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00화 (400/471)

0400 / 0471 ----------------------------------------------

연구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후배가 생겼다

──────────────────────────

연구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후배가 생겼다

──────────────────────────

영제는 신이 났다. 드디어 쫄따구가 온다!! 비록 여기가 군대는 아니지만, 엄연히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곳이니만큼 자기 밑으로 들어오는 녀석은 쫄따구로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막내 생활도 드디어 안녕이군.'

그냥 군대 가는 거보다는 병특으로 가면 편하다는 소리에 자격증도 따고 업체도 알아보고 별의별 수를 다 쓴 끝에 여기, 부산의 한 기업연구소에 들어왔다. 그런데 웬걸. 업무는 과중하고 선배들은 까칠했으며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묘한 신분이 그의 덜미를 잡았다.

'씨발. 이럴 거면 차라리 군대를 가는 건데. 아오. 그랬으면 맘이라도 편했겠지.'

이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0개월이라는 복무기간이 절반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그의 후임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 칠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고민과도 안녕이다. 오늘은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임이 들어오는 날이니까!

영제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기뻐했다.

'후배 들어오면 존나 굴려야지. 크크크.'

듣자하니 이번에 들어올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도 있고 심지어 애까지 딸렸다고 하던데 그게 뭐 대수랴. 적어도 자신이 당했던 만큼은 갚아주어야 영제 자신도 좀 편해지리라 생각했다. 언젠가 후임이 들어오면 잘 해주어야지 하고 평소에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막상 지 똘마니가 생긴다고 생각하고 나니 철저히 부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영제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소장실 문 앞에 서서 노크 했다. 그의 후임이 여기서 소장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깐깐하고 지랄 맞기 그지없는 소장에게 꼬치꼬치 지적을 받으면서 옴팡지게 깨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선임인 자신이 짠하고 나타나 인계해 데리고 가면 소장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났다는 기쁨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겠지. 그런 장밋빛 환상을 푹 빠진 영제는 어깨를 쫙 폈다.

"안녕하십니까."

영제는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늘 보는 느끼한 얼굴의 소장과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의 뒤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영제는 다른 사람보다 그의 후임임이 틀림없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놈이구나. 아따, 훤칠하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인상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하게 생겼다. 다리 길이로 짐작컨대 키가 좀 있어 보였다. 영제가 들어오는 걸 본 소장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오, 영제 왔구나. 그래, 여기 와서 일단 앉아라."

"네? 네에...."

맨날 욕이나 하는 소장이 어쩐 일로 유순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평소 안하던 행동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제는 어쩐지 불길해졌다. 그런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영제가 엉거주춤 소장이 가리키는 대로 옆에 가서 앉자 소장은 마치 친한 동생 대하듯이 영제의 어깨에 손을 처억 올리며 말했다.

"하하. 이 녀석이 아까 말씀 드렸던 이영제라는 놈입니다. 빠릿빠릿하니 일도 잘하고 눈치도 있습니다. 회장님 불편하게 모시지는 않을 겁니다."

하더니 영제의 머리를 누르며 강제로 숙이게 했다. 영문도 모를 영제는 자신의 후임이 될 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소장이 자기 후임에게 한 호칭이 맴돌았다. '회장님?'

"이영제.....입니다."

"아아, 반가워요. 전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미는 후임. 영제는 엉겁결에 그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받쳐 들었다. 그렇게 아주 무척이나 저자세로 공손한 악수를 하고 말았다.

"제 바로 위 선임이라면서요? 여러 가지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아, 예."

영제는 자신이 잘못 알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녀석은 분명 내 후임이다. 방금 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분명 오늘부로 자신이 막내생활에서 탈출하고 이 사람이 막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 모든 연구소 인원을 지 하인 부리듯이 하던 소장이 어째 이 '후임'에게 엄청난 저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영제는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한석이 소장에게 말했다.

"연구소 직접 온 거는 오늘이 처음이라서요. 여기 자료는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온라인에서 종종 이용하고 있습니다만."

"아, 그러셨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어때요? 가을에 있을 공학 포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초청 라인업도 끝났고 장소 섭외도 컨벤션 센터와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

"제가 메일로 보낸 분들께도 모두 초청장이 전달되었나요?"

"물론이죠."

영제는 어이가 없었다. 오늘 처음 연구소 왔다는 그의 '후임'은 소장에게 흡사 업무지시라도 내리는 것처럼 연구소의 굵직한 현안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었다. 소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답하기에 바빴고... 행여 미비한 사안이 나오기라도 하면 수첩에다 받아 적어가며 차질 없이 준비하겠노라고 대답까지 꼬박꼬박하고 있었다.

