 리사에게 내밀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모처럼.... 예전의 표정이 돌아와 있는 리사였다. 국화보다 아름답고, 국화차보다 뜨거운 표정이었다.
"옷장에 시커먼 옷밖에 없는 여자."
"......예린 언니?"
"응."
이미 짐작했던 모양이다. 리사의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차를 한 잔 마신 리사는 손가락을 들어 광고란을 가리켰다. 신문 한 면을 칸칸으로 나누어 일반인도 광고를 게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슨 무슨 변호사 취업인사. 무슨 무슨 중학교 몇 회 동창회 개최. 무슨 무슨 재단에 아무개 이사 취임 축하. 등등 요즘 같으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고 말 사안들이 실린 케케묵은 난이었다. 요새 누가 저런 것까지 다 읽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송 부장이 결국 치고 올라갔군요."
"송 부장?"
"예.... 아마... 오빠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그 날...."
그 날.
그래. 사람이 살다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어떤 커다란 하루가 있다. 모든 시간을 역행할 수 없다지만, 커다란 하루를 겪고나면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내게 그런 하루가 있었다.
태어나 살면서 평생 몰랐던 아버지를 알게 되고, 내가 사랑한 여인들이 사실은 내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떤 하루. 그 일이 있었던 집. 그곳에 방문했던 날.
내게 묘한 눈빛을 보내며 리사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던 남자. 그가 송 부장이었다. 리사가 말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가 날 바라볼 때 느껴지던 쐬한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치고 올라갔다는 건 무슨 이야기지?"
그녀에게 사정을 묻자 리사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사실 지난 4년 동안 부산의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마리가 잘 지내고 있는지, 예린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족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둘 사이 불문의 금지어였다. 그러나 리사가 생각하는 지금의 사태는 그런 금지어에 대한 제약을 풀 때라고 판단된 모양이다.
"송 부장은 이를테면... 개국공신 같은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이십여 년 전 백당을 세울 때 주축이 된 멤버 중에 가장 막내 분이었죠. 저와 마리가 어릴 때는 잘 놀아주기도 하는, 그런 분이였어요. 그러다 제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조직의 일에 개입을 하고 '형제'들을 키워내는 일을 하기 시작하니까 경계를 하기 시작하셨죠. 이런저런 일로 저희 아버지를 제외하고 앞에 분들이 다 없는 마당에 그분은 당연히 자신이 저희 조직을 맡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 한 계집애가 조직 일에 끼어들기 시작하니까 못마땅하셨던 모양이에요."
"어린...? 대체 몇 살부터 조직일을 한 건데?"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건 열일곱 정도...? 그전부터 훈수 비슷하게 잔소리를 해왔지만요. 대충 열 살 때부터 아버지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긴 했었죠."
요새는 조기교육으로 영어니 한문이니 하는 걸 아주 일찍부터 시키는 게 유행이라고 하는데 진정 조기교육은 여기에 있었다. 그 나이 때 알면 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뜨악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리사는 다소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몸이 약해서 늘 병원과 집에만 있었잖아요. 병원에 있을 때는 돌봐주러 온 아저씨들에게 늘 조직 이야기를 들었고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 일 하시는 방 바로 옆에 누워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죠. 사실 예린 언니를 비롯한 형제들 거두는 문제도 처음에는 제 친구가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이래서 맹모가 자식 키우느라 세 번이나 이사를 다닌 모양이다. 나중에 리사가 낳은 아이는 절대로 좋은 환경에 데려가서 키워야겠다. 조직 같은 건 얼씬도 못 하게 해야지.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뭘 보고 송 부장 일을 안 거야?"
"이거요."
리사는 한 광고를 가리켰다. 하단에 있는 1단짜리 박스 광고였다. 『부경지역사랑연합회 송병구 회장 취임행사 안내』 였다. 장소는 부산 시내 모 호텔. 날짜는 다음 주로 되어 있었다. 송 부장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단체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 총회는 저희가 가지고 있는 각종 합법적인 시설들의 지분을 갖고 있어요. 따라서 여기의 회장직을 맡는다는 건 백당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라갔다는 걸 의미한다구요."
리사의 "아버지"가 원래 그곳의 회장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올라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런가....그렇다는 건....그분은.... 그러니까 우리.... 그분은, 지금...."
".....어떤 식으로든 축출되셨겠지요. 만약 평화롭게 넘어간 게 아니라면요."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리사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름조차 생경한 단체의 권력 구도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부경지역 어쩌고 저쩌구든, 백당이든....
내가 궁금한 건 이 단체의 전 회장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였다.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그는 내 아버지이고 동시에 내 여자의 아버지였다. 그에게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만약 평화롭게 넘어간 거라면 굳이 예린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다. 하아. 이대로 모른 척하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가 다 식을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리사야."
"네, 오빠."
한참 고민한 끝에 리사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부르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대답은 바로 나왔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고개를 들고 내 아이를 품고 있는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깊고 투명한 눈이 날 꿰뚫어 보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원래부터 난 그녀의 손 안에 있는 어리석은 녀석이었다. 같은 이불을 덮고 살아가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다. 리사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어쩔 수 없다. 애써 그녀에게 공을 넘겨보았지만, 그녀는 가장의 권위를 존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어쩌면 그 가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미리 만들어둔 아기 방과 직접 짜서 만든 침대가 아까웠다. 그것 말고는 두고 가도 아쉬울 게 없었다. 외투를 걸치고, 다시 우산을 들었다. 리사에게 말했다.
"영만이한테 다녀올게. 당분간... 개들 좀 봐달라고."
리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