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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96화 (39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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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아아. 난 어쩌면 좋을까. 분명 그를 지워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결정적인 이 순간 그를 이렇게 목 놓아 부르고 말았다. 긴 시간 동안 무차별적인 폭력에 시달렸음이 분명한 그 처참한 모습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가슴이 절절하게 아려와 숨 쉬기가 어려웠다.

"누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가 내 외침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이 부어있어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던 그가 남은 한쪽 눈으로 날 바라본다. 한동안 날 알아보지 못하던 그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너...넌! 니가 여긴 어떻게...."

경악에 찬 그는 벌떡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몸이 의자에 묶여 있던 터라 그게 쉽지 않았다. 의자를 들썩거리는 게 전부였다. 송 부장은 박수를 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감동적인 부자 상봉 시간이긴 하지만... 그런 드라마는 나중에 찍자고. 난 바쁘니까 말야. 형님. 어때요. 이래도 안 내놓으시겠습니까?"

"너 이 자식...."

아버지가 으르렁거렸다. 저렇게 핍박당하고 고난을 겪었는데도 그의 위압감은 여전했다.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송 부장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마리랑 새 형수님은 어떻게 용케도 잘 빼돌린 모양이던데 리사랑 이 녀석은 부산으로 기어들어왔더군요. 기왕이면 리사도 함께 끌고 올까 했지만, 예린이가 붙어있어서 그건 좀 곤란하겠고... 일단 이 녀석이라도 데려왔습니다만, 어째 맘에 드셨나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은 아무 상관없잖아! 우리 일에!"

"상관이요?"

송 부장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날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버지 쪽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없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없잖아! 이놈은 나랑은......"

"리사가 애를 뱄더군요. 그게 누구 애일 것 같습니까. 형님."

"뭐...뭐라고?!"

아버지가 경악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송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역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놀라시는군요. 그냥 단순한 사윗감이 아닌 모양입니다, 형님?"

"크윽...."

"처음에는 그냥 리사가 데려온 놈팡이인 줄 알았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란 말이죠. 분명히 처음 본 놈인데, 너무 눈에 익어요. 내가 이놈을 대체 어디서 봤나 한참을 고민했지요. 이놈이랑 리사랑 들고 날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계속 고민했습니다. 형님은 딸내미 하나 나른 것치고는 지나치게 상심하고 있고 말입니다. 어느 날 자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떠올랐습니다."

송 부장은 손을 뻗어 나와 아버지를 동시에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 생긴 게 형님 젊었을 때 판박이더군요. 그러니 처음 본 놈인데도, 익숙할 수밖에! 옛말에 씨도둑질은 못한다고 하더니 참말이군요. 그래도 설마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전 형수님이랑 꼭 닮은 분을 부산에 모셔오는 거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놈이 형님 아들이라는 거. 모르긴 몰라도, 돌아가신 형수님과 새로 데려오신 분, 혈연관계일 테고... 그렇다면 이놈도...."

"지나친 생각이다. 난 이런 새끼를 아들로 둔 적 없어."

"리사랑 붙어먹은 놈이라는 이야기에 저도 잘못 생각했나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결론이 났죠. 이놈과 리사가 제대로 미친 연놈들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구요. 어때요, 제 추리가?"

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쩌렁쩌렁 외쳤다.

"개소리 닥치라니까!!!"

"워워. 절대 흥분 안 하기로 유명한 형님이 이리 흥분할 정도라니.... 위험을 무릅쓰고 이 녀석을 애써 끌고 온 보람이 있군요."

송 부장이 손짓을 하자 어깨 두 명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한 놈은 검은 가죽 장갑을 손에 끼기 시작했고 한 놈은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손에 들린 야구 배트를 가늠했다. 어째 점점 불안해졌다. 송 부장은 결코 감동적인 부자 상봉이나 하라고 날 여기 데려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번져갔다.

"뭐 하려는 거야!"

"뭐겠습니까? 족치는 거죠. 형님은 아무리 족쳐봐야 강단이 꺾이는 분이 아닙니다만 이 녀석은 어떨까요?"

"그만 둬!"

"그러면 지금이라도 서류를 넘기시죠."

"그...그건...."

"뭐, 형님 아들내미 맷집 구경 좀 해본 다음 말씀 하셔도 그리 늦지는 않습니다."

송 부장은 내 쪽에 서 있는 놈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곧바로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으으... 이 새끼들..... 정신없이 맞는 와중에 아버지를 힐끔힐끔 보았다. 안 그래도 영 좋지 않았던 그의 안색이 점점 더 나빠진다.

내가 두들겨 맞기 시작한지 10분 정도 되었을까. 아니다. 처음 배를 걷어차인 이후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르겠으니 얼마나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 내 몸 전체에서 안 맞은 부위가 없다는 정도일까.

마침내 그가 비명을 외치듯 송 부장을 불렀다.

"병구! 알았다. 니가 이겼어. 말하마."

나에게 쏟아지던 매타작이 멈췄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집중적으로 맞았는지 정신이 혼미하고 온몸이 안 쑤신 곳이 없었다. 송 부장은 팔을 활짝 벌리며 기뻐했다.

