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92화 (39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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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다음 날, 예린은 약속한 시각에 찾아왔다. 이번엔 마당이 아니라 집안으로 그녀를 들였다. 국화차 세 잔을 놓고 세 명이 둘러앉았다. 예린은 제일 먼저 리사에게 사과했다.

"두 분이 잘 지내고 계신데.... 괜한 분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언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예린은 리사 앞에서 이 생활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드려 거듭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벽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퍽이나 낯설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우리를 지켜주는 푸른 천사였다.

사실 예린은 우리의 위치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누구의 손을 빌리지도 않고 그녀 혼자 단독으로 오랫동안 은밀히 추적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리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만약 병구 아저씨한테 우리 소식이 흘러 들어갔더라면, 결코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지 못 했겠지요."

예린은 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송 부장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가씨입니다."

"전 그저 힘 없는 한 사람일 뿐인데요."

"그 사람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묘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예린은 리사가 돌아와 예전과 같은 자리를 맡아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리사는 계속 거절했다. 잔뜩 불러 있는 배가 그 이유일 것 같았다.

예린이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리사가 떠난 직후에도 조직은 겉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사실 리사가 조직의 많은 일을 처리하고 많은 이들의 지휘를 담당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공식 직함을 받아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전면에 나가서 지휘하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이' 분노에 차 있는 수장과 늘 세심한 지시를 내려주는 브레인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조직을 점점 삐꺽거리게 만들게 하였다. 거기다 리사가 떠나고 몇 달 되지 않아 IMF가 터지는 바람에 부산 경제는 물론,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다. 백당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연결고리가 약해진 덩어리는 쉽게 무너진다. 단단해보이고, 커다란 것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 틈을 타서 송 부장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우왕좌왕하는 조직원들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이고 심지어 외부세력과도 결탁을 공공연히 하기 시작했다. 예린을 주축으로 한 '형제'들이 젊은 애들을 규합하여 이를 막아내고 아버지를 지켜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야금야금 조직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송 부장은 이미 절반 이상의 지분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리 아가씨는 해외로 보내드렸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유학입니다만 손을 써서 행방을 쫓을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모님도.... 국내에서 적당한 곳에 모시도록 해두었습니다. 그분은 안전합니다."

"사모님?"

리사에게 어머니가 계셨던가? 갑자기 어디서 사모님이 나타났지?

그러자 예린이 날 바로 보았다. 그제야, 조금 뜨악했지만, 누굴 이야기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우리 엄마를 부산으로 데려오겠다던 말대로 틀림없이 행한 모양이다. 거참.... 우리 엄마가 사모님 소리를 듣다니. 닭살이 돋았다. 게다가 마리가 해외라니. 영어라면 질색을 하던 녀석인데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래저래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곤란에 빠져있었다.

"문제는 아버님을 끝까지 저희가 지키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나마 송 부장이 끝까지 본색을 드러내지 못한 것도 아버님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었는데 보름 전에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셨습니다. 송 부장의 수가 분명하지만 꼬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면 이 사태를 뒤집을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급하게 아가씨를 찾아온 겁니다."

리사는 예린에게 여태까지 잘 버텨주었다고 말했다. 예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훔쳤다. 인간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이런 면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린 짐을 최대한 간단하게 챙기고, 예린이 가져온 차에 올라탔다. 리사를 뒷자리에 태우고,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예린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안전 운전 부탁해. 예린. 눈도 많이 왔으니까."

"예."

예린은 백미러를 통해 뒷자리에 앉은 리사를 잠깐 살폈다. 아까 집에서 나와 차를 탈 때 그녀의 배를 유심히 살피던 예린이었다. 난 리사를 돌아보며 괜찮은지를 물었다. 담요 하나를 덮고 있던 리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예린에게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물었다. 예린은 와이퍼를 작동시켜 창에 덮이는 눈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태호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해온 게 창원이었습니다. 일단 거기로 모실까 합니다."

"창원이라...."

거기는 부산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본거지인 부산에 머물기도 어려운 건가 싶었다. 리사를 돌아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요새 부쩍 잠이 많아진 그녀인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주무시는 건가요?"

"응. 부쩍 잠이 많아졌어. 원래 임신부는 다 그렇대."

"그렇군요."

예린은 리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신기해?"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도 언젠가는 시집 가서 저렇게 배 불룩해지는 날이 오려나? 굳이 신기할 필요 있겠어? 하하."