영제는 혼돈에 빠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게다가 아까는 이 녀석에게만 집중하느라 잘 모르고 있었는데 후임의 등 뒤에 서 있는 여자는 어딘가 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무섭다고 해야 하나... 굳이 비유하자면 새끼 사자를 보호하고 있는 암사자의 분위기를 마구마구 풍기며 푸른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자, 잠깐. 푸른 눈?'

방 안 구석구석과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는 저 눈은 분명 옅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 언젠가 술자리에서 흘려 들었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부산 바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어떤 조직이 있는데 거기 최고 주먹이 푸른 눈의 여자라고. 무슨 조폭 영화의 쓰레기 같은 설정도 아니고 애들이나 읽을 하이틴 로맨스 소설책의 이야기도 아닌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 건 다 술자리에서 그냥 지나가는 여러 뻥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내뿜고 있는 포스나 서슬 퍼런 눈빛은 영제가 들었던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런 여자가 이 사람을 보좌하고 있다....?'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동작이 커지다보니 푸른 눈의 그녀가 이쪽을 딱 쳐다보았다. 영제는 그 시선에 쫄아서 숨 들이쉬기를 텁하고 멈추었다. 목이 뻣뻣해졌다.

"영제야. 회장님 좀 연구실로 안내해 드려. 야, 인마. 뭐해?"

"아, 예. 예."

소장의 지시에 영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정말 있구나 싶었다. 영제의 후임은 멋쩍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 소장님. 여기서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 호칭은 좀...."

"그렇다고 제가 회장님을 어떻게 이름으로...."

"하하. 전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불편하잖아요."

"아, 예. 뭐...."

소장이 쩔쩔매는 꼴이라니. 영제는 오늘 신기한 거 여럿 본다고 생각했다. 소장의 배웅을 받으며 영제와 한석이 소장실을 나왔다. 한석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데 바로 등 뒤에서 발소리도 내지 않는 무언가 검은 사람이 따라붙었다는 게 등으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영제는 감히 뒤돌아볼 엄두를 못 냈다.

"이영제 씨라고 했던가요?"

"아, 예. 그렇습니다. 이영제입니다."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해버렸다. 후임이니까 말 놔도 될 텐데!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속으로만....

"여기 연구소가 인원이 적어서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예? 아뇨. 그... 그렇게까지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죽지 죽어! 데이터 분류 같은 거 조금이라도 늦어봐. 연구원들 닦달이 장난이 아니라고. 부품 조달 같은 것도 조금 늦어봐. 아주 생난리가 따로 없다! 당장 서면시장으로 뛰어가서 사오라고 난리라고! 여기 연구원들이 얼마나 성격 개차반인지 니가 겪어봐야 해!'

...라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제의 입 속으로 쑥 들어갔다.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영제의 안내를 받아 한석은 연구실이나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이미 이야기가 전달되었는지 연구원들은 다들 부동자세로 기립해서 한석을 맞이했다. 한석은 편하게 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다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어떤 검은 여자의 기세에 눌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뻣뻣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한석이 여자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하고 나자 여자는 뒤로 물러나 문밖에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한석은 연구원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넌지시 제안했다.

"다들 오늘 저녁 시간 어떠세요?"

그 누구도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고, 전원 참석했다.

그렇게 한석의 제안에 따라 그 날 저녁, 예정에도 없던 연구소 회식이 이루어졌다. 영제와 연구원들은 회식 장소에 도착하고 자신들 앞에 차려진 메뉴를 보고 나서야 이 자리가 판공비 적게 나온다고 맨날 죽는 소리하는 소장이 내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꼬....꽃등심!!!'

항상 회식하러 가는 시장 동쪽 출구 안경집 맞은편 오겹살 집에서는 결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마블링의 한우가 숯불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것을 보며 영제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씨발. 그래, 내가 막내 생활 더 하고 말지.'

흡사 고기를 흡입하고 있는 것 같은 다른 연구원들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영제도 서둘렀다. 그렇게 고대하던 후임이 오긴 왔지만 후임이 와서 기쁘다는 생각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대신 다른 곳에서 굳이 의미를 찾기로 했다. 좋은 형이 생겼다고나 할까....

──────────────────────────

*

퀴즈)

부산, 그리고 연구소라고 하면 연구소 이름이 뭐였는지 다들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힌트)

선영 루트.

당첨자 발표)

주말

정답자 중에 추첨하여 커피 기프티콘 보내드립니다.


0