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95화 (39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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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더 이상 뜨거울 수 없는 밤을 보낸 후, 우리는 부산으로 입성했다. 떠날 때와는 달리 아주 요란하게 방문했다. 리사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며 일부러 인사를 하러 다녔다. 그녀의 잔뜩 부른 배를 두고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 다음 부산 모처에 있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이름은 산후조리원이지만 조산원 역할도 겸하는 곳이라 출산을 앞둔 사람도 입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리사가 병원을 좋아하지 않기에 걱정을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곳은 병실이라기보단 일반 가정집 안방처럼 꾸며져 있어서 리사는 마음에 쏙 들어 했다. 방 한편에는 손바닥만 한 이불로 덮인 아기침대도 있었다. 리사는 그걸 무척 좋아했다.

특히 천장 모서리에 달린 TV가 화면이 아주 컸는데, 요 몇 년간 드라마라곤 구경도 못 했던 리사는 케이블TV에서 연속으로 틀어주는 드라마에 흠뻑 빠져버렸다. 보다 못한 내가 한 소리 해야 할 정도였다.

"TV 너무 많이 보는 거 아냐? 태교에 안 좋아."

"아까 임산부 요가 수업도 다녀왔잖아요. 어차피 여태 하나도 못 보던 건데 좀 보게 해줘요."

한숨을 쉬며 리모컨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냉철하고 사려 깊은 리사면서도 TV 보는 거에 있어서 애가 따로 없었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에 있는 물통을 꺼내다가 제법 가벼워진 것을 확인했다. 물을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리는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레 찾아오는 정기 회진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의사가 아니었다.

"누구....신지? 아....."

곧바로 알아차렸다. 4년 전에 잠깐 보고 스쳐 지나간 이를 어떻게 기억하겠느냐 싶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그때의 기억이 대번에 살아났다. 한쪽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도 그렇고 사람을 묘하게 깔보는 그 눈빛도 그대로다. 아니, 눈빛은 더 심해졌다고나 할까.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훑어보며 물었다.

"우리 구면이지?"

그 역시 4년 전에 그저 한번 보았을 뿐인 나를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신기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반갑구만. 이렇게 만나게 되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 방의 주인이 날 불렀다.

"오빠, 누구예요?"

등 뒤에서 리사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객은 과하게 얼굴을 꾸며 웃음을 지었다.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려는 걸 제지하고 슬리퍼로 갈아 신게 했다. 송 부장은 군말 없이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은 리사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리사야. 이게 얼마만이니."

"어머, 송 부장님... 아니, 이제 송 회장님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리사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송 부장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벌써 너한테까지 소문이 퍼진 게냐?"

"손 씻고 사는 저한테까지 파다하게 들리던걸요. 꽤 열심히 닦음질 하셨다고 말이에요."

"하하. 이것 참. 뭐 그렇게 되었다. 형님이 좋게좋게 봐주신 덕이지."

"자리 계시지도 않아 다들 못 본지 꽤 되었다고 하는데 아저씨는 뵙고 계신가 보죠?"

"응? 내가 무슨 수로 형님을 뵙나. 그냥 어디서 잘 계시겠다 싶은 거지."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편안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 안에서는 무수한 창과 검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이십 년 넘게 묵은 여우와 오십 년 넘은 뱀의 싸움이었다.

리사는 정말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나올 손주라도 보여 드리면 맘을 돌리실까 싶어서 모처럼 부산까지 왔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대체 어디 가신 건지..."

"한 자리에 너무 오래 해먹다보니 이가 빠지셨나 보제. 언젠가는 나오시지 않겠냐?"

"심지어 예린 언니도 싹 다 안 보이고.... 애 많이 쓰셨나 봐요?"

"허허. 싸움에 진 개들이 감히 어디라고 부산에 얼씬이나 하겠어? 어때 아는 건강하고?"

송 부장이 정말 우리 아기의 건강을 궁금해서 물어보았을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지만, 리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가 건강하니까요. 아이도 건강하겠죠."

"그렇구나. 산모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지. 암 그렇고말고. 산모가 건. 강. 해야지. 암."

식은땀이 흘렀다. 평온해 보이는 저 얼굴 너머 독사의 혀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사는 살짝 웃고 있었다.

"염려해주지 않으셔도 되는 걸요. 바쁜 분일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래. 내 정신 좀 봐라. 어이, 들어와."

송 부장이 누군가 불렀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 두 명이 각각 커다란 화분과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역시 혼자 오진 않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우리도 그에 준비를 해두었으니...

"어머, 촌스럽게 화분이 뭐예요. 아저씨. 여자한테는 그냥 꽃다발 하시지."

"그런가? 나 같은 노친네는 아직도 저런 게 좋더라고. 허허."

방 한쪽에 놓인 화분에는 "김리사 무사출산 기원"이라는 글이 적힌 리본이 달려있었다. 그 글귀의 반대편 리본에는 "부경지역사랑연합회 회장 송병구"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본 리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직 취임식도 안 했는데 벌써 저렇게 쓰세요?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러게. 요즘 농담 유행은 뭔지 몰라서 말이다. 허허."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준비랄 게 뭐 있나.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만 하면서 기다리는 거지. 뭐."