괜한 농담을 던져보았지만, 상대의 반응이 썰렁하니 급히 무안해졌다. 문득, 예전에 다리를 다쳐 병실에 있을 때, 예린을 옆에 두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야기를 던졌을 때 그녀가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쩌면 타인과의 이런 대화가 익숙하지 않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도 가질까요."

"응?"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의 이야기를 잠깐 놓쳤다. 방금 무슨 말을 했느냐 물었지만,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다시 물어보아도 입을 그저 꾹 다물 뿐이었다.

우리가 탄 차가 창원에 도착한 것은 꽤나 늦은 밤이었다. 강원도에서 아침에 출발했지만, 리사의 몸 상태를 염려하여 꽤 자주 쉬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오랜만에 하는 장거리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리사는 애써 괜찮다며 예린을 오히려 재촉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작은 사무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이 우릴 반겼다.

"아가씨!"

"아가씨다!"

안에 들어서자 태호를 위시한 수많은 이가 리사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눈빛은 반가움으로 가득했지만, 만삭인 리사를 보면서 우려가 담긴 눈빛도 동시에 보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나를 향해 꽤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는 녀석까지 있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래...

내 부축을 받은 리사가 소파에 앉고 모두 앉게 했다.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에 빽빽하게 들어선 인원이 모두 리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리사의 바로 옆에는 내가, 등 뒤에는 예린이 서 있었다. 리사는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린 언니에게 상황은 들었습니다. 한동안 개인 사정으로 조직을 떠나 있었지만, 늘 마음만은 여러분을 염려하고 있었어요. 부득불 갑자기 끼어들어 도리어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싶어 저어했지만, 아버지의 부재에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이렇게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감도 많이 잃고 몸도 이렇게 무거워졌지만,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리사가 고개를 숙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녀석들의 반응을 보건데 리사는 브레인은 둘째치고 조직 내에서 일종의 아이돌 스타쯤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 아이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어쩐지 우쭐해졌다.

"일에 착수하기에 앞서 여러분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보고 싶네요. 분명 송 부장님도 우리 백당 식구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회장으로 추대된다고 해서 백당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뜻을 모은 까닭을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조직 내의 집단 행동은 중대한 위협 행위니까요."

리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 부장에 대한 불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흥분하고 억센 말투라 잘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대충 취합해보니 송 부장이 권력을 잡은 이후 이들의 일이 눈에 띄게 타락했다고 한다. 뭐, 물론 그렇다고 예전부터 아주 깨끗하고 훌륭한 일만 해오던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송 부장은 "정도"를 넘어섰다고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약을 취급했습니까? 송 부장 그 새끼는 돈에 눈이 멀어서 애들을 약장사로 내몰고 있다구요!"

"언니들 나르는 일은 좋다, 하모. 그런데 미성년자는 좀 아니제! 우리가 인신매매범이가!"

예린의 제지가 없었다면 다들 밤새도록 불만을 토해낼 기세였다. 가까스로 진정된 이들을 보며 리사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계실 때부터 우리가 지향한 건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쉽지 않더라도 되도록 합법적인 것들이었죠. 송 부장님이 그걸 무너뜨리려 하신다면 저로서는 용서할 수 없군요. 좋아요. 여러분의 뜻을 수락하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환호를 지르며 열광했다. 앞다투어 리사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곧이어 변한 리사의 표정을 읽은 내가 예린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녀는 모두를 서둘러 내보냈다. 배를 쓰다듬고 있는 리사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는다.

"왜 그래? 배가 아파?"

"조금요. 오늘따라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발길질이 심할까요?"

"차 타고 오래 이동하느라 엄마가 피곤한 걸 아나봐."

리사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배에 얹었다. 새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다. 리사의 배를 통해, 또 내 손을 통해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문을 닫고 돌아오던 예린은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예린도 이리 와서 한번 만져봐. 정말 신기해."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리 와요, 언니."

예린은 꽤 주저하며 리사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을 내밀어 리사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요 녀석이 주로 차는 부위로 옮겨 주었다. 잠시 멀뚱히 있던 예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펄쩍 뛰었다. 태동을 손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당황한 그녀의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뭘 그렇게 놀라. 역시 시집 안 간 처녀는 어쩔 수 없나 보네?"

예린은 자신의 손과 리사의 배를 번갈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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