"진작 그러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피차 편하지 않습니까."

"개새끼....."

"하하. 그거 칭찬이죠? 형님 자식들은 개새끼도 안 하는 훌레를 붙는데 말이에요."

"안 닥쳐? 니가 서류 받기 싫은 모양이구나."

"아아, 제가 너무 신을 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젠장...... 병구 네놈을 그때 내쳤어야 하는데....젊어서 함께 고생한 동생이라고 아꼈더니..."

"때늦은 후회는 그만하시구요. 서류 숨겨 놓은 데나 말씀해주세요. 그게 있어야 제가 진짜 회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송 부장이 아버지를 다그치는 이유를 점점 알 것 같았다. 리사는 송 부장에게 '하자'를 언급했었고, 여기에 그는 반응했었다. 리사가 관리했던, 그리고 아버지와 그녀만 아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송 부장을 그걸 손에 넣고 싶어서 아버지와 나를 납치한 게 분명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송 부장에게 쏘아 보내던 아버지도 결국은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그가 송 부장에게 굴복한 이유가 다름 아닌 나 때문이란 사실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아아아아!"

"뭐야?!"

아버지에게 집중하고 있던 송 부장이 내가 지른 소리에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난 몸에 남은 힘을 최대한 긁어모아 건방진 자세로 고개를 꺾으며 말했다.

"안마 더 안 해주나요?"

"뭐?!"

"이제 막 시원해지던 참인데 말입니다. 안마 받다가 덜 받으면 근육이 덜 풀려서 찜찜하잖아요. 나만 그런가?"

아버지와 송 부장이 동시에 짓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쾌감마저 들었다. 맞는 걸 좋아하는 메져키스트 기질은 분명히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니면 그냥 또라이 기질이 넘치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뚫린 입을 마구 놀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하던 안마마저 해주시죠. 거기 있는 아저씨는 쓸데없는 소리로 제 안마 방해하지 말아 주시구요."

실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던 아버지는 껄껄 웃기 시작했고 송 부장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너 이 새끼. 네놈이 형님 핏줄이라는 거 나한테 이딴 식으로 확인시켜 주는구나. 이 미친 새끼가!"

송 부장이 달려오더니 내 가슴팍에 발차기를 날렸다. 막는다고 팔을 교차해 봤지만, 가드도 소용없었다. 팔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를 향해 악귀 같은 얼굴로 변한 송 부장이 발길질을 해댔다. 구수한 욕은 무료 부가서비스임에 틀림없다. 아득한 기분이 들 때까지 계속 얻어맞았다. 정신이 없었다.

송 부장의 숨결이 거칠어 질 때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달리 점잖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제 기분 좀 풀렸는가, 병구? 그 새끼 더 패봐야 나올 건 송장밖에 없어. 그럼 나는 더 입을 안 열겠지."

송 부장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는 바닥을 냅다 차며 무어라 욕설을 퍼붓고는 어깨들을 데리고 창고에서 나갔다. 이로써 우리 단둘이 남았다.

아버지가 날 향해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냐?"

"글쎄요."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팔로 짚어 몸을 세우는 것도 팔이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아 다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강단은 좋은데 맷집은 그럭저럭이군."

"누구처럼 남 납치하고, 두들겨 패고... 이런 짓 하는 게 생업이 아니니까요."

"원래는 뭐 하고 있었는데?"

"몇 년 전까지는 학생. 지금은.... 요새는 개 키웁니다만. 어때요. 한 마리 드려요? 몸보신용으로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다가가 팔이라도 풀어주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움직이는 게 내 육체가 펼칠 수 있는 한계였다. 그는 물끄러미 날 보다가 물어보았다.

"잘.... 지냈냐?"

"그럼요. 아주 잘 지냈죠."

"리사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까 병구가 임신 어쩌구 하던데."

"......곧 예정일입니다."

"결국..... 그런 거냐..."

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나 역시 떳떳한 기분은 들지 않아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한참 후에 그가 땅이 꺼질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죄다... 다.... 내 죄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를 탓하지 않겠다. 모든 건 다 내 죄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라도 여기서 살아 돌아가게 노력해 보자."

"같이 가야죠."

"무리야. 병구는 설령 서류를 넘겨받더라도 날 살려두진 않을 꺼다. 너라면 모를까."

눈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만났는데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보고 싶다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다른 핑계를 대어봤다.

"손주... 안 보고 싶어요?"

"허허.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아이를 보겠냐."

"왜요. 남들은 손주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데 당신은 왜...."

"넌 내가 그 아이를 안아주길 원하냐."

"안 될 것도 없죠."

"그럼.. 그 아이는 내 외손주냐 친손주냐?"

말문이 턱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나대로 내린 결론이 있어 그대로 대답했다.

"외손주라고 생각하시죠. 아들... 없으시잖아요."

아버지를, 그를 외면했다.

"한석아, 넌 내가...."

"알아요. 안다구요. 엄마까지 모시고 왔다면서요. 그렇지만 난 리사를 위해서라도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어요. 금동이도 그렇고...."

"아까는 나보고 아버지라며."

"잘못 들으셨겠죠. 전 그렇게 부른 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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