"특별히 '하자'없이, 빠짐없이 준비 잘하고 계신가 모르겠네요. 챙길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요."

리사가 강조한 '하자'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껄껄 웃던 송 부장을 정색하게 만드는 덴 충분한 모양이었다. 회색 잔털이 섞인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게. 어디, 리사가 좀 도와줄 테야?"

"어머. 제가 돕다니요. 원래 제가 주도적으로 처리하던 것인데요. 제 승인 없이는 함부로 밖으로 나돌고 그럴 게 못되는데... 감히 누가 그걸 넘보겠어요. 아버님도 잘 모르실 걸요?"

"그랬었나? 하도 오래전이라 말야. 하하."

리사와 송 부장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내 아까 선물을 들고 온 이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보초처럼 문 양옆에 선 그들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바로 제압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도 이미 눈치를 챈 것일까.

내 등은 이미 흠뻑 젖어있었다. 얼굴에서 땀이 안 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시선처리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냥 혼자 멀뚱히 서 있는데도 자꾸 경직되는 얼굴이 신경 쓰여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리사... 리사가 짓는 저 자연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 살이 다 떨렸다. 하아. 정말 리사는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 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송 부장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그대로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멈추었다.

"이 친구인가? 우리 리사를 얻은 행운아가?"

"어머, 제가 아직 인사 안 드렸군요. 제 남편이에요. 오빠 인사드려요."

리사의 설명을 들은 송 부장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데 그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응... 으응.....안녕하십니까."

몸 안에서 본능적으로 이 남자를 거부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내가 긴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송 부장은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자신도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그는 손에 꽤 힘을 주었다. 악수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다. 그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어 보았다.

"최한석이라고 했던가?"

"에? 예, 그렇습니다...."

내가 이름을 이야기했던가? 그러나 내 대답을 들은 송 부장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김한석이 아니라?"

"뭐라구요?"

그제야 리사도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송 부장은 악수로 잡은 손을 와락 잡아당기더니 나를 돌려 안았다. 팔 하나가 등 뒤로 꺾였다.

"으악!"

"오빠!!"

리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자 벽장에 숨어있던 태호가 튀어 나왔다. 저 큰 덩치가 몸을 접어 숨어있는 게 참 용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튀어 나오는 속도를 보니 번개가 따로 없었다. 거의 동시에 침대 밑에 있던 예린도 뛰쳐나왔다.

그러나 내가 이미 송 부장의 손아귀에 붙들린 터라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송 부장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거기 숨어있었나? 며칠 동안 살펴도 냄새도 안 나더니... 나 잡을라고 준비 많이 했구먼 그래. 흐흐흐."

리사는 송 부장의 성격상 그가 직접 찾아오리란 것을 예측했다. 남의 손에 맡기기보단 직접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그의 행동 패턴상 분명 리사 가까이 오리란 것도. 그에 맞추어 예린과 태호를 숨겨둔 것이었다. 리사에게 송 부장이 다가오는 순간, 그 바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송 부장을 제압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리사의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송 부장이 이곳에 오긴 왔지만, 그가 노린 건 정작 리사가 아니라 나였다. 대체 왜...

"낭군님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애들을 물려. 어서!"

송 부장이 내지르는 위협에 리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태호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리사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굉장히 침착한, 그러나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리사가 송 부장에게 물었다.

"오빠를 어쩌시려구요."

"다 쓸 데가 있지. 궁금하지 않아도 돼."

송 부장의 부하들이 이쪽으로 다가와 나를 인계받았다. 송 부장은 뒷걸음치며 주위를 경계하다가 그대로 나를 끌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예린과 태호가 따라붙지만 가까이 오진 못했다. 그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내 옆구리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아직 직접 찔려본 적은 없지만, 무슨 용도로 어디에 쓰는 건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뾰족한 그것은 분명 칼이었다.

두 사람이 팔 하나씩을 붙들고 있는데다가 남들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단숨에 폐부를 찢을 수 있는 도구가 준비되어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밖에 있는 차까지 끌려가 뒷자리에 실렸다. 양옆에는 건장한 사내가 바짝 붙어 앉았고, 조수석에는 송 부장이 앉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너희가 정말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리사가 네놈을 데려올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이봐. 리사가 가진 애가 진짜 니 애 맞냐?"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하하. 나도 어지간한 일은 다 보고 살아왔는데 이런 미친놈은 정말 처음이군. 푸하하하."

내가 끌려간 곳은 어떤 외진 곳에 있는 허름한 건물이 모인 곳이었다. 이곳저곳에 컨테이너가 잔뜩 쌓여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터라 잘 확인은 안 되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폐공장이 모인 단지 같았다. 그중 한곳으로 들어가니 꿈에도 잊지 못할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의자에 묶이고 온몸이 너덜너덜 해진 채로....

"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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